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야사 Jan 27. 2024

스물두 살 직장인 : 미래 성찰 중

살아간다는 건 항해하면서도 표류하는 여정


제목을 짓고 나니, 아무래도 '성찰'이라는 단어는 다소 거창하다고 느껴진다. 문득 성찰한다는 말의 뜻이 정확히 무엇인가 싶어서 네이버 국어사전에 들어가 검색해 보았다.


성찰(省察) : 자신의 마음을 반성하고 살피는 것.



나의 마음을 반성하고 살피는 것. 그렇다면 '반성(反省)'은 무엇인가? 자신의 언행에 잘못이나 부족함이 없었는지 돌이켜 보는 것. 무언가를 성찰하고 관찰하는 일은 거의 해본 적이 없어서 아직 미숙하다. 심지어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나 사물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분명 느껴지고 존재하는 감정과 내면을 성찰한다니. 비단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나는 스스로를 타인처럼 너그럽고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도 따뜻하게 감싸줄 만큼 성숙하지 않다. 객관과 주관 사이를 유연하게 쏘다니며 균형을 조절하는 능력 따위는 가꾸는 연습조차 하지 않았다. 첨예한 관찰력과 깊은 감수성에는 나이가 따로 없다. 나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와 마음의 벽이 트여 있는 대단한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회사에서 현장실습을 했던 친구들을 만났던 날 이후로 조금씩 미래를 생각한다. 그전까지는 그저 막연히 넘겨짚을 뿐이었다. 어떤 직업을 가질까, 어떤 직장에 들어갈까 고민하려다가도 친구들과 웃고 떠들기 바빴던 학창 시절. 이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성인이 되었고, 직장을 다니고 월급을 받고 세금을 내는 사회인이 되어버렸다. 그저 멀다고만 생각했던 미래는 고작 몇 년 앞으로 훌쩍 다가왔다. 어쩌면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만 깨닫지 못하고 세상 혼자 열심히 흘러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후회와 책임 없는 삶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어영부영 휩쓸리지 않고 확실히 내가 원하는 길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 것이다. 적어도 내게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는 가장 최선의 답을 선택하는 게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에게 가장 부담을 주지 않는 일이라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취업 전선에 휘말려서 겨우겨우 사회생활을 버티고 있는, 사회성 없는 사회인이자 고졸 직장인으로서.





미래를 성찰한다는 것


위에서 언급했듯이 성찰은 '자기 마음을 반성하고 살피는 것'인데, 과연 이 말이 미래라는 단어와 자연스럽게 결합될 수 있을까. 성찰한다는 건 이미 지나간 일을 돌이켜본다는 뜻이니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성찰한다는 건 다소 어색한 표현이다. 미래를 고민 중, 미래를 예측 중, 미래를 생각 중이라는 말보다는 성찰하고 있다는 문장이 가장 어울릴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모두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는 현재의 내가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지금의 나는 무수히 많은 과거의 내가 쌓이거나 빠지거나 잃어버리거나 다시 되돌아와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미래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지금의 나를 바라보아야 했다. 그러다 보면 조금씩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미 사라지고 없어진 과거에는 너무 연연하지 않는 편이다. 흑역사를 떠올리면 수치스럽고 과거에 저지른 죄에 대한 자괴감과 죄책감은 언제나 마음속에 남아 있지만, 과거를 기억하는 것과 과거에 붙잡혀 있는 건 분명 다르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말하기 힘든 사연과 속사정은 존재한다. 나는 나의 모든 것들을 단단히 끌어안은 채 걸어가기로 했다. 다만 너무 무거운 것들은 조금씩 깎아버리기도 하고, 별로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은 가방 속에 넣어서 너무 괴로워하지 않도록.


그러니까 나의 엉터리 이론에 의하면, 분명 다가오지 않은 미래 또한 충분히 성찰할 수 있다. 그리고 성찰한다는 말은 그저 말로만 내뱉을 일이 아니다. 나 자신을 성찰해 보겠다고 다짐했으니 우선 보이지 않는 마음속에 먼저 들어가야 하는데, 눈에 보이는 통로가 없는 구역이라서 이것부터가 고비다. 어디에서든 잘 적응하고 두루두루 친화력을 발휘하는 사람보다도 자기 자신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야말로 아주 신기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군상이 존재하는 인간 세계에서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를 적절하게 연결하고 사는 인간? 그토록 지나치게 건강하고 총명한 사람은 만나면 왠지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 것 같다. 경이로움과 부러움과 미묘한 시기가 뒤섞인 감정이 제일 먼저 들지 않을까.


다만 어쨌든 자기 마음을 들여다볼 줄 아는 성인과 현인이 있으니, 그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래서 나도 도전해 보기로 했다.




미래를 성찰한다는 것은 '나'라는 사람을 세밀하게 파헤치는 일이다. 거시적인 관점부터 미시적인 것 하나도 허투루 넘겨서는 안 되는 일. 그냥 이 세상에 태어났을 뿐인 나약하고 멍청한 어떤 인간을 하나의 시대, 하나의 세상, 하나의 사회, 하나의 소우주로 바라보는, 쓸데없이 거창하고 피곤한 일이다. 그래도 나는 성찰하기로 했다. 나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나의 모습을 몽상해 보기로 했다. 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직 사람만을 파헤칠 거니까.


나를 관찰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가족과 친구를 비롯하여 나를 키워낸 사회 구성원들이 줄줄이 나온다. 그들을 따라가다 보면 시점은 다시 내가 속한 사회와 살아가는 세상을 향해 돌아간다. 머리가 아프다. 나는 그저 나일 뿐인데 왜 이렇게 많은 곳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거지? 연락하는 친구도 얼마 없고 인간관계에 큰 관심도 없는 내가 이렇게까지 무수한 것을 고민하고 글로 쓸 필요가 있나? 사실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나는 내 복잡한 머릿속과 마음이 미래를 성찰하는 것부터 서서히 정돈될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희망을 잡았을 뿐. 아무도 해주지 못할 일을 나 자신을 위해 도전해 보자고 결심했을 뿐.





세상은 현실. 그런데 나는 이상주의자.


대책 없는 이상만을 꿈꾸는 건 나도 질색이다. 현실 감각이 하나도 없는 이상주의는 삶을 괴롭게 만들 뿐이다. 그런데 쓰다 보니 이상주의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건지 궁금해져서 다시 검색창을 눌렀다. 글을 쓸 때 내가 활용하는 단어의 의미를 뚜렷하게 아는 건 중요한 일이다. 요즘 그걸 느끼는 중이다.


이상주의(異想主義)

1. [철학] 인생의 의의를 오로지 이상, 특히 도덕적 · 사회적 이상의 실현에 두는 태도.

2. [철학] 현실적 가능성을 무시하는 공상적이거나 광신적인 태도. 또는 그런 경향.

3. [철학] 정신, 이성, 이념 따위를 본질적인 것으로 보고 이것으로 물질적 현상을 밝히려는 이론. 형이상학에서는 유심론, 인생관 · 세계관에서는 이상주의라고 하며, 주관적 관념론, 객관적 관념론, 선험적 관념론 따위가 있다.


그냥 단순히 이상론만을 좇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는데, 참 어려운 뜻이 많다. 철학 전공이면 굶어 죽는 시대라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하지만 철학은 실로 대단한 학문이다. 수많은 천재들이 인간의 마음과 세상의 이치를 미친 듯이 파고들고 파고들어서 탄생한 수많은 이념과 이론이 탄생하지 않았는가. 1번 항목과 2번 항목은 어찌어찌 대충 이해는 하겠는데 3번 항목은 단어 해석부터가 고비다. 물질적 현상은 무슨 말이고… 형이상학은 또 뭐고… 유심론? 인생관과 세계관? 마블 세계관은 들어봤는데. 관념론은 또 뭐길래 저렇게 종류가 다양하지… 선험적이라는 말은 또 뭐람…. 나도 어쩔 수 없이 어휘력 부족한 요즘 애들인가 보다. 부끄러운 마음이다.


내가 말하는 이상주의는 간단하다. 나는 이상론을 좋아하지 않는 이상주의자다. 뭔 이상한 소리인가 싶을 텐데, 세상을 살다 보니 어느 정도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좋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이상과 낭만을 꿈꾸는 철없는 정신은 도무지 소멸하지를 않았다. 이상주의자는 사랑의 힘을 믿는다. 모든 면이 불완전하고 외부 자극에 쉽게 망가지며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는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서로 사랑하고 결점을 채워주며 살아갈 수 있다는 미약한 희망을 품은 채 산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단순히 연애 감정이나 이성 혹은 동성 간의 성애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힘은 인간적인 사랑, 썩어가는 세상을 버리지 않고 가꾸어 가려는 마음에 가깝다. 정말 답 없는 이상론이 아닐 수 없다.


디테일하게 따지자면 나는 비관적인 이상주의자다.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이상주의자라면 정말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상주의자면서 이상론을 싫어하고 비관적인 사고방식을 가졌기에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그래서 책상에 앉아 이런 글이나 끄적끄적 쓰는 것이다. 포르투갈의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는 <불안의 서>에 발문을 쓴 김소연 시인은 이런 말을 썼다.


어설픈 현자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여정이 곧 삶이라고 우리를 속여왔지만, 실은 내가 누구인지를 망각해야 하는 여정이 곧 삶일지도 모른다.

- 페르난두 페소아 著, <불안의 서> 김소연 시인 발문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능력' 中 -


이 문장을 읽고서는 조금 놀랐다. 삶에 구태여 큰 의미나 거창한 가치는 둘 필요는 없지만 ―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질문을 보면 마음속으로 '임신이 되었고 진통이 왔고 어머니가 출산을 했으니까.'라고 대답한다. "나는 왜 사는 걸까?"라는 질문을 들으면 "태어났는데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라고 말한다. 언젠가 따귀를 한 번 맞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 내가 누구인지를 조금씩 알아가면서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기를 실천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치 그 생각을 정통으로 반박하는 문장을 만났으니. 제법 인상 깊었다.


내가 누구인지를 망각해야 하는 여정이라. 그건 어떻게 살아가는 삶일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린다면 그건 내가 나 자신을 버린다는 말과 다를 바 없지 않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이 생기 없이 메마르며 죽어가듯 살아가는 모습은 세상 어디에서든 목도할 수 있다. 굳이 보지 않더라도 내가 누구인지를 망각하기는 싫다. 그러면 왠지 마지막 인간성과 나 자신을 향한 애정을 스스로 지워버리는 듯한 기분이라. 나는 애석하게도 나 자신을 향한 애정과 존중을 버리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 말에는 아주 공감할 순 없었으나, 비관적 이상주의자답게 습관처럼 또 무언가를 생각했다. 내가 누구인지를 망각하는 여정이라면, 적어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괴로움은 덜할지도 모르겠다고. 이 거대한 세상은 결코 나를 예뻐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성격이 밝고 싹싹하거나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예쁨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으나 그건 가정일 뿐이다. 현실의 나는 그렇지 못하다. 아무리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고 보듬어주려 해도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꾸지람과 핍박에 노출되다 보면 마음은 순식간에 쩍쩍 갈라진다. 생각이 멈추고 무기력해지고 기운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 이건 나의 경험이다. 지금은 그나마 회사생활에 좀 적응했지만 역시 완전히 익숙해지지는 못했다. 입사 초기에는 아침마다 속이 안 좋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서 출근길이 고역이었다.




별로 긍정적이지도 않으면서 어째서 내가 스스로를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하냐면, 나는 모든 인간은 성장할 수 있고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언젠가 작은 책방 겸 소품점이나 하나 차리고 ― 물론 내 인생에 자영업은 없을 거라고 확신도 하지만 ― 거기에서 옥수수차나 아이스티도 팔고 글도 쓰고 사진도 찍으면서 유유자적하게 살고 싶다는 허황한 낭만을 꿈꾸는 탓도 있다. 이상주의와 낭만주의는 다르다. 나는 낭만적인 것도 좋아한다만 낭만주의적인 사람은 아닌 듯하다. 애초에 내가 몇 살까지 살고 있을지, 내가 늙었을 때 국가가 여전히 건재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


꾸중이나 충고는 좋아하지 않는다.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꽉 조이는 느낌이다. 하지만 분명 받아들이려는 마음은 있다. 그래야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변하고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학교 다닐 때는 꾸중을 들은 적이 거의 없었는데,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는 매일 혼나는 게 일상이었다. 회사에 남아서 혼난 적도 있고 자리에 불려가서 혼난 적도 많다. 지금도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거나 잘못된 판단을 내려서 상황을 곤란하게 만들면 어김없이 불호령이 떨어진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잘못을 했으면 꾸중을 들어야 하고,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으면 충고를 들어야 한다. 그래야 겨우 뒤틀린 생각이 중심을 잡으려고 한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렇게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계속 혼나는데도 자꾸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건… 그냥 그 사람이 멍청한 거다. 고치기가 어렵다. 꾸중 백 번을 들어도 멍청한 사람이 똑똑해질 수는 없다. 멍청한 사람이 조금이나마 똑똑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기억하고 확인하고 공부해야만 그나마 열 번 혼날 일이 다섯 번으로 줄어든다. 이 또한 나에 대한 이야기다. 직장에서는 멍청한 사람이 모난 돌이다. 그건 모난 돌이 스스로 모서리를 깎아서 어떻게든 둥근 돌이 되어야 한다. 괜히 회사가 사람 망치는 집단으로 치부되는 게 아니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나는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쉽게 지나치지 않고, 그렇게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주면서 발전하고 조금씩 실수와 잘못된 마음가짐을 줄여가며 어울리는 세상을 원했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나는 이상주의적인 사람이다. 내가 바라는 세상은 도달이 불가능한 절대적 이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 나보다 조금이라도 부족한 점이 있다 싶으면 바로 어떻게든 깎아내린다. 더 심하면 그 사람을 따돌리거나 거부하거나 밀어내서 소외감을 안겨주려 안달이 난다. 그렇게 내가 살아가는 한국 사회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소외되고 배척된다. 장애인, 여성, 노인, 성소수자, 저소득층, 금융 소외자와 디지털 금융 소외 계층, 육체노동자, 공장 생산직, 특별한 이유 없이 따돌림의 대상이 되어버린 사람들…. 사회가 나서서 직접 차별하고 외면하는 것부터 일상에서 은연중에 무시하고 따돌리는 일까지. 그런 짓은 결코 제정신으로 할 수가 없다. 그런 짓을 저지르는 인간은 원래 악한 마음을 타고난 인간이거나 이성을 잃고 반쯤 미쳐 있는 상태인 거다.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분위기에 휩쓸려서, 아니면 당시에 판단력이 부족하고 미성숙했기에 그런 짓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그 일에 죄책감을 가지고 지금부터라도 죗값을 치르며 개과천선하자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만 죄의 무서운 점은, 아무리 뉘우치고 죗값을 치른다 해도 결코 과거에 저지른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는 무섭다. 내가 죽는다고 해도 끝내 영원히 남아서 사라지지 않는다. 나 또한 그런 짓을 저질렀던 경험이 있다. 이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더 자세하게 풀어내기로.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하고 싶어서 꺼내는 말이 있다면, 꾸중과 충고는 정말 적절한 때를 포착하기가 어렵다. 너무 심하면 움츠러들고 너무 느슨하면 날뛴다. 아마 대다수 부모들의 고충이지 않을까. 무작정 고함이나 체벌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아이도 말을 안 듣는다. 심하면 그 상처가 트라우마로 남아서 일찍이 부모에게 마음의 문을 닫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다. 어린아이에게 올바른 도덕의식이나 성인 수준의 배려심을 기대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니까 조용히 있어야지!'라고 생각하며 제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는 아이는 기특하고 존경스럽지만 이상하다. 무엇이 잘못된 일인지 판단하는 것과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생각해서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건 어른들도 못하는 일인데, 그걸 아이한테 요구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선호와 존중은 다르다.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이해한다. 나 또한 그랬고, 어린 생명체는 원래 그런 존재니까. 꾸중과 충고가 통하지 않는 존재들. 스스로 깨닫고 멈출 때까지 성장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존재들. 다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도 제대로 성장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흔히 자식 농사라고 말하는 것도 실은 복불복이다. 정성을 다해 키워도 엇나가는 자식이 있고,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키웠는데 잘 자라는 자식이 있다. 이건 자식으로서 하는 말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결코 무언가를 기대하면 안 된다. 자식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타인'이다. 부모가 가장 많은 헌신과 애정과 책임을 쏟아야 하는 인격체이고, 세상에서 제일 말을 안 듣는 미운 인간.


그래서 나 또한 부모님을 이해한다. 부모님도 바뀌지 않는 인간이다. 내가 고쳐지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부모님도 쉽게 고칠 수 없는 사람이니까. 자식은 부모에게 생각보다 많은 것을 숨긴다. 부모님은 결코 나의 비밀을 절반도 알지 못하고 훗날 세상을 떠나실 거라는 확신이 있다.




아무튼 나는 운이 좋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서 지금도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이곳은 나와 맞지 않는다. 태생부터 결이 달랐던 걸까. 아니면 모두가 어찌어찌 갑갑한 틀에 말랑말랑한 몸을 맞추고 살아가는데, 아무래도 내가 너무 딱딱한 인간 같다는 생각이 든다. 확실히 나는 유연성이 없다. 마음도 그렇지만 몸도 그렇다. 꼿꼿하게 서 있는 상태로 허리를 숙이면 발목에도 손가락이 닿지 않을 정도로 뻣뻣하다. 너무 단단하면 쉽게 부러진다고 했던가.


내가 원하는 세상과 내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은 괴리감이 심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곳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렇게 문제는 시작되었다.





대학교를 가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일단 지금 내 눈앞에 가장 가까이 있는 선택지는 이것이다. 대학교를 가느냐, 마느냐. 학벌주의와 남다른 교육열을 비롯한 성취욕, 권력욕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이제 대학교는 반쯤 의무 교육이 되었다. 대학을 안 나왔다거나 안 다닌다고 하면 "왜?"라는 질문을 먼저 받는다. 아무래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대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이 많고, 대학교가 아니면 갈 수 있는 곳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대학교를 안 다니면 그 시간이 뭘 해?'라는 의도로 묻는 게 아닐까 싶다. 심지어 잔인하게도 대학교만으로는 공부와 경험이 부족하다며 유학을 다녀오거나 대학원까지 끝마쳐야 비로소 사회에서 쓸모 있는 일을 하는 엘리트 취급을 받을 수 있다. 정말 박식하고 불지옥 같은 세상이 아닐 수 없다.


다다익선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학벌 좋고 똑똑하고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좋다. 공부머리와 일머리는 별개의 영역이라지만, 어쨌든 인력난과 취업난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이 기이한 사회에서 기업이나 가게를 운영하는 고용주는 머리 좋고 성실하고 뭐든 끈기 있게 해내는 직원을 원한다. 그 기준은 아마도 대학교가 된다. 어느 대학을 나오고 어떤 학과를 졸업했는지, 성적은 얼마나 좋은지와 혹시 무식하게 공부만 하다 오진 않았는지, 어떤 경험을 했고 우리 회사에서 얼마나 일을 잘할 수 있는지, 같은 임금을 주고도 얼마나 많은 일을 시킬 수 있는지…. 고졸 직장인과 대졸 직장인은 보통 연봉 수준이 다르다. 업종과 직종에 따라 차이는 있겠다만, 흔히 '회사'라고 하면 생각하는 일반적인 기업은 결코 고졸과 대졸을 동일 선상에 두지 않는다. 우리가 대학교 졸업장과 직업, 연봉으로 처음 본 사람을 자연스럽게 판단하고 평가하려 하는 것처럼.


그렇게 삶을 부분마다 나누어 마치 등급 매기듯 평가되면서 살아간다. 회사는 내 인생을 책임지지 않지만 내 인생을 낱낱이 알고 싶다며 욕심을 부리고, 나를 빈 공간에 아무렇게 쑤셔 넣는다. 그렇게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떨어져 나가는 부품을 열심히 갈아 끼우듯이. 나도 하나의 부품이 되었고 삐걱삐걱 돌아가면서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잘 버티는 중이다.




나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바로 취업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흔히 선취업 후진학 전형이라고 불리는 특성화고졸재직자전형으로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직장을 선택했다. 선취업 후진학 전형은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직업훈련을 받고 바로 취업한 학생이나 마이스터고등학교, 특성화고등학교,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을 졸업하고 대학교를 진학하지 않은 학생이 직장을 3년 이상 다니면 지원할 수 있는 전형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학업까지 병행해야 하다 보니 대부분 야간이나 주말에 수업을 듣는 경우가 많고, 도저히 회사와 학교를 같이 다닐 수 없는 사람은 ― 나 또한 여기에 속한다. 환경적인 문제보다는 퇴근 이후에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과제를 준비할 자신이 없다. ― 재직 의무가 없는 대학교에 다니면서 시간적인 여유를 만들 수도 있다.


대학교는 한국인으로서 결코 쉽게 외면할 수 없는 존재다. 대학교를 안 가고 취업하면서 돈을 벌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마치 수업이라도 들은 것처럼 그래도 대학교는 가야지, 대학을 나와야 승진도 빠르고 연봉도 많이 오르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경험을 풍부하게 쌓아야지, 이런 조언을 쏟아낸다. 대학교를 간 사람이나 가지 않은 사람이나 하는 말이 똑같다. 아주 무섭지 않은가? 누가 이렇게 대학교의 어마무시한 중요성을 온 나라에 뿌리고 다닌 것일까?


친구와 만나면 주로 직장 이야기나 추후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매번 나오는 이야기는 '어쨌든 우리나라는 대학교에 가지 않으면 소외된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소외되지 않기 위해 참 많이 발버둥친다. 소외감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토끼는 외로우면 죽는다는 말이 있는데 사람도 다르지 않다. 외로우면 죽는다. 그걸 고독사라고 부른다. 노인 고독사부터 청년 고독사까지 잊을 만하면 뉴스나 기사가 보도된다. 우리나라는 좁은 땅덩어리에 많은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데도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대학교는 현실적인 문제다. 비싼 등록금 주고 다니면서 교통비도, 식비도, 생활비도 모두 내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큰돈을 주고 대학교에 가서 배우고 싶지도 않은 학문을 배우면서 돈과 시간을 모두 낭비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컸다. 물론 의외의 재능이나 흥미를 찾게 될지도 모르고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경험을 하거나 기회를 잡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 나에게는 그렇게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최선의 선택지로 취업을 택했다. 회사는 적어도 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큰 후회는 없다. 가끔 친구들과 만나면 역시 대학교가 좋다고 말하고 사촌동생에게도 너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학원도 다니니까 꼭 대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라고 말하지만, 직장을 다니지 않았다면 지금 내 생활도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요즘에는 자꾸 대학교에 관심이 간다.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학벌주의에 학습되어 버린 사람이기에 그렇겠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면 선취업 후진학 전형으로는 지원할 수 있는 학과가 극히 소수라는 점이다. 대부분이 경영, 경제, 회계, 금융, 공학 계열이다. 안타깝게도 아직 나는 이런 계열에 관심이 없다. 회계는 고등학교 때 꾸준히 배웠지만 배울수록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조금씩 관련 정보를 찾아보면서 관심이 가는 대학교와 학과는 몇몇 발견했지만, 일단 100% 대학교에 지원하겠다는 확신을 한 것도 아닌지라 고민이 많다. 애초에 지원한다고 해도 무조건 붙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만약 대학생이 된다면 그때는 정말 살아갈 길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노를 젓고 어느 육지나 섬에 도달해서 그곳이 살기 괜찮은지 관찰하고 결정하는 것도 모두 나 자신의 몫이다. 일정한 수입이 없어지니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하고, 과제와 시험을 해치우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으니 단체 생활에도 적당히 적응해야 할 것이다. 대학교를 졸업하면 어떻게 일자리를 구해야 할지도 일찍이 고민해야 할 것이고. 역시 직장인보다 대학생이 더 대단한 것 같다.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저마다의 고충과 괴로움을 안고 살겠지. 그래도 이왕이면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다. 지금 회사는 내가 오래도록 잘 다닐 수 있는 회사는 아닌 것 같다. 전반적으로 사내 복지나 상여 제도는 괜찮은 편이지만… 뭐랄까, 너무 떠밀리듯 들어온 곳이라서 좀처럼 정이 가질 않는다고 해야 할지. 애초에 애정 듬뿍 가지고 출퇴근할 수 있는 직장은 많지 않겠지만, 아무튼 배우고 싶은 게 생긴다면 돈과 시간을 들여서라도 배우고 싶다.


아마 내게 가장 크게 변화하는 첫 번째 미래가 있다면 직장 혹은 대학교에 관련된 부분이 아닐까 싶다. 회사에 가면 늘 하던 일만 하고 만나는 사람들만 만나다 보니, 새로운 변화와 도전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지루하고 무료한 일상이 반복되어서 다소 권태로운 염증이 생기는 것도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다.





글을 읽는다. 그리고 글을 쓴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는 책을 읽는 사람이 없다. 아예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 업무에 관련된 책을 제외한다면 ― 적어도 책이나 독서 습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만약 책을 읽는 사람이었다면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이나 "요즘 나는 어떻게 독서를 하고 있어!"라고 말할 법도 한데… 거의 2년 동안 회사를 다니면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휴일에는 누구나 자기만의 시간을 보낸다. 퇴근 후 연습실에 모여서 춤을 연습하는 댄스 동호회도 보았고,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토익 학원을 다니거나 그냥 집에서 뒹굴뒹굴 휴식을 취하는 등 저마다 일정이 있다. 나는 금요일을 제외한 평일이면 누구도 만나지 않고 무조건 집으로 간다. 나의 자유시간은 오로지 집,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내 방에 있다. 요즘에는 책을 읽고 문학 공모전에 출품할 글을 완성해야 하기 때문에 글을 많이 쓴다. 운동도 집에서 실내 자전거와 윗몸일으키기로 대체한다. 요즘에는 트레드밀에 자꾸 관심이 간다. 걷기 운동이 제일 좋다는 말에 귀가 팔랑이고 있어서.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읽기 아니면 쓰기다. 학창 시절 국어 수업 때도 이렇게 감상과 글쓰기에 열정적이진 않았는데.


문학 공모전을 위해 준비하는 소설이나 브런치에 종종 올리는 시 말고도 쓰는 글은 많다. 매일 밤마다 5년 일기장에 간단하게 일기도 써야 하고, 브런치에도 일기를 써서 올리고, ― 이건 거의 대부분 다음 날이나 다다음 날로 넘어가지만 ― 책을 다 읽으면 감상문도 써야 하고, <생각 소스>와 <나에게 보내는 말의 선물>처럼 기록하는 책에도 글을 써야 하고, 요즘에는 간간이 취미로 미술책 스크랩을 하고 있기에 교과서에서 오린 그림을 노트에 붙이고 감상문도 써야 한다. 읽어야 할 글은 차고 넘친다. 소설과 시, 에세이와 산문, 더 나아가면 인문학이나 심리학, 사회와 관련된 책도 있다. 논문 사이트에서 흥미로운 논문을 뒤적거리기도 한다. 논문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지만 언젠가 나도 써야 할 날이 온다면… 많이 읽어두는 게 좋지 않을까.




경험이 많지 않다. 다양한 세상을 돌아보지 못해서 생각하는 폭도 좁고, 시대를 바라보는 시야도 탁 트이지 않았기에 상상력과 판단력에 제약이 걸려 있다. 구태여 돌아다니고 여행하는 것만이 인생 경험은 아니다. 학교에서도 얌전히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하는 재미없는 학생이었다. 중학교 시절 선생님으로부터 며칠 후 강당에서 전교생 조회가 있을 때 무대에서 연설 ― 아마 나에 대한 이야기가 주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설이라는 단어는 조금 거창한가. 전교생 앞에서 하는 발표에 가까웠다. ― 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었는데, 당시 나는 반에서 발표하는 것조차 힘들어했고 전교생 앞에서 딱히 할 만한 이야기도 없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만약 지금 어딘가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온다면, 몹시 두렵고 긴장되고 온갖 불안과 걱정에 잠도 못 이루겠지만 도전은 해볼 것 같다. 부딪히지 않으면 계속 피하게 되니까.


해외여행은 물론 제주도도 안 가봤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호기심을 방출하는 성격도 아니다. 휴일에는 거의 집에만 있다. 여행을 떠나고 싶어도 경제적 상황을 비롯해 이게 문제다 저게 문제다 생각하며 미뤄대기만 한다. 가령 유럽 여행을 가고 싶다고 한다면 당장 수중에 돈도 없고, 유럽은 물가도 비싸고 인종차별도 심하고 소매치기도 많다던데 괜히 갔다가 험한 꼴만 당하고 오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머뭇거리는 식이다. 불안과 걱정은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과 대비책을 철저하게 마련하게 해 준다. 안전을 추구하는 본능에 의한 안전장치 같은 거랄까. 그러나 이러쿵저러쿵 걱정만 하다가 시도조차 못 하고 기회를 허공으로 훨훨 날려버리는 순간은 늘 아쉬웠다. 시간이 지나니 과거의 내가 비겁하게 내세웠던 핑계와 변명을 원망하기도 했다. 아주 제멋대로인 인간이로구나.


나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더 많은 인간 군상을 목격하며 살아온 인생 선배들의 글은 대체로 배울 점이 많다. 독서는 공부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놀랍도록 재미가 없다. 그냥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깨닫는 것들이 있다. 작가 중에서도 나와 맞는 사람이 있고 잘 맞지 않는 사람이 있지만, 독서가 이 책을 쓴 작가와 직접 만나지 않고도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몰랐던 것을 배워가는 행위라고 생각하면 어떤 책이든 읽을 가치가 있다. 하물며 작가를 반면교사로 삼을 수도 있다. 나는 흥미로운 책만 읽는다. 눈에 잘 읽히지 않는 책은 오랫동안 덮인 채 책장에서 뽀얀 먼지와 함께 익어간다. 애석하게도 다독자나 애독자 수준까지는 오르지 못해서 책도 음식처럼 편식한다. 그래도 독서는 아주 좋은 취미다. 읽는 게 좋아서 쓰기도 시작했으니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서서히 읽기 시작한 책과 그 작가들은 나를 여기까지 만들어 준 것이다. 책과 글 또한 지금의 내가 자라는 동안 많은 부분에 일조했다. 언제 사람 노릇하나 싶었던 인간을 간신히 이렇게 키워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키워야 한다. 내가 죽을 때까지 나를 가르치고 혼내고 다그치고 감싸줘야 한다. 미리 잘 부탁드린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동안 계속해서 미래를 생각했다. 책과 글은 과거의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게 했고, 오늘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되짚어보게 했고, 훗날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상상하게 만들었다. 사실 우리나라의 미래는 암울한 쪽이다. 희망찬 내일이 없다.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은 장차 어른이 되어서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힘들고 불행한 인생을 살 거라고 전문가들이 말한다. 사회 질서는 무너지고 경제 기반이 어긋나서 서민들의 삶은 점점 가라앉기만 할 거라고 분석한다. 말만 하고 예측만 하면 뭐 하나. 그걸 바로잡기 위해 나서는 사람이 안 보인다. 그냥 우리는 다 끝났다며 절망에 체념하는 분위기다. 슬프다. 그러나 나 또한 나서지 않기에 비난하지 않는다.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지금 이 사회를 만들어 낸 기성세대와 자기 자식만 아낄 줄 아는 극성스러운 부모들일까.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생각 없이 젊고 어리기만 한 사람들일까. 온갖 범죄로 세상을 악독하게 만드는 존재들일까. 사회를 바로잡을 책임이 있고 그걸 위해 권력을 쥐었지만 정작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정치인일까…. 비난과 비판을 쏟아내기엔 조금 늦은 감이 있다. 비난은 비판이 되어야 하고 비판은 행동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비난하는 사람은 많아도 비판하는 사람은 적고, 비판하는 사람보다 행동하는 사람이 훨씬 적은데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럴 때 똑똑하고 경험도 풍부한 지식인들이 나서준다면 좋으련만. 아는 것도 없고 말도 못하고 겁쟁이인 나는 뒤에서 보면서 박수나 칠 수 있게 말이다. 마치 나라의 미래는 사리에 밝고 총명한 천재와 인재들에게 맡기고, 나는 배가 잘 나아갈 수 있도록 물길이라도 저어주겠다 하는 것처럼.


나라를 바꾸기엔 나는 너무 작은 존재다. 그저 그런 평범한 인간 중 하나일 뿐이나 사회 구성원으로서 아주 작더라도 힘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쓰기로 한 것이다. 열심히 읽고 더 열심히 쓰기로 했다. 나의 미래가 있으려면 내가 사는 나라도 건재하고, 내가 살아가는 사회도 안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식도 어린 동생도 없지만 이제 막 태어난 아이들이 이미 괴로운 지금보다 더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글을 읽으면 막혀 있던 머리가 조금씩 열린다. 내가 줄곧 품어 왔었던 의문점이 풀리기도 하고, 오히려 수수께끼가 남기도 한다. 나보다 영민한 사람들이 남긴 기록은 영민하지 못한 내게 영감을 주고 사라진다. 그 영감을 풀어내는 건 이제 나의 몫이다.


회사에서도 자꾸 글을 생각한다. 일하면서도 내가 새롭게 쓸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무언가를 읽고, 쓰고, 생각하고, 성찰하는 일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하는 일이다. 멀쩡히 살고 있지만 의외로 살아있다는 감각을 자각하는 순간은 몇 없었다. 앞으로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공기가 없으면 단 3분도 살지 못하지만 누구도 너무 당연하게 존재하는 공기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가 살아있다는 것도 나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어서 그걸 떠올리는 순간조차 얼마 없겠지.


미래를 성찰하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 글은 사람으로서의 나보다는 스물두 살 직장인으로서의 내가 쓴 글에 가깝다. 스물두 살 학생이었다면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전개되었을 것이고, 스물두 살 등단작가로서 쓰는 글이었다면 훨씬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글을 다듬었을 것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현재가 아닌 모든 건 그저 가정에 불과하니까.


언젠가는 사람으로서의 내가 쓰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글도 쓰고 싶다. 살아간다는 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여정.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망각한 채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고찰하고 끝내 미약하게나마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표류라고 생각한다. 삶은 항해와 표류 중간에 있다. 육지에 도달하고 나서도 삶이 끝나지 않는 것처럼, 나의 고민과 생각도 긴 시간에 걸쳐 오래오래 이어지고 더욱 넓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뭔가 많이 어지러운 글이 되었다. 글을 쓰겠답시고 열심히 문장을 생각하고 정리하지만, 내용을 자연스럽게 이어서 하나의 결론으로 완성하는 건 지금 내 능력으로는 버거운 일 같다. 전문적으로 글을 배우면 조금이나마 나아질까. 결국 재능이 없는 자는 열정을 불태워 배우기라도 해야 겨우 흉내라도 낼 수 있나 보다.


나 자신을 성찰하는 게 좋다. 나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좋다. 그로 인해 만들어진 현재의 나를 보고, 지금의 내가 만들어갈 먼 훗날의 내 모습이 궁금하다. 적어도 내가 부끄럽다고 생각했던 어른들처럼 변하지는 않았기를 바란다.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건 나의 역사를 비롯해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 여긴다. 인간은 절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니까. 어떻게든 바깥 세계와, 내가 아닌 수많은 타인들과, 거대한 생명체 같은 사회와, 이렇게 다양하고 넓은 세상과 밀접하게 이어진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 이 나라에서 살고 있는 나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만들어가야 좋을까. 그건 앞으로 계속 하루하루 살아내면서 만들어야 할 모습이겠지.


글을 잘 쓰지는 못하지만, 글쓰기는 참 재미있다. 쓰다 보면 즐겁다. 아무도 읽지 않는다고 해도 좋을 테지만, 역시 한 사람이라도 읽어준다면 더 좋다. 이 글은 나와 연결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는 글이다. 대학교 진학은 올해 특성화고졸재직자전형 지원 날짜까지 아주 진지하게 고심할 것이다.




날아가는 새도 자신이 나는 이유는 모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든 삶의 시작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