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야사 Feb 29. 2024

삶은 복잡하지만, 답은 간단할 것이다.

피트 닥터 감독, <소울(Soul)> [애니메이션 영화]


- 제목 : 소울(Soul)

- 감독 : 피트 닥터(Pete Docter)

- 제작사 : 월트 디즈니 픽처스,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영화로 감상문을 쓰는 건 처음이다. 독서는 즐기는 편이지만 영화 감상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좋은 책이 많은 만큼이나 좋은 영화도 셀 수 없을 만큼 방대하다. 취향이 아니라는 이유로 숨겨진 명작과 감명을 지나치기엔 너무나도 아쉽다.


이 글을 쓰는 건 2022년 9월 17일 밤 10시 20분경. 방금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영화를 모두 감상하자마자 바로 브런치에 들어왔으니, 러닝 타임이 길지는 않지만 이 애니메이션 영화가 나에게 상당히 깊은 여운을 남기고 갔다는 사실은 알 수 있을 듯하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 아래 어느 아파트 어느 방에서, 나는 나만의 우주에서 오직 나만이 아는 별빛 사이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조심스럽지만 대담하게. 마음과 감각을 온전히 연 채로 작품을 감상하는 건 역시 힘든 일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제작한 영화 중에서 직접 봤던 영화는 <업(UP)>과 스토리만 어렴풋이 알고 있는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이 전부인데, 볼 때마다 그래픽과 연출 수준이 뛰어나다. 특히 이 영화는 중간중간 조용히 감탄할 정도로 고퀄리티였다. 악기를 섬세하게 연주하는 캐릭터들의 모습과 풍부한 음악들. 작품에 한껏 몰입하게 만드는 감각의 자극이 좋았다. 역시 이 세상 모든 창작가들은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 이 글에는 영화의 전반적인 스토리와 스포일러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 영화를 직접 보고 싶다면 뒤로가기를 클릭하자.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


<소울>의 핵심 주제를 찾으라고 하면 무엇일까. 나도 나름 작품을 구상하고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어떠한 작품이 시작되는 영감의 씨앗은 존재하겠지만 오직 그 새싹만이 뿌리를 내리지는 않는다. 점차 줄기가 자라고 가지와 잎이 무성해지면서 처음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색다른 꽃이 봉오리를 맺거나 불현듯 열매가 펑펑 열리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명백히 알지 못한다. 보는 사람마다 마음에 품어 돌아가는 장면이 무수히 다를 테니.


제작사는 이 영화에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키워드를 붙였다. 시나리오를 제작하면서도 수백 번의 수정과 첨삭, 수천 번의 논의와 토론이 존재했을 것이다. 세상에 의도했던 그대로 순탄하게 태어나는 작품이 얼마나 있을까.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 않을까. 설마 나만의 생각은 아니겠지? 그냥 그렇다고 믿고 넘어가겠다.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 이 구절만 보면 좀처럼 내용을 예측하기 어렵다.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대략 80억 명이라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적어도 80억 가지는 된다는 소리가 아닌가. 휘황찬란한 고층 빌딩에서 일하는 누군가는 죽을 때까지 다 쓰지 못할 돈, 그 옆방에서 사는 사람은 강한 권력과 그로 인한 명예, 그 건물의 뒤쪽 고시 학원생은 안정적으로 다닐 수 있는 직장, 그 사람의 친구는 가족의 존재와 화목한 가정, 그와 같은 건물에서 사는 작가는 글을 쓸 수 있는 매 순간. 도대체 무엇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만들 것인가? 교훈과 의미를 생각한다면 적어도 물질만능주의 따위의 시시한 존재는 아닐 텐데 말이다.


이 영화는 과연 무엇으로 답을 내렸을까. 이 역시도 사람마다 판단과 생각은 무궁무진하겠지만, 나는 영화가 끝나면서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살아가는 순간 그 자체'라는 모호한 답을 내렸다. 당연히 정답은 아니다. 언젠가 내가 내린 답이 정반대로 바뀔 수도 있다. 원래 작품을 감상이라는 마음에 정확하고 올바른 답은 존재할 수 없는 허상이니까.




먼저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중학교 밴드부에서 시간제 음악 교사로 일하는 무명 재즈 피아니스트 '조 가드너'는 옛 제자이자 드러머인 '컬리'를 통해, 유명 재즈 뮤지션이자 색소폰 연주가인 '도로테아 윌리엄스'의 밴드 피아니스트가 될 기회를 얻는다.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무대에 드디어 오를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에 가득 부풀어 거리를 신나게 배회하던 조는 너무 흥분했던 나머지 발밑을 보지 못하고 맨홀 구멍에 빠진다. 그렇게 혼수상태가 되어버린 조의 하늘빛 영혼은 머나먼 저 세상으로 향하는 우주로 날아간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도망치던 조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영혼들이 지구에서 태어나기 위해 교육을 받는 '유 세미나'라는 공간에 떨어진다. 머나먼 저 세상으로 가지 않기 위해 조는 어린 영혼이 태어날 수 있는 마지막 조건인 삶의 불꽃을 찾아주는 멘토인 척하며 이름표를 붙인다. 원래 그 멘토는 저명한 아동 심리학자였던 '뵨 T. 보겐슨' 박사였지만, 우연히 그의 이름표를 붙인 조는 보겐슨 박사로서 이끌어야 할 영혼을 만난다. 그 영혼이 바로 '22'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영혼이라지만 존재한 세월만 수천 년에 다다르는 유 세미나의 골칫덩이. 22는 지금껏 수많은 위인과 멘토가 자신을 거쳐갔지만 소용없었고, 자신은 전혀 태어날 생각이 없다며 첫 만남부터 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이대로 가면 다시 살아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조는 22에게 제안을 한다. 22가 삶의 불꽃을 찾으면 나타나는 지구 통행권으로 자신은 지구로 향하고, 22는 유 세미나에 그대로 남으면 된다는 것. 22 또한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두 영혼이 아무리 노력해도 22의 삶의 불꽃은 좀처럼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결국 조와 22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길 잃은 영혼을 구조하고 돕는 신비주의 클럽의 일원이자 선장인 '문윈드'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데, 영혼이 다시 지구로 돌아가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조의 영혼이 코마 상태의 조 앞에 있었던 고양이 '미스터 미튼스'의 몸에 들어가고, 정작 조의 몸에는 그와 함께 떨어진 22의 영혼이 들어가 버린 것. 사람의 몸을 처음으로 느끼는 22는 걷기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이리저리 휘청이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저분한 환자복을 입고 피자를 먹는 조 ― 의 몸에 들어간 22 ― 를 도로테아가 눈앞에서 목격하고 충격을 받으면서 조는 꿈의 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한다.


결국 고양이의 몸에 들어간 조는 자신의 몸에 들어간 22에게 샤워, 정장 입기, 이발 등의 지시를 쉴 새 없이 내리며 어떻게든 다시 도로테아의 무대로 향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겨우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지구에 있는 문윈드를 만나 영혼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문턱까지 다다르는데, 여기에서 조에게 다시 문제가 덮친다. 조의 몸으로 맛있는 피자를 먹고, 거리를 활보하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하늘을 보고, 바람을 맞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단풍나무 씨앗을 보며 삶을 원하게 된 22가 자신은 이곳에서 마지막 불꽃을 찾아 태어나야 한다며 도망친 것이다.


조는 당황하여 22를 뒤쫓지만 22는 쉽게 잡히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와 22는 머나먼 저 세상으로 떠나는 모든 인원을 확인하다가 빈자리가 있는 걸 알아챈 소울 카운터 '테리'에 의해 다시 영혼이 빠져나와 유 세미나로 향하는데, 돌아온 22의 몸에 지구 통행증이 붙어 있는 걸 보게 된다. 그것을 본 조는 22가 지구에 가서 음악을 사랑하게 된 것과 삶의 불꽃을 찾은 일은 모두 자신의 몸에 들어간 덕분이라며 22와 말다툼을 한다. 화가 난 22가 던지고 떠난 지구 통행증을 가지고 본래 몸으로 돌아온 조는 무사히 도로테아의 밴드에 들어가 정식으로 밴드 일원이 되지만, 어째서인지 그동안 간절히 기다린 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회의감을 느낀다.


상실감을 안은 채 돌아온 조는 피아노를 연주하면서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그때 주머니에서 22가 자신의 몸에 들어왔을 때 모은 실타래, 사탕, 단풍나무 씨앗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피아노 앞에 가지런히 놓은 채 다시 연주를 시작한다. 그리고 조는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이 삶의 유일한 이유이자 목적이라고 여기고 살았던 재즈 음악이 아니라, 자신이 겪으며 자라온 모든 순간과 하루하루가 모여 이루어진 일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피아노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문윈드를 찾아 다시 유 세미나로 날아간 조의 영혼은 길을 잃고 어둠에 잠식된 22의 영혼에게 지구 통행권을 돌려주고, 그렇게 지구에서 태어나기 위해 떠난 22와 이별을 맞이한다. 조의 영혼도 원래라면 머나먼 저 세상으로 떠나야 했지만, 소울 카운슬러 중 하나인 '제리'가 "우리는 영혼들에게 영감을 주는 역할이지만 정작 우리가 영감을 얻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가드너 당신이 그것을 해냈다."라고 말하며 조에게 다시 한번 살아갈 기회를 준다. 그렇게 조의 영혼도 다시 지구에 있는 몸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돌아온 조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는 장면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책이 아닌 영화다 보니 줄거리도 웬만한 소설에 비해 분량이 훨씬 길다. 짧게 단축하자면 이 영화는 '죽음의 문턱에 선 조와 태어나지 않은 22가 자신만의 삶을 찾기 위한 여정'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삶의 의미, 삶의 자격, 삶의 목적


태어나지 않은 영혼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삶의 불꽃'을 찾아 지구 통행권을 완성해야 한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삶의 불꽃이 아니다. 소울 카운슬러 제리는 22가 어떻게 불꽃을 찾은 거냐는 조의 질문에 웃으며 태어날 수 있는 마지막 조건은 영감이나 삶의 불꽃 따위가 아니라고 말한다. 삶의 불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 그저 '태어날 자격을 갖춘 영혼에게 부여되는 마지막 증표'였다. 삶의 불꽃을 얻는 영혼이 세상에 태어나는 게 아니라,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갈 영혼이 되는 순간 지구 통행권이 생겨나는 것이다. 절대 태어나고 싶지 않으며 수천 년을 버틴 22가 조의 끈질긴 노력에도 유 세미나에서 지구 통행권을 완성하지 못한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영혼을 억지로 태어나게 할 수는 없으니까.


영혼을 되찾은 조가 도로테아를 찾아가 "음악은 나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고 운명이니 나를 쓰지 않는 것을 후회할 것"이라고 말하자, 도로테아는 마치 조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이 팔짱을 끼고는 "재즈 연주자답게 거만하다"라고 대꾸한다. 밴드의 정식 일원이 되었는데도 상상하던 기분과는 다르다는 조의 말을 들은 도로테아는 짧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준다.


어린 물고기 이야기가 늙은 물고기에게 헤엄쳐 가서 물었어.
"바다를 찾고 있는데요."
"바다?" 늙은 물고기가 말했지. "네가 있는 여기가 바다야."
어린 물고기가 말했지. "여기? 여기는 그냥 물인데. 내가 원하는 건 바다예요."

- 도로테아 윌리엄스의 대사 中 -


행복을 준다는 파랑새를 찾아 떠났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파랑새는 새장 안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영화가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 또한 파랑새 이야기가 담고 있는 의미와 비슷하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하기에 자신의 목표, 꿈, 행복을 위한 길을 찾아 떠나지만, 게임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것처럼 1단계, 2단계, 3단계 성공 후 '드디어 행복해졌다!'라는 결말에 도달하는 인생이 과연 얼마나 존재할까. 힘겨운 하루하루를 살아가다가 자연스럽게 안온한 일상을 만들어가는 인생이 우리와 훨씬 가까운 길이지 않을까. 조처럼 꿈을 이루었지만 되려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순간도 있고, 그토록 바랐던 꿈을 이루었지만 목표가 사라진 이후에 허탈한 상실감에 빠질 수도 있다. 자신이 일궈낸 성과와 일상에 만족하며 살 수도 있을 것이고, 이상과 다른 현실에 좌절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


삶은 그러데이션이라고 했다. 갑자기 어느 기점에 전환점을 찍고 정반대로 바뀌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밝아지고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면서 모습과 색깔을 찾는 거라고.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면 몇 년 전의 나보다 조금 더 발전했다는 걸 깨닫는다. 그럭저럭 살아지듯 살고 있는 현실에 적당히 안주하기도, 별안간 새로운 도전을 위해 먼 여정을 떠나기도 한다. 삶은 방향도 속도도 알 수 없는 기이한 흐름의 연속이기에 내일을 기대하며 살 수 있다.




누구에게나 삶은 온전한 자신의 소유이다. 천근의 생명은 지극히 고요하게 살고 있다.


그래서 삶의 의미와 자격과 목적을 들먹이기엔 너무 거창하다. 내가 느끼기에 탄생을 통해 가지게 된 '삶'은 아주 거대한 목표나 가치를 둔 채로 굴러가지 않는다. 나를 둘러싼 세상의 모든 무수한 환경이 나를 키워낸 것처럼, 일상은 아주 많은 것들이 균형을 이루며 유지된다. 스쳐가는 짧은 하루와 옅은 관계 속에서 느끼는 작은 기쁨과 보람이 모여서 버거운 생을 버티도록 만드는 원동력으로 순환하는 게 아닐까. 누군가는 그 과정 자체를 인생이자 삶이자 행복이라고 말하는 걸지도 모른다.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는 압박은 오히려 숨을 먹먹하게 만든다. 목표와 성취라는 단어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도 그렇다. 솔직히 나는 '산다'라는 동사 앞에 '열심히'나 '최선' 따위의 수식어를 함부로 붙이지 않는다. 누군가 나에게 행복하냐 묻는다면, 행복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내게는 비록 월세라도 보금자리가 되어주는 집이 있고, 가족과 친구가 있고, 직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퇴근하면 누워서 편히 쉴 수 있는 방이 있고, 책과 글과 음악과 노래가 있다. 하늘과 구름과 나무와 땅이 존재하는 하루하루. 자의 없는 탄생이었지만 어찌어찌 생명을 받아서 지금까지 산 것만으로도 나름대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태어난 것과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일 자체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더라도.


"내 불꽃은 하늘 보기나 걷기일지도 몰라. 나 잘 걷잖아!"
"그건 목적이 아니야, 22. 그건 그냥 사는 거지."

- 22와 조 가드너의 대화 中 -


나에게 이렇다 할 삶의 의미, 삶의 자격, 삶의 목적은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하고 싶은 일은 찾는다. 이런저런 꿈도 많고 한평생 연탄처럼 뜨겁게 타오르고 싶다는 소망도 있다. 사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냥 사는 것 자체가 아주 어려운 일이라는 것. 그저 평소에는 떠올릴 틈조차 없었을 뿐이다.


조는 자신이 살 자격이 없다며 두려워하는 22에게 말한다. 너는 불꽃을 찾았어. 불꽃은 목적이 아니야. 인생을 살 준비가 되면 마지막 칸은 채워져. 게다가 너는 재즈를 정말 잘해. 한 번의 인생을 살면서 그 소중함을 깨달은 조는 지구 통행권을 22에게 양보한다. 이제는 네가 살아볼 차례라면서.


음악을 향한 사랑만이 자신의 전부라고 여겼던 조는 22에게 너는 불꽃을 찾지 못할 거라는 말로 상처 준 일을 사과한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22에게 삶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22가 지구로 떨어지면서 손을 놓고 헤어지는 장면은 참 가슴이 먹먹해진다. 22는 지구에서 태어나 어떤 사람이 될까? 음악을 잘하고, 하늘을 좋아하고, 걷기를 사랑하며 세상을 즐기는 사람으로 자랄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만둔다고 말하려고 왔어요. 밴드부는 멍청한 시간 낭비예요. 재즈는 쓸데없어요."
(…)
"너 음악을 사랑하는구나."
"맞아요. 계속하는 게 낫겠죠?"

- 조 가드너의 몸에 들어간 22와 학교 밴드부 트롬본 연주자 '코니'의 대화 中 -
"나는 갇힌 건 아니지만 이발사가 될 생각은 없었어."
"이발사가 운명 아니었어?"
"수의사가 되고 싶었지."
"그런데 왜 안 했어?"
"해군 제대하고 하려고 했는데 딸이 아팠고, 미용 학교 학비가 수의 학교보다 쌌거든."
"안됐네. 꼼짝없이 이발사로 불행하게 살아야 한다니."
"오, 넘겨짚지 마, 조! 나는 행복하니까. 모두가 역사에 남을 위인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 조 가드너의 몸에 들어간 22와 이발사 친구 '데즈'의 대화 中 -
"두려워요. 만약 오늘 죽는다면, 무의미한 인생일까 봐."

- 조 가드너가 어머니 '리바 가드너'에게 한 말 中 -


의미도 자격도 목적도, 어떤 기관이나 높으신 분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롭다. 언제든 가질 수 있고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니까. 그것이 지루하고 비루한 삶에서 나름의 감칠맛이 아닌가 싶다. 아무도 모르는 것을 나만이 알아가고 찾아가고 시도하며 산다는 것. 특별할 것 없는 생이지만, 내게는 하나뿐인 소중함이기에. 그걸 생각하게 해 준 이 영화는 무척 따뜻했다.


삶은 복잡하지만 답은 간단할 것이다. 그곳에서는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두렵지만 알고 싶다.




* 이 글은 본래 <별세계 감상문>이라는 매거진에 발행했던 글이다. 매거진을 삭제하고 독서록과 감상문을 엮은 새로운 브런치북을 연재하자는 계획을 세웠고, 책이 아닌 영화 감상문인 이 글은 내용을 조금 수정하여 새로운 매거진으로 옮겨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물두 살 직장인 : 미래 성찰 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