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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Mar 02. 2024

돈과 노동의 관계

돈을 받았으니 노동을 하나, 노동한 대가로 돈을 받나


쓰고 보니 거창한 제목이다. 지금은 돈과 노동의 관계를 명확하게 정의하거나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 돈과 노동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많은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경제와 사회가 오늘날까지 발전한 과정과 그 사유가 어떤지 상세하게 알아야 한다. 지금 나에게는 그런 깊은 지식이 전무하기에 이 글은 전문가의 논리적인 분석 따위가 아니다. 그저 미흡한 생각 또는 얄팍한 사상에 의거하여 중언부언할 수밖에 없는, 그렇게라도 해야 겨우 머릿속에 엉망진창으로 돌아다니는 생각의 가지 중 하나를 간신히 글로 몇 문장 남길 수 있는, 무지함에 구속된 어린 사회인임을 자각한 상태로 이 글을 쓴다.


고용주에게 돈을 받고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로서 종종 느낀다. 그와 동시에 재화를 대가로 서비스를 누리는 시민으로서도 느낀다. 바로 '노동하는 사람의 존재는 정말 귀하다'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착각을 한다. 가장 흔하게 하는 착각이다. 고용주가 노동자보다 무조건 갑이라는 착각. 다만 이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한 흐름이다. 고용주 A가 고용자 B를 직원으로 채용한 상황에서 A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B보다 우위로 생각한다. 임금 지불을 대가로 인력을 고용한 사람은 A니까. 반대로 노동자 B 역시 비슷하게 생각한다. 자꾸 귀찮게 이것저것 명령하는 A가 짜증 날 때도 많지만 불만은 마음속으로 품기만 한다. 자칫하면 고용주인 A가 자신을 해고시킬 수도 있으니, B는 직장과 수입을 지키기 위해 자연스럽게 A의 아랫사람이 된다.


자본과 재력을 가진 자가 선순위가 되는 사회에서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법으로 정해지지 않아도 그런 흐름이 된다. 돈이 없으면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유지 불가능한 세상이기에 당연히 돈을 가진 사람이 윗사람이 되고, 그 사실을 인정받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은 넘치는 과시욕을 주체하지 못해 갑질하는 개진상이 되기도 한다. 시대는 발전한다는데 한국의 모든 직장에 고질병처럼 존재하는 위계질서는 어째서 아직도 멀쩡히 살아 있는가. 상사는 나보다 직급이 높고, 나에게 무언가를 명령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들의 기분에 따라 회사에서 보내는 나의 하루가 결정되고, 그들이 나를 얼마나 신임하느냐에 따라 나의 직장생활이 달라진다.


솔직히 상사들이 나보다 돈을 얼마나 많이 받는지는 궁금하지도 않고 내 알 바도 아니다. 혹시 부장님이나 이사님이 갑자기 보너스를 주진 않을까 기대하며 직장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어쨌든 부하 직원은 상사 말을 따른다. 장유유서, 직장예절, 저 인간 또 지랄하기 전에 그냥 비위나 맞춰주자 등등 다양한 이유가 있는데, 그중 하나로는 상사가 나보다 고용주와 더 가깝다는 점이 있다. 내게 월급을 주는 회사 대표는 나보다 상사와 더 친하기에 상사에게 밉보이면 대표에게도 덩달아 미운털이 박힐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그렇다고 대표가 내 월급을 절반 깎아서 준다거나 내게만 상여금을 주지 않는 구차하고 쪼잔한 짓을 하지는 않는다. ― 물론 개인적으로 따돌리거나 차별을 할 수는 있겠지만, 만약 그런 대표가 있다면 그의 정신은 대략 유치원생 수준이다. 유치원생이 운영하는 직장을 다닐 수는 없다. 하루라도 빨리 도망치자. ― 그럼에도 '돈을 가진 자'의 힘이란 실로 무섭다. 직원에게 돈을 주는 고용주는 단순히 직원 계좌에 돈을 채워주는 것뿐만 아니라 직원의 일상, 더 나아가 직장인으로서의 삶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회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대표 혹은 사장이나 회장. 그들은 회사에 다니는 모든 구성원 중에서 높은 확률로 가장 돈이 많고, 허수아비가 아닌 이상 모든 직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요즘 세상에서는 대표가 직원을 마음대로 해고하거나 직장 내 괴롭힘을 일삼았다간 노동법에 의해 처벌을 받겠지만 근로기준법과 노동자보호법이 나를 지켜주니까 괜찮다며 마음 편하게 직장 다니는 사람은 적어도 대한민국 안에는 없다는 게 나의 정설이다.




고용주와 노동자, 돈과 노동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분명 회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대표지만, 직원에게 돈을 넣어주는 사람은 대표가 아니다. 작은 회사라면 몰라도 어느 정도 규모와 체계를 갖춘 회사라면 경리직원이 따로 있는 게 보통이다. 그리고 내 통장에 월급을 넣어주는 실질적인 사람은 경리직원이다. 그들은 나와 똑같이 회사 대표로부터 채용되어 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 그리고 그 노동자가 없으면 내 통장에는 월급이 들어오지 않는다.


어라, 이렇게까지 생각하니 더 이상해졌다. 회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대표지만 회사의 모든 돈을 대표가 벌어오는 건 아니다. 직원들이 열심히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키보드 자판과 계산기를 두드리고, 거래처와 연락하고, 이런저런 클레임을 해결하고, 각종 보조 업무를 처리하면서 일한 대가다. 당연히 내가 한 일과 내가 맡은 역할도 회사의 이익에 지분을 차지했다. 그런데 어째서 생색은 모두 고용주인 대표만 내고 있는가. 분명 나도 일을 했는데. 비록 하루아침에 사라져도 금방 다시 새로운 인력으로 대체될 소모품이라지만, 어쨌든 지금 이 순간에는 내가 이 자리에서 일하면서 회사를 돌아가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나 또한 돈을 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고용주는 노동자에게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지급한다는 이유로 노동자의 우위에 서는가! 그것이 나의 의문이다.


감정이 조금 격해진 다. 악덕 사장이 아닌 이상 고용주의 존재를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쨌든 회사나 직장이 존재해야 노동자도 일을 하면서 경제 활동을 이어갈 있고, 그 회사나 직장을 책임지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바로 대표자, 즉 고용주니까. 고용주는 직원을 채용하여 월급을 제공한다는 것 이외에도 경제 활동이 가능한 사업체를 창출했다는 공헌으로 노동자를 지휘하고 통치할 자격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게 완전한 수직 관계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일반화로 이어지면 조금 문제가 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에서 조금 벗어나, 돈과 노동의 관계를 한 번 생각해 보려 한다.


나는 돈과 노동력 두 가지만 놓고 따지면 어느 것도 우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돈보다 중요한 요소가 바로 일하는 사람의 존재와 그 사람의 능력이라고 여긴다. 일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자체로 어디서든 빛을 발하지만, 돈과 재화는 분명 쓸모가 없어지는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로 화폐 가치가 크게 폭락한 디스토피아적 사회를 상상했다. ― 비현실적인 일도 아니다. 실제로 남아메리카 북부에 있는 나라 베네수엘라는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부정부패로 인해 경제 체제가 붕괴하고 국가 시스템이 마비된 수준인데, 2020년에 EBS에서 베네수엘라 관련 다큐멘터리를 찍은 영상을 보면 2018년 8월 기준으로 휴지 하나가 한화로 약 9,600만 원이다. 말 그대로 두루마리 휴지 한 롤이 거의 1억을 호가할 정도로 화폐 가치가 어마어마하게 하락했다. ― 돈이 가치가 없어진 한국. 지폐는 돈이 아니라 종이쪼가리가 되었고, 이미 고위 정치인과 재벌 일가와 기업인은 모두 한국을 떠나 버린 지 오래다. 그런 세상에서 나에게 월급을 주는 대표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가 나에게 주는 월급은 당장 오늘 점심조차 사 먹을 수 없는 푼돈인데. 우리에게는 절대 오지 않을 미래라며 태연하게 웃을 상황이 아니다. 요즘에는 정말 진지하게,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뉴스를 보고 있으면 이러다가 정말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국이 하루아침에 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그 수많은 직원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다. 대기업은 항상 지원자가 넘쳐나니 지금 당장은 걱정할 필요 없지만 우리 주변에 흔하디 흔한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을 보자. 당장 내가 다니는 회사만 해도 그렇다. 인력을 구하지 못하면 남은 직원들이 감당해야 할 업무량은 과도하게 늘어나고 능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거래처의 클레임이 넘쳐나고, 회사는 줄어든 직원에 맞춰 서서히 일을 줄여나가야 하고, 종국에는 적자를 메우지 못해 폭삭 망해버릴 것이다.


노동자는 존재 자체가 자원이고 재산이다. 노동자는 회사나 직장을 넘어서 경제 사회, 그리고 한 국가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일부분이다. 일개 직원이라느니 월급쟁이라느니 모욕적인 말을 들으며 무시당할 입장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돈은 수단에 불과하다. 돈에 눈이 먼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돈에 사람이 지배당하고 도리어 노동자가 무시당하는 이상한 세상으로 흘러가고 있긴 하지만, 사실 노동자는 모두가 안다. 어딘가에서 노동을 한다는 건 정말 어렵고, 그렇기에 대단한 일이라는 걸.


어설픈 자기 위안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노동력과 노동권을 지닌 노동자가 그들을 관리하는 간부나 고용주보다 중요한 존재라는 건 부정하지 못하겠다. 물론 간부와 고용주 또한 넓게 보면 노동자에 속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들은 일반 노동자와 다른 대우와 임금을 받으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으니 여기에서는 조금 분리하도록 하겠다.


사람들은 너무 슬픈 착각을 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사람은 쓸모없고 무가치하다고 여긴다. 인력은 언제든지 구할 수 있으며 공장 부품처럼 마음대로 갈아 끼울 수 있다고 착각한다. ― 심지어 공장에서는 노동자보다 부품과 기계가 훨씬 중요하다. 냉기에 예민한 기계장치를 위해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틀지 못하는 현장만 해도 드물지 않다. ― 고용주는 돈을 주니까 당연히 우위라고 생각하고, 노동자는 돈을 받고 일하니까 당연히 고용주에게 굽신거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만든 건 사람이고 사람을 만든 건 세상이다. 과연 나는 어떤 대상을 먼저 비난해야 할까.





비단 고용주와 노동자만의 문제인가


며칠 전 읽었던 <자음과모음 2023 겨울 59호>에는 흥미로운 칼럼이 있었다. 사회학자 겸 작가인 오찬호 박사가 쓴 글이었는데, 이 글의 마지막 장 첫 번째 문단은 능력주의에 기반한 차별과 혐오를 말하고 있다.


능력주의에 기반한 차별과 혐오는 '불안한 세상에서 안전하게 살려는' 이들의 적극적 행위다.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는 험한 꼴 당하기 싫어서 '명문대 진학'이 목표가 되는 개인이 많아진다. 모든 시간이 오직 입시에 '유리한' 능력을 향상하는 데에만 집중되면, '능력은 개인 노력의 결과이기 때문에 이에 따른 차별은 차별이 아니'라는 논리가 형성된다. 그래서 불평등을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지 않는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는 정책들이 좌초된 이유다. "내가 어떻게 공부했는데!" 이 원초적인 항의가 너무 강해서다.

<자음과모음 2023 겨울 59호> - 오찬호 著, [불안을 피했는데, 더 불안해지다]의 '안전한 길에 이르는 게 이토록 전투적이라면' 中


능력주의와 자본주의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는 게 없으니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사전적 의미를 찾았을 때 자본주의는 '개인이 자유롭게 재산을 소유하고 매매하고 양도할 수 있는 권리가 기본적으로 보장되는 사회 구성체'를 뜻하고,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 주어지고 그에 따라 대우하는 정치 철학'을 뜻한다. 그러니까 재산 많은 부모님을 두지 않은 이상 스스로 공부하고 실력과 경험을 쌓아서 좋은 직장, 좋은 직업을 가져야만 비로소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개인의 삶을 오로지 자기 자신이 감당하고 책임져야 하는 구조니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건 잘못이 아니지만 가난하게 죽는 건 잘못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나는 '노동'이라는 행위 자체에도 이미 차등 구조가 만들어져 있다는 게 안타깝다. 같은 노동자라도 회사에서 일하는 사무직원과 그 회사 건물을 청소하는 용역업체 직원을 같은 급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환경미화원이 중년 여성이라면 가타부타 없이 '청소 아줌마'라고 칭하는 경우도 흔하다. 같은 회사원이라도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사람과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는 사람을 같은 급으로 여기지 않는다. 당연히 일용직이나 비정규직보다 정규직이 우위고, 중소기업 직원보다 대기업 직원이 훨씬 우수한 인재라고 생각한다. 신분제는 오래전에 폐지되었지만 사회적 신분제도는 여전히 명백하게 남아 있다는 걸 모두가 체감하며 살아간다.


이 글을 읽고 한 가지 가정을 했다. 만약 어느 대기업에서 갑자기 회사 대표가 "일개 직원들이 어째서 임원과 같은 입구를 쓰는가? 내일부터 상무 미만 직원은 알아서 정문을 피해 들어오게."라는 폭탄발언을 내뱉는다면 모두가 열불을 낼 것이다. 하지만 그 부당한 일을 향한 분노와 억울함이 새로운 반향이나 혁명 따위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직급에 '장(長)'이 붙은 사람은 뒷문으로, 나머지 대리와 정규직 사원은 창문으로, 나머지 비정규직은 개구멍으로 들어오자며 자기들끼리 결론을 내리지 않을까. 물론 직급에 '장'이 없는 직원과 비정규직의 의견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채로 말이다.


돈과 노동의 관계는 몇 마디 글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기이하다. 만약 월급으로 6개월짜리 고졸 계약직이 150만 원, 대졸 정규직이 200만 원을 받는다고 친다면 무조건 대졸 직장인이 더 힘들고 바쁜 일을 떠안고 있을까? 두 사람이 같은 고졸 계약직이나 대졸 정규직이었다면 불합리한 일이겠지만, 여기서는 월급의 수준이 다른 만큼 두 사람의 최종 학력과 고용 형태 또한 엄연히 다르기에 누구도 의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계약직 사원이 정규직 사원보다 여유롭다면 그걸 항의하는 사람도 나올 수 있다. 귀찮은 잡일을 처리하려고 계약직으로 직원을 구한 거 아니냐며,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일 없이 놀고만 있냐면서.


만약 고졸 계약직이 대졸 정규직보다 훨씬 많은 업무를 처리하고 더 오래 일하는 대가로 월급이 높아진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그 사무실의 광경을 구태여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어떻게 학창 시절 내내 입시에만 매달려 명문 대학교에 진학하고 이 회사까지 들어온 내가, 대학교도 나오지 않은 저 비정규직보다 적은 돈을 받으면서 일해야 하는가!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계약직은 그냥 일 많은 대신 돈도 많이 준다길래 직장에 들어왔을 뿐인데 영문도 모른 채 직원들의 질타와 가시 돋친 시선을 받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존재의 우위와 열위


돈과 노동은 존재만으로도 이미 '갑'과 '을', '우위'와 '열위'를 만들어낸다. 조금은 극단적이고 편파적인 예시를 들긴 했지만. 사업체를 운영하는 고용주나 힘들게 공부하고 노력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간 대졸 정규직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하물며 요즘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교 들어가 우수한 성적과 탄탄한 스펙을 쌓아 졸업한다 해도, 대기업이나 공기업처럼 콧대 높은 회사는 서류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취업 준비생이 수두룩하니까.


잘 살고 싶어서 노력한 이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어른들이 나중에 행복하게 살려면 공부 열심히 하고 대학 잘 가면 된다고 해서 그걸 실천했을 뿐이다. 의사나 법조인이 되어서 돈 많이 벌거나, 공무원이 되어서 안정적인 노후를 만들거나, 크고 탄탄한 회사에 들어가 정년까지 잘 버티면 된다고 해서 그 목표를 위해 몇 년 동안 많은 것을 포기하며 달려왔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학문을 배우려고 들어간 학교는 그저 네임 밸류 스펙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의사나 법조인이 된다고 해도 무조건 돈 잘 벌고 행복해진다는 거품은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공무원을 한다고 해도 나중에는 국민연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할 지경이고, 크고 탄탄한 회사는 문턱조차 넘기 힘든 데다가 겨우 합격할지언정 평생직장으로 삼을 정도로 만족스러울 거라는 보장이 없다.


어떤 선택을 하든 불안정한 미래가 불안해서 그나마 남들이 가장 많이 가는, 그나마 가장 조건이 좋은 길을 달렸을 뿐인데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와 대우'를 원하는 게 어떻게 죄가 되겠는가. 그 정당한 대가와 대우를 자신의 노력에만 대입하려는 오만한 태도와 자기만의 기준을 만들어 타인을 무시하는 마음은 죄가 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자본주의는 한국에만 있는 경제 체제도 아니고, 비슷한 부류끼리 집단으로 뭉쳐 특정 대상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일은 인간이 존재한다면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 기준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우리나라 최고 명문 대학인 서울대학교도 영국의 '타임스 고등 교육(Times Higher Education)'에서 매긴 전 세계 대학교 순위에서는 무려 62위다. 부동의 1위가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교이고 상위권 학교 대부분이 영국과 미국에 위치한 대학교인 것을 보면 아무래도 완벽한 신빙성은 조금 떨어질 수 있지만, 공부 못하는 내가 보기엔 둘 다 평생 입학할 수 없는 학교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처럼 세상은 끊임없이 계급과 잣대를 만들어낸다. 나는 이러니까 너보다 잘났고 너는 나보다 못하다는 걸 어떻게든 증명하고 싶어 한다.


돈과 노동. 두 요소의 관계는 풀어내기가 참 난해하고 까다롭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둘 중 무엇도 우위나 열위가 될 수 없고, 만약 반드시 우열을 나누어야 한다면 '노동'이 '돈'보다 우선순위가 되는 세상이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도대체 세상을 어떻게 바꿔야 한단 말인가. 러시아의 작가이자 개혁자인 '레프 톨스토이'가 한 말처럼, "모두가 세상을 바꾸려고 생각하지만, 정작 자신을 바꾸려고 하는 이는 없다"라는 말은 나에게도 적용된다. 인간의 내면에 잔존하는 회피 의식과 허약한 발전성을 제대로 파고드는 말이라 읽는 순간 뜨끔했던 기억이 있다.


나에게는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다. 그러니 그 세상에 속한 나 자신의 모습부터 바꿔야 한다. 내가 무의식중, 혹은 은연중에 특정 대상이나 집단을 차별하고 경시한다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비로소 조금씩 깨닫고 있다. 차별하거나 업신여길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결국 나의 언행이나 생각은 그렇게밖에 내비칠 수 없는 것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분노를 돋우는 말과 행동은 의도가 어찌 되었든 분명 잘못된 행위다. 하지만 지금까지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워 인정하지 않거나 회피한 적이 많다. 생각할수록 수치스럽기만 하다. 취업을 준비했을 때나 회사에 들어와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안 그런 척 오만하고 교만한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므로 나는 '노동을 하는 노동자'로서, 그리고 '노동자에게 노동의 대상이 되는 소비자'로서 줄곧 기억해야 한다. 나는 생활 유지 수단인 돈을 벌고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지, 자본을 가진 회사와 대표를 위해 노동하는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나는 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구매하거나 서비스를 이용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지, 돈을 특권처럼 이용하며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설 수 없다는 것. 물론 지불한 대가에 비해 물건이나 서비스가 형편없다면 그에 대해 항의하고 적절한 보상을 받을 소비자의 권익은 가지고 있지만, 그게 다른 노동자보다 윗사람이 되어 강압적으로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런 착각을 가지고 살아왔다. 게다가 지금도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같은 노동자만이 아니라 소비자인 동시에 노동자이기도 한 자신조차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다. 나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를 유지하는 게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더불어 이런 세상을 장차 어른이 되어 살아갈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게, 진정 어른으로서 최선을 다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세상을 바꾸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이미 몇 번이나 경험했고 직접 목도한 적도 있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변화하는 세상을 살아왔다. 노력이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잔인한 현실은 알고 있지만, 모두가 낙담하고 손을 놓는다면 바뀌는 건 정말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돈과 노동의 관계를 뭐라고 말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이런 장황한 글이 되었다. 어쨌든 내가 생각하는 돈과 노동의 관계는, '어떤 것도 우위가 되어서는 안 되는 관계'이다. 노동력과 노동권이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게 되는 건 반갑고 좋은 일이지만 그 또한 지나치면 곤란하다. 모든 존재는 적절하게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갑자기 최저임금을 5만 원으로 올리겠다는 정치인이 나타난다면 그는 돈과 노동을 모두 모욕하는 것이다. 그건 포퓰리즘 정치를 넘어서 대한민국 경제 본격적으로 붕괴시키기 대작전 초입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돈을 벌고, 일을 한다. 돈과 생업 중에서 소중하지 않은 건 없다. 아직 세상은 노동자보다 돈이 훨씬 중요하고, 사람보다 재산이 우위로 여겨진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수백 년 동안 이어진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제는 세상이 변해야 한다. 내가 어른이 되어가는 동안 조금이라도 분명한 변화가 존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물론 그전에 나를 지금보다 덜 편파적이고 덜 무지한 사람으로 바꾸는 게 우선이겠지만.


이 글의 카테고리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사회 평론가의 글을 어설프게 따라한 꼬질꼬질한 수필이지만, 내가 직장에서 일하고 사회생활을 하기에 쓸 수 있는 글이기도 하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직장을 다니며 노동을 대가로 임금을 받을 것이다. 꼭 회사원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갈 테니,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문제점을 한 번 정도는 꺼내어 다뤄보고 싶었다. 내 생각이 무조건 정답인 양 표현한 부분도 있으나 당연히 내 생각은 정답이 아니고, 결코 정답이 될 수도 없다. 아무튼 이 글은 직장인이자 사회인으로서의 내가 발행하는 글이므로 매거진도 같은 곳으로 결정했다.


한국의 노동자가 모두 행복해질 수는 없지만, 모두가 조금이나마 덜 불행하고 덜 힘겨운 세상을 살아갔으면 하는 마음은 진심이고 또한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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