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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Jul 03. 2024

사라졌다는 것은 존재했었다는 증거

목정원 著, <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 [사진산문]


- 제목 : 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

- 저자 : 목정원

- 출판사 : 아침달




공연예술이론가, 시인, 수필가인 목정원 작가의 산문이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이 작가는 문체가 상당히 독특하다. 분명 한글로 되어 있고 몇몇 단어를 제외하면 모두 내가 알고 있는 어휘인데도, 그것들이 조합되어 만들어진 문장은 낯선 언어로 만들어진 생경한 문장을 읽는 느낌이다. 일부러 어렵게 쓴다기보단 작가가 탄생시킨 문장마다 특유의 쓸쓸하고 미지근한 감정이 묻어 있어서, 문장을 읽는 동시에 그 온도와 감촉을 함께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태어나 처음 보는 표현과 묘사들은 왠지 모르게 포근한 느낌도 있었다. 사실 글보다 사진이 더 많아서 좋기도 했다. 나는 글을 읽는 것만큼 사진 감상도 좋아하니까.


이 책과 함께 작가의 전작인 산문집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을 구매했는데, 그 책은 아직도 다 읽지 못했다. 아직 나에게는 이르다고 생각한 책이고 지금도 역시 나에게는 이른 책이다. 하지만 의외로 진도는 거의 후반부까지 나갔는데, 예전에 마무리가 덜 된 강화도 집에 갔을 때와 외조부모님 댁에 갔을 때 지루한 스마트폰 대신 독서를 선택한 덕분이다. 다만 책은 마지막 책장을 넘긴다고 해서 다 읽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쩌면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다.


책은 인류 최초로 기억의 기술을 고안한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글은 영원히 남아 있지만 결코 그 실재를 담을 수는 없는 사진, 그리고 그 사진으로 증명되는 ― 침묵으로써 말하는 ― 대상의 실존에 대한 이야기, 사라진 사람과 남은 사람들, 나치 독일이 행한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에의 생존자와 그들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책에는 글이 많지 않다. 사진산문이라는 이름처럼 글보다는 사진의 분량이 훨씬 많고, 그나마 있는 글도 책장 하나를 빼곡히 채울 정도는 아니다. 이 책에 있는 모든 글을 모아도 열 페이지가 채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만큼 문장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여 쓴 듯하고, 반대로 모든 미련과 고뇌를 놓은 채 편안하게 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책은 그동안 읽었던 책과는 다르게 뚜렷한 감상이 힘들다. 다른 책과는 결이 조금 다른 느낌이랄까. 읽는 사람마다 감상평이 천차만별로 나누어질 것이다.


물론 나는 긍정적인 쪽이다. 작년에 한 번 읽었던 책이지만 독후감 작성을 위해 다시 읽었는데, 다시 읽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이해력과 문해력과 감수성을 최대한 끌어모아 가장 최상의 독후감이 될 수 있기를.





눈에 넣고 마음에 담은 이야기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다 읽은 후에 느낀 감상의 명확한 발원지는 불명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작가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무언가를 어떻게든 줄곧 품고 살아가고 싶다는 의지를 글과 사진에서 목격했다는 것이다. 떠나왔고 살아 돌아왔음에도 여전히 죽음에 영영 남겨진 듯한 아픈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슬픔과 고독을 지켜보는 기분.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영혼과 그들을 향한 동정, 동질감, 잔영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할 수 있었다.


p61 - 사진으로 남은 모든 풍경은 결코 내가 바라본 그대로일 수 없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나는 탄식한다. 이것을 담을 수 없다. 이것은 지나갔다.

사진을 찍으면서 가장 안타까운 순간이다. 눈앞에 있는 풍경이 카메라 렌즈에는 절대 그대로 담기지 않을 때. 홀린 듯이 카메라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스마트폰을 들고 세상을 보는 순간마다 애가 탄다. 도대체 왜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을 담지 못하는 거지? 반드시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건 그만큼 아름다워서인데, 정작 내 눈에 들어오는 이 세상이 사진에는 조금도 담기지를 않고, 그러는 사이 아름다운 풍경은 지나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곳으로 흘러가 버리니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진이란 본래 그럴 수밖에 없기에, 이건 카메라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라며 수긍한다. 실물보다 더 아름다운 사진은 없다.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사진이 실물을 그대로 담아낸 게 아니라, 실제보다 볼품없이 나온 사진에 여러 보정과 기술을 가미하여 만든 새로운 창작물이다. 이따금 사진을 보고 있으면 나를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시절, 풍경, 장면이 그대로 화면에 남아 사진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그러나 무엇도 내가 바라본 그대로 남지는 않는다. 사진도 기억처럼 서서히 흐려지고 빛바래고 흩어지니까.



p97

프랑수아즈   단순한 말들이었죠.

                  춥다, 목마르다, 배고프다,

                  피곤하다, 졸립다, 두렵다,

                  살다, 죽다.


드니즈         차이를 모르시겠다면

                  그건 우리가 그 말들이 거기서 가졌던

                  의미대로 그것들을 더 이상 발음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이자 프랑스인 작가 '샤를로트 델보'가 쓴 희곡 <누가 이 말들을 가지고 돌아갈 것인가?>의 일부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에 아래 문장이 나온다.


p98 - 델보의 문장들이 시대착오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시공에 균열을 내는 것은 그 모든 고통이 지금에 와 정돈된 언어로 환원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득, 몇 년 전 학창 시절의 어느 장면이 떠올랐다. 공부와 과제와 평가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지친 낯빛으로 죽을 것 같다거나 죽고 싶다고 말했다. 배고프다, 집에 가고 싶다, 졸리다처럼 습관적으로 내뱉는 말 중 하나였다. 학업 스트레스와 성적 비관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우리 학생들의 비극은 슬프게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적어도 내가 존재했던 그 교실에 진심으로 죽음을 갈망하고 애원하는 아이는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증거로 우리 반은 모든 학생이 무사히 졸업했다. 아무도 자살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대학살을 배경으로 하는 수용소에 갇혀 온종일 고문과 노역에 시달린 후 비좁은 침대에 누운 채 나지막하게 내뱉는, 죽을 것 같다거나 죽고 싶다는 말의 무게는 감히 전자와 비교할 수 없다. 같은 말이라도 그 속에 담긴 영혼의 무게와 삶의 깊이와 감정의 난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다르다. 그 마음은 얼마나 다를까. 오늘날의 정돈된 언어나 감상 따위로는 절대 다시 살려낼 수 없는, 공포와 고통과 절망의 마음은 얼마나 깊고, 어둡고, 외롭고, 고통스럽고, 두려울까.



164p - 침묵은 지금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지워지지 않는 것은 어떻게 안고 살아야 할까?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흐릿하게 뭉개지더라도 그 흔적이 흉터처럼, 뼈에 남은 골절 자국처럼 평생 이어지는 것들은. 그것은 어떠한 재해나 재난처럼 불가항력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기며 살기도 한다. 너무 커다란 고통이기 때문일 수도, 반대로 지극히 미미한 고통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인간은 이해와 공감을 자유롭게 있는 생물이어서인지 되레 이해와 공감에 각박한 구석이 있다. 자기 자신에게도 냉랭할뿐더러 타인의 어려움이나 고통은 비교적 쉽게 잊고 간단하게 외면한다.


하지만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들, 밝혀지지 않은 진실과 드러나지 않은 마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뉴스에 사고로 몇 명이 사망했다는 기사가 보도되면 철저한 타인인 나는 잠깐 안타까워하고 금방 그것을 잊어버리지만 죽은 자의 가족이나 친구나 연인은 그 죽음을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처럼, 전부 잊어버릴 때까지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같은 일이라도 받아들이는 무게는 너무나도 다르다.


그러니 침묵이 일종의 수긍이나 긍정 혹은 부정이라고, 저의를 파악하려는 노력 하나 없이 멋대로 착각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침묵은 또 하나의 언어다. 나는 자꾸 침묵이 필요할 때는 떠들다가 비로소 나서야 할 때가 오면 그제야 서둘러 입을 다물고 침묵하고 뒤로 슬그머니 물러나 꽁무니를 빼는 버릇이 있다. 언젠가 업보의 구렁텅이에 빠질 것이다. 그전에 입을 열어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받아들여야 할 때와 그러면 안 될 때를 구별하는 능력을 길러야겠다.





살아 있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 죽었다는 것은 살아 있었다는 것


157p - 당신이 없어진 자리가 남았다는 것은, 당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 자리에 서서 확인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 책을 읽고 떠올린 문장이 바로 저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이고, 죽었다는 것은 살아 있었음을 증명하는 증거다. 이 책은 사라진 것들이 살아 있었던 순간을, 지금 살아 있는 존재들이 서서히 사라지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기억, 사랑, 사진, 장면, 존재, 고통, 언어, 말, 두려움, 고독, 슬픔, 사람…. 참혹하고 허무한 시간과 세상에 대해서.


분명히 존재하지만 실재 자체가 남아 증명이 될 수 없다는 아이러니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직 나의 능력으로는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이 책에 대한 쉽고 간단하고 완벽한 독후감을 쓸 수 없다.



'살다'와 '죽다'는 동시에 진행하는 동사. 그렇기에 나는 내가 '살아간다'고 느끼는지, 아니면 '죽어 간다'고 느끼는지가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살고 있다는 말도 죽고 있다는 말도 나에게는 모두 적용되는 말이지만, 두 문장은 얼마나 상반된 표현인가. 삶과 죽음은 등을 맞대고 앉아 서로 정반대의 세상을 본다. 완전히 닿아 있지만 절대 서로의 시야는 넘볼 수 없다. 살아간다고 느끼는 나에게는 나름대로 행복과 만족이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죽어 간다고 느끼는, 죽어 가는 나의 마음에는 과연 무엇이 남아 있을까.


그렇다고 '죽음은 공포와 절망을 상징하는 존재인가?'라는 질문에는 명백히 긍정할 수 없다. 어쨌든 삶을 아름답다거나 가치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죽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죽지도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 생명체였다면 어땠을까? 그런 인간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과 전혀 다른 양상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삶을 향한 애착이나 고찰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불로불사였다면 지구는 진작 멸망하고도 남았다. 삶은 죽음이 있기에 가치 있는 순간이 될 수 있다. 반드시 죽음이 전제로 있어야만 삶이 존재한다니 꽤 재미있지 않은가. 사라지기 때문에 소중한 것, 사라졌기 때문에 기억되는 것들은 생각보다 많이 있다.


사라지고 있거나 사라졌기에 우리는 그것의 흔적을 더욱 필사적으로 기록하고 기억한다. 심지어 수많은 연구 끝에 사라진 것을 복원하여 인류의 유산으로 삼아 보존한다. 나는 그것들의 역사적 혹은 문화적 가치를 일일이 알지는 못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사라진다는 건 외롭고 슬프지만 그리 무서운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를 비롯한 모든 기억, 이름, 냄새, 목소리, 말, 존재, 넋은 언젠가 모두 없어질 테니까. 그렇기에 나는 내가 무엇을 껴안고 느끼며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기억 너머로 사라진 것들을 기억할 수 있는 거니까.



책을 읽으면서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일은, 인간으로서 느끼고 생각하고 체감하고 고뇌하며 산다는 것은, 인간의 삶은 다분히 괴롭고 지지부진한 시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잊고 싶은 것이 자꾸만 기억나는 순간이나 지우고 싶지 않은 것이 어느새 머릿속에서 흐려지는 순간에는, 내가 지구상에서 가장 똑똑한 생명체로 태어났음을 믿지 못한다. 나는 사람이고 더는 어린이도 아닌데 계속 이렇게 이도 저도 아닌 채 살아도 되는 걸까. 계속 이렇게 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자기 비하적이고 아득하고 아둔한 고민에 대한 미묘한 위로를 ― 해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미미한 수준이므로 ― 이 책에서 받은 것 같다.


이 책은 어떤 작품이라고 확실하게 정의할 수가 없다. 사라진 것을 보내고 남겨진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좋은가, 사라지고 싶지만 사라지지 않을 때는 어떻게 살아야 좋은가, 고통과 슬픔과 불신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도 행복하게 살 수가 있는가…. 결국 초점은 온통 '산다'에 맞춰진다. 우리는 죽지 않았고 죽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계속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를 건너다보며 다음을 기약하지는 않는다. 모든 일은 죽음이 닥치기 전에, 내가 살아 있고 나의 존재가 아직 실존하여 증명될 수 있을 때 시작하고 끝내야 한다.


작가는 책의 맨 마지막 장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사라진 다음, 사람은 어떻게 계속 살아가는가 비로소 아득하게 물었다"고 말한다. 사람은 무언가가 사라진다면 사라진 채로 산다. 그대로 잊거나 기억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이 바로 사라졌기에 존재했음을 알게 되는 과정이다. 어쩌면 이 책은 사라진 사랑, 남겨진 그리움과 애달픈 마음, 인간으로서의 괴로운 굴레를 한탄하듯 내뱉는 책일지도 모르겠다.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어려운 책이었다. 그러나 읽었음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 책에 실린 사진 중 일부를 함께 나누고 싶어 조심스럽게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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