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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Jun 08. 2024

후회와 죗값

나의 죄는 내가 죽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2021년 6월 9일 수요일, 네이버 블로그에 쓴 글을 읽어 보았다. 글의 제목은 이 글과 같은 <후회와 죗값>이다. 제목 그대로 후회와 죗값에 대해 쓴 글이며, 글을 쓰던 당시 나는 열아홉 살이었다. 다른 글은 쓸 때의 기억 혹은 당시에 느꼈던 감정이 희미하거나 아예 없는 수준이지만 이 글만은 상당히 선명하다. 그만큼 많은 고민을 거치며 쓴 글이기 때문이다. 글의 전문을 가져오면서 약간의 수정을 거쳐 개고했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내 인생에 진득한 흔적으로 남을 참회와 죄책감을, 오랜만에 다시 마음에 담는다.



오늘 '후회'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후회.

사람이 겪으면서 사는 수많은 후회의 이야기. 그리고 나의 인생에 걸친 수많은 후회 중에서도 가장 진하게 남은, 영원히 삶의 기록이자 이 세상에서 지울 수 없는 '죗값'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후회하는 일은 존재한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나 잘못을 저지른 순간,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고른 선택지가 끝내 좋은 결말로 끝나지 않았던 순간, 갈등하고 자책하며 나 자신을 다치게 만든 순간, 수치나 절망에 사로잡혀서 혼자 눈물을 흘렸던 순간.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만큼 후회가 맺힌 순간도 셀 수 없이 많다. 인간은 후회를 거듭하며 살아가니까.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불안해하며, 그렇게 살아가면서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되어야 하니까.


나 역시도 후회되는 일이 수백수천 가지다. 흔히 '흑역사'라고 말하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기억도 많고,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을 향한 후회도 마음의 벽 이곳저곳에 얼룩으로 남아있다. 오늘의 이야기는 후자이다. 부정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잘못에 관한 이야기다. 죄책감 덜어내고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 하는 이야기도, 반성하는 마음을 나타내기 위한 글도, 용서를 바라고 고해성사를 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본질적으로 품고 있는 어떠한 '악(惡)'과 이기심에 의해 생겨난 죗값을 기록하기 위함이다. 그 죄는 오로지 나의 몫이고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할 돌덩이라는 사실을 또렷하게 기억하기 위해 쓰는 이야기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친구를 배신했다. 나를 친구라고 믿었던 친구에게서 등을 돌렸다.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며 웃어주었던 친구를 외면하고 도망쳤다. 그 아이는 모든 동급생이 기피하고 싫어하는 아이였다. 이유는 지금까지도 모른다. 사실 이유랄 것도 없었다. 그 친구를 기피하고 싫어하는 분위기는 반을 넘어서 같은 학년 전체에 퍼져 있었다. 만지면 옮는 병균처럼 굴었다. 지금 떠올리면 섬뜩할 정도로 무서우리만큼, 정말 모든 아이들이 합심하여 그 친구를 따돌렸다. 물론 나도 방관자라는 이름으로 그 행위에 동조했다.


한 학년이 끝나고 반이 바뀌었다. 같은 반이 되었던 그 친구는 나를 발견하더니 몹시 반가워했는데, 어린 시절에 나와 같은 유치원에 다녔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먼저 친구라고 부르며 나에게 다가왔다. 유치원을 다니다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었던 나는 그 친구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얼떨떨했다. 하지만 먼저 다가온 친구를 거부하거나 꺼릴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 친구와 종종 대화를 나누며 어울렸다. 그냥 모난 구석 없이 평범한 친구 사이로 지냈다.


하지만 나와 그 친구 사이의 우정, 아니면 애초에 '우정(友情)'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관계는 끝내 이어지지 못했다. 내가 그 친구를 배신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무리였던 친구들이 그 아이와 어울리지 말라는 말을 한 것이 불씨였다. 다른 친구들이 나를 협박하거나 적극적으로 몰아붙인 것은 절대 아니다. 그 애랑 어울리면 앞으로 너와 놀지 않겠다는 발언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웬만하면 그 애랑은 놀지 마"라고 한 게 다였다. 그때 가해자는 모든 아이들이었다. 나, 같은 반 아이들, 옆 반 아이들, 그 친구를 외면하고 피했던 모든 아이들.


나는 그 말을 듣고 어떻게 했던가? 나는 '내가 계속 쟤랑 어울리면, 나도 똑같이 되는 건가?'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까지 도달하는 데 시간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두려웠다. 내가 그 친구와 똑같은 처지가 될까 봐. 친구들이 나를 따돌리고 더러운 병균처럼 취급할까 봐. 평화로운 학교 생활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웠다. 나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점차 그 친구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말이 나의 이기적인 내면을 건드리기는 했지만, 친구들이 내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친구와 계속 가까운 사이로 지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연스럽게 멀어지거나, 내가 그 친구를 밀어냈을 테지.


무엇보다 역겨운 존재는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이다. 나는 내가 저 아이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어울리는 친구들이 있었고, 아이들은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니까. 모든 아이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싫어하는 그 친구를 보면서 일종의 우월감과 안도감을 느꼈다는 사실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진실이다.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나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타인의 어려운 처지를 방관하면서 도와줄 마음은커녕 오히려 자기 위로의 소재로 삼아버리는 인간이라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상종하고 싶지도 않은 인간이라며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종하고 싶지도 않은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고, 내가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후회되는 일은 많다. 그 친구와 어울리지 말라는 친구들의 말에 "왜?"라고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은 것. 그 친구의 눈물과 아픔을 고스란히 보고도 차마 다가가서 사과 한 마디 할 용기조차 내지 못한 것. 끝까지 나를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친구에게 끝내 상처를 주고는 혼자 도망친 것. 그리고 그 친구를 중학교 내내 새까맣게 잊고 있다가 같은 고등학교에서 마주치고도, 그 친구에게 다가가 미안하다는 사과 한 마디 건넬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 나를 향해 쏟아질 그 친구의 차가운 시선과 냉정한 말을 두려워했던 것까지. 모든 일을 후회한다. 지금 이 순간조차 내일의 후회가 된다. 나는 이렇게 이기적이고 비겁한 겁쟁이다. 다가갈 용기도 미움받을 용기도 말을 건넬 용기도 없어서 혼자만의 일기에 끄적이는 한심한 인간이다.


잘못은 영원히 지울 수 없다.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던진 말과 행동으로 상처받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내가 죽고 수억 년이 지나서 우주가 완전히 사라진다고 해도 존재한다. 영원히 흘러갈 시간의 기록에 새겨진 일이니까. 내 수명이 다할 때까지 나는 그 일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지금 미처 사과하지 못한 것을 또 평생의 후회로 간직하겠지. 나는 그건 인간이니까.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죗값의 일부다. 죗값은 무기징역이나 전 재산을 벌금으로 내는 처벌 따위로 해결할 수 없다. 평생 값을 수 없으니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그 친구에게 용기를 내어 사과를 건넸으면 어땠을까. 그 친구가 나를 용서하고 말고는 내가 결정할 영역이 아니었으니 그저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면. 지금 와서 생각해 봤자 변하는 건 없다. 변명의 여지도 없다. 되레 과거에 자신을 배신한 가해자로부터 난데없이 사과를 받았다는 이상하고 불쾌한 진실만이 남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차라리 그 친구가 먼저 나를 찾아와서 과거의 일을 사과하라고 말해주기를 바랐던, 어쩌면 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수 있을지 모른다고 내심 생각하기도 했던…. 지금은 부디 그런 인간으로 굳어버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는 기억한다.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다. 지울 수 없는 잘못과, 돌이킬 수 없는 순간과, 마음에 영원히 남을 후회와, 영원히 값을 수 없는 죄책감이라는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 기록했다. 이 글은 그저 나의 수많은 죄 중에서 하나를 기록했을 뿐이다. 반성문이라고 칭할 수도 없는 글이다.




2021년 6월 9일에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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