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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Jun 26. 2024

문학 속에서 찾는 삶의 모습과 지혜

이선재 著, <다시 문학을 사랑한다면> [문학 에세이]


- 제목 : 다시 문학을 사랑한다면

- 저자 : 이선재

- 출판사 : 다산북스




이 책은 이북으로 먼저 만난 책이다. 책을 다룬 에세이라는 점에서는 전에 독후감을 썼던 박연준 시인의 <듣는 사람>과 유사한데, 전자가 책의 내용과 작가의 감상을 소개하는 '도서' 에세이였다면, 이 책은 문학 작품 자체의 소개보다는 그 작품에서 중요한 핵심이나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을 찾아내는 '문학' 에세이에 가깝다. 다양한 세계 문학을 기반에 둔 채로 우리의 장황하고 드넓은 인생을 이야기하는 느낌.


처음에는 그냥 뻔한 자기 계발서에 몇 가지 문학 작품을 접목시킨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문학 작품을 향한 관심보다는 취업 준비생과 직장인을 위한 자기 계발서 열풍이 우세하다 보니, 오히려 '잠재된 능력이나 기술을 발전시키고 잠재된 지혜와 생각을 일깨우는' 자기 개발과 자기 계발에 대한 거부감도 적지 않다. 나 또한 자기 계발서보다는 소설집과 산문집과 시집 같은 문학 작품집을 훨씬 좋아하는데, 어느 날 문득 자기 계발서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서는 '자기 계발서는 스스로의 몸을 갉아먹으며 쉬지 않고 일하고 움직이고 재산을 불리는 것만 종용하는, 쓸모없는 자기 사상에 도취된 책'이라는 악감정을 품는 것은 너무 섣부른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딱히 자기 계발서를 찾아 읽는 건 아니지만, 무언가를 향한 어설프고 급하고 견고한 편견은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음을 매번 느낀다.


이 책은 넓은 범주에서 보면 자기 계발서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이 그렇다. 내로라하는 기업인이나 경제학자나 박사나 강사나 크리에이터가 쓴 자기 계발서가 아니더라도 제목만 들어도 아는 유명한 문학 작품, 매일 새로 출간되는 수많은 소설집, 산문집, 시집 또한 그렇다. 읽다 보면 전에는 하지 않았던 생각을 하게 된다. 생경한 감정과 울림을 느끼기도 하고, 나의 속마음과 내면에 집중하면서 그동안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한다. 모든 독서가 그렇지는 않더라도 분명 문학을 비롯한 '책'이라는 존재가 독자에게 주는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방대하고 견고하다.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노래, 음악, 그림이 그렇듯이. 우리는 삶의 기술을 벗어난 삶의 목적에서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감수성과 감정을 느낀다.


이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잃어버린 나를 찾고 싶을 때]에는 삶의 의미, 진정한 어른, 살아가는 이유, 청춘, 성찰이라는 주제, 2장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에는 삶의 아이러니, 욕망, 죽음과 애도, 휴식이라는 주제, 3장 [문득 외로움이 찾아올 때]에는 사랑, 오해와 이해, 편견과 혐오, 용서, 부끄러움이라는 주제, 마지막 4장 [풀리지 않는 질문 앞에 섰을 때]에는 선택, 사회의 이면, 사유, 삶의 태도, 배움이라는 주제가 있다. 단어만 봐도 인간의 모든 삶을 통틀어 존재하는 요소들의 집합이라고 할 만하다.





이해의 폭을 넓히는 일


이 책은 힘을 기르게 한다. 많은 문학 작품과 더불어, 그 속에 녹아든 내가 사는 세상을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는 힘. 살아가면서 불가해한 일을 맞닥뜨릴 때가 얼마나 많은가. 가정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나와 생각이 맞지 않는 사람은 널렸고, 도대체 왜 저런 생각을 하고 저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세상에 널렸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결이 다른 사람을 볼 때마다 이해와 수긍보다는 무시와 편견을 택하는 쪽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저 사람은 참 이상하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 그리고 끝. 그 후로는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그냥 이 사람은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못을 박아두고는 거리감을 둔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고, 지금도 그런 사람일 것이다. 특히 직장과 집을 오가는 나에게는… 임직원을 통틀어 서른 명이 채 되지 않는 사무실 안에서도 이해 못 할 사람이 너무 많다. 사실은 전부 다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기 때문에 나도 '그런 사람'이 된다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성격도 행동도 생각도 전부 이상하는 험담은 수십 번 당해봤겠지.


하지만 이제는 편견에 사로잡혀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절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가 바라보던 세상을 벗어나 견문을 넓혀야 한다. 그저 어른이 되어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좁은 세상에 갇혀 내 생각만이 옳다고 믿다 보면, 처음에는 편안할지 몰라도 결국 그 고통과 괴로움은 모두 배가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상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틈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니까. 이것은 윤리적 · 도덕적으로 어긋난 사상과 민폐 행동을 모두 수긍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이해의 폭을 넓히는 일은 인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자 성장 과정, 혹은 하나의 생애 주기로 볼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독서와 그에 대한 사유는 내가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다.


고등학교 시절에 담임 선생님께서 책 읽는 나에게 좋아하는 작가나 출판사가 있냐고 물어보신 적이 있다. 당시에는 쉬는 시간마다 책을 읽긴 했지만 딱히 선호하는 장르나 스타일은 없었다. 특별한 생각 없이 집에 있는 책을 가지고 와서 읽거나 학교 도서관에 읽는 책을 대여해서 읽는 정도였다. 담임 선생님은 비슷한 사상을 지닌 책이나 특정 작가의 글만 읽다 보면 생각이 편협하게 바뀔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나서야 그 말씀이 정말 중요한 조언이었음을 깨달았다. 어떤 정보나 사상에 자주 노출되느냐, 어떤 사람의 말을 자주 듣느냐에 따라 편협한 사고방식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고 은근하게 나의 머릿속을 지배한다. 진짜 무서운 건 그냥 바보가 아니라 책 한 권 읽은 바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자신에게 이해력이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 파멸이 시작된다.


이 책은 문학 작품의 내용과 함께 그 작품에서 나온 대사, 독백, 문장 등을 인용한다. 한 번도 읽어 보지 않은 작품이라도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보다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단순한 책 소개를 넘어서 인생 강의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흔히 말하는 '꼰대'처럼 인생은 이러쿵저러쿵 살아야 한다며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건 아니고, '이런 등장인물처럼, 혹은 이 작품처럼 이렇게 저렇게 살아보는 건 어떨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나와 나의 삶을 위해서!'라고 격려하며 일종의 선택지를 주는 느낌이다. 지금껏 내가 품고 살아온 편견, 자기 연민, 자아도취, 차별 따위의 구차한 착각과 알량한 자의식을 돌아보는 계기. 나의 가치관과 사상이 무조건 '선(善)'이고 '정의(正意)'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품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부끄러움이 참 많은 삶이다. 평생 거울을 들여다봐도 나는 결코 나의 본모습을 모두 깨닫지는 못할 것이다.



문학과 글은 나의 머릿속과 마음속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착각을 조금씩 뒤흔든다. 나와 아주 비슷한 등장인물에게서는 내가 이토록 비겁하고 재수 없는 사람이었음을 깨닫고, 나와 전혀 다른 등장인물에게서는 타인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고 내가 고쳐야 할 점을 본다. 어떤 책에서는 내가 평소에 하는 생각이 그대로 문장으로 나와서 깜짝 놀라고, 또 어떤 책에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모순을 꼬집고 들어와서 깜짝 놀란다. '나 말고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구나!'라는 놀라움과 '이걸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거지?'라는 놀라움. 독서가 나의 내면에 가장 깊게 들어가는 행위라는 말은 아마 이런 것을 뜻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좋은 점은 바로 그것이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도, 읽고 나서도 내가 완전히 이해하고 느꼈다고 생각하는 책은 거의 없다. 책의 내용과 줄거리, 등장인물의 생각과 감정, 작가의 의도나 생각을 명확하게 해석하지 못할 때도 많고 ― 사실 책을 '느끼기'보다는 '이해하고 분석하기'에 나도 모르게 집착하는 것은, 그동안 학교에서 줄곧 주입식 교육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내 머리도 그런 쪽으로 기울어진 게 아닐까 추측한다. 이유야 어쨌든 작품을 마음으로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는 점은 정말 슬픈 일이다. ― 그래서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싶을 때도 무수하다. 이 책은 문학 작품을 국어 강사가 대신 친절하고 차분하게 설명한다는 점이 좋다. 물론 책에 나오는 내용을 모두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책의 줄거리나 내용을 받아들이는 일까지도 모두 독자 주관의 영역이니까. '작가의 설명'이라는 같은 다리를 건너면서도 그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이 각자 보는 풍경과 느끼는 감정은 다르다. 작가의 말과 설명은 책을 지배하지 않는다. 그저 책을 읽는 독자를 친절하고 편안하게 안내하는 일종의 길인 것이다.


문학에 대한 이해의 폭, 삶을 대하는 태도의 폭이 ― 아주 미미한 수준이라도 ― 조금은 넓어졌음에 혹은 넓어질 수 있음에 희망을 보았다. 성장 과정과 형편과 환경은 모두 다르고 삶의 모습도 천차만별이라도, 어쨌든 나의 삶을 이끌고 꾸려나가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점은 항상 믿고 있다. 편협하고 치졸한 사람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 그렇기에 이해하는 삶, 폭넓은 삶을 사는 건 내게 그만큼 소중한 바람이다.





마음 귀퉁이에 휘갈기는 문장들


p30 - 만약 서로가 '쓸모'가 있을 때에만 유지되는 관계라면, 그 '쓸모'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전전긍긍할 것인가? / 모든 관계가 오로지 쓸모만을 위한 것이라면 인간의 삶은 얼마나 고달플까요. 그렇다면 우정처럼 충만한 관계는 역설적으로 전혀 쓸모가 없어야겠죠. 하지만 쓸모없기에 더없이 쓸모 있는 것들이 우리 삶에는 더 많습니다.

* 1장 - 쓸모없는 존재의 쓸모에 관하여(삶의 의미) / 심리학자 스벤 브링크만의 철학책 <불안한 날들을 위한 철학>에 나오는 문장과 작가의 생각


수지타산을 따지며 유지하는 관계가 있다. 혹은 이익과 손해만을 따지며 사람을 사귀는 사람이 있다. 나와 가족, 나와 친구 사이에 어떠한 우열이나 이해타산적인 시선이 존재한다면 그만큼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없다. 별다른 이유 없이 문득 생각나면 뭐 하고 있냐는 문자를 보낼 수도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다들 언젠가는 깨닫지 않는가. 갑자기 만나 카페에서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눌 수도, 이따금 고민이나 불안을 털어놓기도, 함께 술을 마시고 알딸딸한 정신으로 웃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음이 진정한 행운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 특히 세상이 아주 넓게 느껴질 때면 더더욱.


그저 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쓸모이자 의미 자체인 관계를 지향한다. 쓸모를 유지하기 위해 억지로 힘을 쓰는 대신, 힘이 쭉 빠진 채로도 서로에게 힘을 주고 인생을 응원하며 사랑하고 싶다. 나와 친구들도 만날 때마다 그래도 힘내서 살자는 말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거라고, 우리는 정말 열심히 하고 있는 거라고 말하다 보면 진짜로 그런 마음이 솟구친다. 주변 사람에게서 힘을 받을 때면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기운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며칠 전 친구들이 있는 채팅방에 [우리 여름휴가 때 장마랑 벌레떼랑 겹치면 어쩌지? 코엑스 같은 곳에서는 하루종일 놀 수 있을까?]라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한 친구가 [호텔에 하루종일 있어도 돼! 중요한 건 우리가 같이 한다는 거야!]라고 답장을 보내와 묵직한 감동이 일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의 쓸모를, 혹은 타인이나 누군가의 쓸모를 생각하는 순간이 있다. 아마 내가 아주 외로운 상태라는 증거일 것이다. 창백하고 어두운 세상을 홀로 쓸쓸하게 걷고 있을 나의 어깨에 작은 외투라도 둘러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p49 - 진짜 어른은 모든 것에 끝이 있다는 걸 알고 겸손하게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행운도, 어제의 불운도 영원하지 않기에 삶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 1장 - 나이를 먹었다고 모두가 어른이 되는 건 아니기에(진정한 어른)


생각해 보면 행복과 불행이라는 존재는 그보다 작은 행운과 불운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행운이 겹치고 겹쳐 행복해지는 사람, 불운이 겹치고 겹쳐 불행해지는 사람. 삶의 행복과 불행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존재한다면 나는 분명 행복에 속하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데에 외모, 재력, 능력, 성격, 가족, 환경, 국적, 인종, 성별, 건강, 성적, 학벌, 재능, 취미, 인간관계 등 수많은 요소의 기준이 존재한다면, 슬픈 말이지만 나는 기준 미달이다. 얕고 잦은 우울과 불안을 오가면서 마음속으로 되뇌고 되뇐다. '좀 더 행복해지고 싶다.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면 문득 인생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 미처 살기도 전에 지쳐버리기까지 한다.


그럴 때는 이 순간은 영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나를 괴롭고 힘들게 만드는 것들이 언젠가는 내 인생에서 사라지거나 조금씩 옅어지는 시간이 올 것이고, 지금은 아주 거대하고 악랄하게 보이는 존재도 언젠가는 형태조차 흐릿해질 만큼 초라하게 희석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오늘의 행운도, 어제의 불운도 영원하지 않기에 삶은 살아볼 가치가 있다'라는 말이 마음에 남는다. 모든 행복, 모든 불행은 언젠가 끝난다. 잊어버리면 사라지고 내가 죽으면 나의 모든 행복과 불행도 사라진다. 어차피 내게 주어진 수명만큼 살다가 죽음에 다다르는 삶일 텐데, 아프고 쓰라린 불행을 욱여넣는 대신 조금이라도 따뜻한 행복이나 만족감 따위를 넣을 수는 없는 걸까. 신이 있다면 미천한 인간들에게 그 정도 자비는 베풀어야 옳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른스럽지 못한 어른은 정말 싫다. 그래서 늘 좋은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데, 어떤 일이든 반드시 끝과 이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산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단단하고 의젓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가수 서영은의 노래 <혼자가 아닌 나>에 나오는, '오늘은 내일의 어제가 된다'는 가사를 기억해야겠다.




p100 - '나는 나와 24시간 함께 있기 때문에 이런 나를 사랑해주기란 참 어렵다'라고요. 나는 나의 가장 밑바닥, 때로는 구질구질하고 지질하고 옹졸하고 소심한 모습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목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너무나도 밉죠. 그러나 그런 나라도 우리는 시절이 지나면 또 그리워하곤 합니다. 그러니 지금의 나를 사랑해주세요. 나를 좀 더 궁금해하고 이해해주세요. 그것부터가 진짜 건강한 성찰의 시작입니다.

* 1장 - 밉지만 어여삐 여기는 마음이란(성찰) /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 나오는 대사와 그것에 대한 작가의 생각


나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은 언제나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천하기는 몹시 어렵다. 그냥 나대로 잘 살고 있는데 굳이 나를 더 사랑하거나 존중하거나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필요가 있나 싶은 것이다. 자의식 과잉으로 자존심만 내세우는, 타인에게는 각박하면서 나 자신에게는 관대한 사람이 될까 봐 무서운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자아도취와 자기혐오의 늪. 교만한 인간과 염세적인 인간으로 성장하지 않기 위해 매번 생각을 닦고 또 닦아낸다.


나는 나와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붙어 있으니 추한 모습을 전부 보고 겪고 느끼며 산다. 이런 나를 받아들이기 정말 힘들다는 사실을 안다. 왜냐하면 나도 그러니까. 하지만 나 자신이 미워하고 방치한다면 나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고, 서서히 망가지고 마모될 것이고, 그런 내가 너무 불쌍해서 나는 죽어서야 내내 나를 위한 눈물을 흘릴 것이다. 올바른 성장과 성찰을 위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매일 궁금해해야 한다. 스스로를 모르는 사람이 남을 알고 세상을 아는 현명한 시선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나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게 처음 내디디는 걸음이 아닐까.




p130 - 하지만 시험에 합격하거나 취업에 성공하거나 사업이 대박 나는 것만이 욕망의 목적은 아님을 잊지 말았으면 해요. 우리는 늘 그 과정의 내실과 가치에 집중해야 합니다.

* 2장 - 당신의 내일이 무너지지 않도록(욕망) /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이야기하는 글 중에서


우리나라가 유독 결과주의가 강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껏 살면서 결과만큼 과정도 중요하다거나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말은 거의 들은 적이 없다. 고등학교 동아리 선생님께서는 오히려 "과정 같은 건 안 중요하다. 사람들은 오직 결과만을 본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사람들의 인식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냉혹한 현실이기도 하다.


물론 결과는 중요하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결과밖에 없으니 모두가 그것만 바라본다. 자유와 즐거움을 포기하며 열심히 공부해 봤자 시험 점수가 엉망이면 헛고생을 했다고 여기고, 초반에는 잘 나가던 사람이 점점 뒤처지기 시작하면 '쟤도 결국 머저리였네!'라고 조롱하고 비웃는다. 힘들게 달리고 스스로와 싸운 시간은 전부 뭉개버리고 그래서 누가 제일 먼저 결승점에 들어왔느냐만 중요시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이들이 세상을 따라 변해가는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을 거스르기엔 가진 것도 없고 그럴 힘도 용기도 없으니까. 흐름을 따라 편승해 살아가는 게 가장 힘들지 않은 방법이니 말이다.


나는 나만이라도 나의 '과정'을 간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과정의 내실과 가치를 나만이라도 알고 있다면,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고 얼마나 간절하게 달렸는지를 나만이라도 안다면, 적어도 나는 내가 그토록 힘차게 달리고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테니까. 적어도 손해는 아니다. 어차피 결과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서,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그리고 나의 결과를 판단하고 과정을 기억하는 일은 오직 나만이 해도 괜찮을 것 같다.




p210 - 영국의 철학자 에드워드 버크는 "우리는 오래된 편견을 던져 버리는 대신 그것을 상당히 소중히 여긴다. 더욱 수치스러운 것은 그것이 편견이기 때문에 소중히 여긴다."라고 말하기도 했죠.

* 3장 - 왜 우리는 구분 짓고 미워할까(편견과 혐오)


편견, 차별, 혐오, 배척…. 그것에 관한 문제는 인간의 삶과 사회에서 절대로 떼어 놓을 수 없다. 일시적인 갈등이나 충돌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와 함께 이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미워하는 마음은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 된다. 내가 무슨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도, 그게 왜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는 경우나 너무나도 많아서 안타깝다. 손해 볼 일이 뭐가 있느냐 반론할 수도 있겠으나 인간으로서의 삶은 '손해를 보지 않는 삶'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유. 한 번쯤은 그런 걸 고민해 봐도 좋을 것이다.


편견이기 때문에 편견을 더 소중히 여긴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누군가를 자세히 알아가는 일은 귀찮고 피곤하다. 단편적인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일 거야'라는 편견을 하나씩 표면에 씌워 마음대로 해석하고 바라보는 게 훨씬 편리하고 간단한 일이다. 나는 내가 어떠한 고정관념을 반사신경처럼 가지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무지한 말을 내뱉는 순간이 모멸스럽다. 색안경으로 보는 세상은 편리하고 간단할지 몰라도 결코 아름다울 수는 없다. 모두 아름다운 세상에서, 따뜻한 세상에서 편하게 숨을 내쉬며 살자.




p244 -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은 그만큼 영혼이 올곧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 3장 - 영혼이 올곧은 사람들에 관하여(부끄러움) /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을 이야기하는 글 중에서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를 좋아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정작 윤동주 시인은 당신의 모습과 삶의 행보에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고는 이 시를 썼다. 진중하고 속이 깊은 시인 또한 그러했는데 진중하지도 속이 깊지도 않은 나는, 얼마나 더 많은 부끄러움과 창피와 수치와 모멸과 자멸을 느끼면서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떳떳하고 당당하지 못한 '나'라는 사람이 유독 작고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은 영혼이 올곧은 사람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들이 행하는 온갖 무례하고 몰상식한 언행을 생각해 본다. 길거리에서 뻑뻑 담배를 피워대는 사람, 밀폐된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떠들고 웃고 통화하는 사람, 식당이나 매장에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사람, 지하철에서 과한 애정행각을 하는 사람, 앞사람을 거칠게 밀치고 지나가는 사람, 불쾌한 욕설을 우렁찬 목소리로 마구 내뱉는 사람까지. 그들에게는 배려심도 부끄러움도 없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할 리 없고, 부끄러움 많은 사람이 타인을 배려하지 않을 리도 없다. 그네들은 처음부터 뒤틀린 영혼을 지니고 있었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시간과 성장한 환경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겠지.


뒤틀리고 휘어지고 오염되는 영혼을 가만히 바라보지 말자.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은 나만이 바꿀 수 있는데, 그 소중한 것을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고 모두 어디로 떠나는가! 부디 부끄러움을 모르기에 남에게 부끄러운 인간만은 되지 말자. 절대로 그런 사람이 되지 말자….




p266 - 수많은 별자리 속에서 때로는 방향을 잃고 헤매는 과정 그 자체가 인생입니다.

* 4장 - 갈림길에 섰을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선택)


선택이 두렵고 망설여지는 이유는 바로 '실패'를 기반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잘못 선택해서 상황이 더 나빠지면 어쩌지, 후회하면 어쩌지, 실패하면 어떡하지. 본능처럼 파고드는 불안과 걱정이 우리를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굳어버리게 만든다.


최근 개봉하여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 2>의 주요 등장인물도 새로 등장한 감정 '불안이'다. 사실 영화는 안 봤지만 이미 줄거리와 결말을 모두 알고 있다는 이상한 이야기. 여하튼 불안이는 기존의 감정 오총사를 온갖 위험과 좌절에 빠뜨리는 일을 저지르는 메인 빌런이지만 그럼에도 많은 관객들이 불안이에게 이입하고 공감했던 것은, 불안이가 '오직 라일리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최선을 다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존재 자체가 불안인 탓에 위험한 생각과 섣부른 판단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서 결국 결과가 틀어졌을 뿐. 위에 쓴 글과 살짝 연결시킨다면 불안이의 행동은 끝내 좋은 결과를 만들지 못했지만, 불안이가 자신만이 라일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자만하며 저지른 실수와 그 과정도 라일리를 한 단계 성장시켰다. 무너진 결과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면 그 속에서 조금씩 얻은 것, 배운 것들이 있는 셈이다.


알고 있다. 나는 옳은 선택만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금껏 나는 잘못된 선택으로 수많은 후회와 좌절의 쓰라림을 맛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나의 선택에 대한 자신은 없다. 괜히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하는 건 아닐까 두려워서, 새로운 선택지를 향해 섣불리 손을 뻗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도 안다. 나의 인생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결코 반듯한 포장도로를 달려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수많은 후회와 좌절, 우울과 권태, 불안과 걱정 속에서 살아가리라는 사실을. 참으로 야박한 인생이다. 어떤 계절이든 결코 쉽게 지나가는 법이 없다. 하지만 이게 인생이라면, 어쨌든 이게 나의 삶이라면, 아직은 죽을 수도 없으니 어쩌겠나 싶고 어찌 되었든 받아들이고 최대한 잘 살아가야지 싶은 것이다. 적어도 10년 뒤의 나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무던하고 능숙한 사람이 되어 있겠지.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많은 경험치를 쌓았겠지. 사람의 삶도 소위 말하는 '짬밥'이 생각보다 크지 않은가. 그런 믿음으로 버티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나의 젊은 시절을 형형색색 물감으로 칠하고 있다.





읽고, 생각하고, 사유하는 삶


글은 머리와 마음으로 읽는다. 마음이 글을 느낀다면, 머리는 글을 생각한다. 판단하고, 정리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물음표가 붙은 문제를 만든다. 책은 사람을 생각하게 만든다. 짧고 단편적인 생각이 아니라 길고 깊은 질문까지 들어가게 한다. 그것이 책의 가장 큰 가치이고, 더불어 문학이 인류의 역사와 함께 발전하고 지금까지도 길이길이 보전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p297 - 누구나 사색할 수 있는 사회는 근대 이후에야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 시대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이 중요한 진실을 자주 잊곤 합니다. 질문하고 사색할 권리가 항상 당연하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인류 역사상 이렇게 모든 인간이 공평하게 자기 존재에 대해서 탐구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시대도 드뭅니다. 이런 시대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죠. 그러니 이 소중한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자주 사색하고 질문해야 합니다.


인간의 가장 큰 허점, 가장 취약한 부분은 '익숙해지면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점'이 아닐까. 지금은 기본적으로 안전과 자유와 평화가 보장된 세상이다. 갑자기 내일 아침 중무장한 군인들이 들이닥쳐 나를 쏴 죽이면 어쩌지, 미사일이 날아와 우리 동네를 모두 박살내면 어쩌지,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굶어 죽으면 어쩌지, 그런 걱정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안전과 자유와 평화는 당연하게 주어진 게 아니다. 멀지 않은 역사만 봐도 수많은 학살과 식민과 독재가 존재했고, 수많은 목숨과 희생을 대가로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국은 지금 이 모습을 갖추었다.


모든 것은 언제, 어떤 이유로 무너질지 모른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 당장 내일 나와 가족들의 목숨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만약 대한이 일제로부터 독립하지 못해 한국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언어가 되었다면. 만약 가난하다는 이유로, 혹은 여자라는 이유로 글을 배우지 못하고 학교 대신 공장이나 남의 가정으로 내몰리는 세상이 다시 찾아온다면. 만약 국가가 직접 나서서 시민의 목소리를 죽이고 그 무엇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가정은 끝도 없다. 물론 대부분 허황된 상상이긴 하지만, 그만큼 어느 것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공평한 자리에 서 있는 것도 역사를 보면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다. 언제든 빼앗길 수 있다. 안전, 자유, 평화, 생각할 권리와 말할 권리, 그 모든 것을.


가만히 앉아 있으면 책 좀 읽으라는 둥 생각 없이 살지 말라는 둥 귀찮은 잔소리가 쏟아진다. 정작 그렇게 말하는 어른들도 정작 밖에서도 집에서도 일하느라, 쉬는 날이면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거나 지인들과 술자리 나가느라 책 한 권 읽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어떤 말이든 쉽게 믿지 말라는 어른들도 정작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가짜 뉴스와 루머는 잘도 믿는다. 너무 어른들을 욕보이는 말인가? 물론 어른도 불완전하고 미숙한 인간일 뿐이다. 나도 훗날 나이 허투루 먹었다는 소리만 안 들어도 다행이겠지.


개똥도 약이 된다고, 듣기 싫은 잔소리도 지나고 보면 나름대로 거두어 갈 씨앗이 있다. 무언가를 읽는다는 건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순간부터 나는 나의 '사색하고 질문할 권리'를 지키기 시작하는 것이다. 죄와 도덕을 판단하고, 자신의 신념을 구축하고, 어떠한 현상이나 사상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 조금은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탐구열은 그 자체로 뜨거운 불이고 나를 가열하는 힘이 되니까.



이 책은 바로 그 '사색하는 힘'을 밀어주는 작품이다. 다양한 문학 작품을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음은 물론 독서와 문학에 대한 흥미도 훨씬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어쨌든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 억지로 상상을 부추기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라면 이때 어떻게 했을까?',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더라?' 같은, 무겁지 않으면서도 삶의 중요한 분기점을 차지하는 질문을 떠오르게 만든다는 점이 좋다. 내가 이런저런 잡생각이 많은 사람이어서 그런 점이 두드러지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읽고, 생각하고, 사유하는 삶을 놓치지 말자. 포기하지도 빼앗기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하기 싫은 날은 편하게 던져둘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독서와 사색을 하고 싶은 날이면 책을 끌어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읽겠다. 그것이 내가 이 세상과 글과 문학의 아름다움을, 내 삶의 자유와 권리와 안전을, 생각하는 힘과 사유하는 일을 지키는 가장 견고한 방법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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