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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Jul 17. 2024

나와 멀고 가까운 세상과 마음들

김금희 著, <너무 한낮의 연애> [단편소설집]


- 제목 : 너무 한낮의 연애

- 저자 : 김금희

- 출판사 : 문학동네



사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나에게는 아직 어려운 책이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졌는데, 중고등학생 시절에 읽었던 책이 김애란 작가의 <비행운>과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면 가히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해력과 흡입력은 여전히 우스운 수준이지만 어떤 이야기를 읽으면서 장면을 상상하는 것, 등장인물의 감정을 내 것처럼 느끼려 하고 이야기의 흐름을 조금씩 더듬어 그 속에 숨겨진 나의 삶과 현실의 모습을 바라보는 행위에는 아주 조금 익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정말 미미한 수준이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도 '나는 결코 이런 작가가 될 수는 없겠지'라는 씁쓸한 생각에 사로잡혀 괜한 우울감으로 옷깃을 적시곤 한다. 금세 마르긴 하지만 절대 가닿을 수 없는 지점을 바라보는 자의 허한 마음은 오직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 책은 나에게 제법 난이도가 있는 책이다. 마지막 단편 뒤에 수록된 강지희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읽으면서 여러 번 약한 충격을 받았다. 평면적이고 기계적인 나는 미처 상상하지도 못했던 많은 의미와 첨예하고도 섬세한 감정들이 지금껏 지나온 이야기 곳곳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문학평론가의 해설은 너무 이야기 본질을 꿰뚫어 보려고 하는 것 같아 다소 멀게 느껴질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문학 작품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들춰보고 살피면서 그 안에 담긴 것들을 최대한 끌어내어 글로 표현하는 능력과 지식은 실로 존경스럽게 생각한다. 그만큼 대단하지는 않더라도, 내가 쓰는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인지 알고 있을 정도의 그릇만 있어도 좋을 것이다. ― 이것부터가 이미 너무 거창한 바람일 수도 있겠지만. ―


비겁하게도 강지희 문학평론가의 말을 빌려 이 책을 표현한다. "우리에게 어떠한 구원도 부활도 약속하지 않지만, 현재를 살아내지 않고 미래의 종말을 앞당겨서 깨뜨리고 싶은 욕망을 멀리 밀어내는 빛이 담긴 책. 그렇게 우리를 지나갔으나 결코 사라지지 않은 의미를 다시금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책"이라고.


역시 무슨 말인지는 아직도 정확하게 모르겠다. 하지만 이 문장이 마음에 와닿는 감각은 알 것 같다. 나를 지나갔고 내 곁에 머무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소멸하거나 마모되지도 않은 것, 까맣게 잊고 살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내 몸에 퍼지는 생경한 감정과 낯설면서도 그리운 마음, 아직 나에게 오지 않았지만 마치 내 앞에 있는 것 같은 존재와 감각. 그런 것들을 누구나 조금씩, 아주 잠깐일지라도 느끼면서 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류의 책은 처음보다 두 번째로 읽을 때 훨씬 많은 것들이 보인다. 처음에는 아리송하고 불확실한 부분을 두 번째에는 조금 더 자세히, 면밀히, 깊이 살피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책을 두 번째로 읽을 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





이야기를 읽는 동안


첫 번째 단편은 이 소설집의 최종 제목이 되기도 한 <너무 한낮의 연애>. 영업팀에서 시설관리팀으로 좌천된 주인공 '필용'의 이야기다. 그의 회상 속에 나오는 '양희'라는 후배는 두 번째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이 단편에는 유명한 대사가 있다. 필용이 "오늘도 어떻다고?"라고 물으면 양희가 "사랑하죠, 오늘도."라고 대답하는 장면. 로맨틱하지도 설레지도 않는 이 장면은 어쩐지 머릿속에 오래 남는다. 내가 꼭 필용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양희에게 어떠한 연애적 감정도 느끼지 못하던 필용이 양희의 사랑한다는 무미건조한 말 한마디에 모든 신경이 온통 양희에게, 정확하게는 양희로부터 "사랑한다"라는 말을 듣는 것에 쏠린 필용처럼.


어쨌든 현실의 필용은 좌천이 되었고, 아들의 학교에 찾아가 학부모들에게 명함을 돌리며 아들의 기를 세워주는 일도 하지 못하게 되었고, ― 아무래도 시설관리팀이라는 명칭은 회사원 입장에서 영업팀보다 힘이 덜 들어가 있기 때문에 ― 같은 사무실 직원들과도 어울리지 못해 겉도는 신세다. 그러던 중 우연히 양희를 재회한다. 관객이 다섯 명을 채 넘어가지 않는 관객참여형 연극에서, 아무런 줄거리도 대사도 없는 연극에서 홀로 움직이는 양희를 만난다. 이름을 부르거나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분명히 알아본다. 그리고 필용은 눈물을 흘린다.


42p -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나니 양희의 대본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끊어낼 수 있는 마음이 있다. 필용에게는 그 '깨달음'이 양희와의 재회가 된 것이 아닐까. 어쩌면 필용의 마음속 어딘가에 자그맣게 피어나고 있었을 어떠한 기대, 설렘, 변화의 가능성이나 희망의 불씨는 신기루처럼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필용의 완전한 좌절이나 절망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가 더 제대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무언가를 지웠기 때문에. 끊어냈기 때문에. 더는 마음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책에 남긴 글 - 주인공 필용은 많은 것을 잃었다. 영업팀장의 자리, 자존심, 어머니, 구원, 사랑, 양희, 그것들이 존재했던 시절의 안락함이나 어떠한 마음 혹은 감정의 요동침까지. 그것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우연히 양희와 재회한 일을 계기로 필용 또한 상실감과 미련을 모두 없애지 않았을까. 비로소 붙들려 있었던 과거와 기억과 부담감에서 조금은 홀가분해지지 않았을까, 그렇게 믿는다.




두 번째 이야기는 <조중균의 세계>. 이 단편에는 아주 고집스럽고 소심하고 완고한 '조중균' 씨가 나온다. 교열과 교정에 지나치게 몰두하고 사무실 직원 중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가 너무 강해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조중균 씨. 그를 바라보는 것은 화자인 '나(영주)'이다. 나는 '해란'이라는 연하의 직원과 함께 신입으로 회사에 들어왔는데, 알고 보니 회사는 두 사람 중 한 명만 채용할 계획이었고 나는 알게 모르게 해란을 경쟁자로 의식한다. 하지만 해란은 구태여 나를 견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무실 직원 중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던 조중균 씨의 세계를, 그가 살아가는 세상을 조금은 알 것 같다고 말한다.


나는 조중균 씨를 여러모로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훗날 조중균 씨가 교정 기한을 한 달이나 넘겼다는 이유로 해고된 이후에도 조중균 씨를 떠올린다. 그의 모습이 정확하게 떠오르지는 않지만, 조중균 씨의 세계가 어떤 세계였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는 마음으로 그를 생각한다.


65p - 아무것도 쓰지 않고 이름만 적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얻어지는 형태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조중균 씨의 과거에서 나오는 문장이다. 조중균 씨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얻어지는 형태의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쉽게 얻어지는 건 얻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건 나(현실)의 생각과 비슷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잊어버린다. 쉽게 얻은 것은 그만큼 소중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것이 물건이든, 점수든, 돈이든, 사랑이든, 관계든, 마음이든. 그렇다고 어렵게 얻은 것만을 오래 기억하고 소중하게 다룬다고 말하면 그것 또한 아니다. 다만 조중균 씨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름만 쓰면 점수를 준다는 시험에 기어코 시를 써서 낙제가 되어버리면서도 그 시를 "내 시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 조중균 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현명한 사람일까, 신중한 사람일까, 소심한 사람일까. 혹은 전부였을까.


책에 남긴 글 - 조중균 씨의 세계. 모두가 각자의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거나 반대로 그림자처럼 어둡고 조용한 세계가 존재한다. 나는 다수의 세속적인 집단에서 떨어져 나간 듯이 귀퉁이로, 이질적인 모습으로, 그러나 누구도 자세히 알지 못하고 그러려고 하지도 않았던 조중균 씨의 세계를 멀게 느끼지 않았다. 그의 고집과 신념과 소심한 영혼은 내게 별세계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나의 수많은 내면 중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내 곁에 머무르거나 내 속에 존재하는 다면의 일부로 보였다. 나도 그처럼 수월하게 융화되지 못하는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회사에서 조중균 씨를 더는 볼 수 없지만, 그는 어딜 가든 자신의 세계를 지키며 살고 있으리라 믿는다.




세 번째 단편은 <세실리아>. 화자인 '나(정은)'는 대학교 시절 들어간 요트 동아리 회원들과 거의 마흔이 다 된 지금까지도 만남을 가진다. 다만 순수한 친목이나 교류로써 만나는 것은 아니다. 결혼하고 자식도 있는 유부남 동창들이 슬그머니 나와의 육체적 관계를 원하는 듯한 모습을 보면, 되레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주기적으로 만남을 가지는 듯하다. 물론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불륜이나 "사랑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 같은 막장 드라마 전개는 나오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는 사랑이 없고, 육체적인 관계를 넘어 내면을 향한 관심도 전혀 없으니까.


나는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튀어나온 대학교 동창 '세실리아'를 떠올린다. 애정결핍이 있는 막냇동생처럼 엉겨 붙는다며 엉겅퀸이라는 별명까지 생긴 그녀. 그러나 동아리 회원들 중 가장 불량한 형규 ― 그는 결혼을 했음에도 항상 애인이 있었고, 그중에는 '여자애'라고 부를 정도로 젊다 못해 어린 여자도 있었다. ― 는 세실리아의 엉덩이가 아주 건강하고 풍만해서 엉겅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말을 한다. 그의 성희롱적인 발언을 듣고는 열불이 난 채로 귀가한 나는 얼마 후 정말 세실리아를 찾아간다.


나는 오랜만에 재회한 그녀의 안부를 확인하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마치고, 세실리아로부터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냉정한 마지막 인사를 듣는다. 참으로 쌀쌀맞은 이별이다. 그 일에는 나를 비롯하여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원인을 제공했다. 누구도 세실리아를 알아주려 하지 않았다. 넌더리가 날 정도로 엉겨 붙는 그녀를 모두가 기피했고,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무도 그녀를 진심으로 궁금해하지 않았으므로.


96~97p - 우리는 늘 취하고 집으로 가지 못하지만 그건 우리가 집으로 가는 길을 모르거나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야. 술을 마시면 마음이 곧잘 파쇄된 얼음처럼 산산조각나곤 하니깐 아무 곳이나 집인가 싶어 그러는 거지.

소설 속의 나는 이 말을 독백한 후 곧바로 미친 소리라고 말하지만, 현실의 나는 소설 속 나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이따금 목적지를 떠올리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냥 어디든 좋으니까 아무 데라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혹은 치욕스러운 상황을 겪었거나 나 자신이 부끄럽거나 수치스럽거나 마음이 너덜너덜해졌을 때는 괴로운 생각을 어떻게든 밀어내고 싶다. 그 감정은 흡사 술을 마시고 취했을 때처럼 다소 몽롱하고 줏대가 없다. 차라리 술주정을 부리고 싶은 날은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아무 곳이나 집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책에 남긴 글 - 세실리아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이름은 성녀를 딴 세례명이었지만, 아무도 그녀를 존중하거나 존경하지는 않았고 '애정결핍인 동생'처럼 엉겨 붙던 그녀를 질색하거나 그녀의 몸을 풍자하듯 입에 올리며 희롱할 뿐이었다. 그녀와 잠시 연애했다던 치운은 세실리아 말대로 쓰레기일까. 그렇다면 세실리아는 치운에게 성폭행 또는 육체적 폭력을 당하거나 그럴 뻔한 후에 동아리를 떠난 것일까. 그 동아리의 회원이자 지금도 인연을 유지하는 '나(정은)'를 본 그녀의 심정은, 자신의 처지와 외로움을 더욱 극명하게 실감하고 인지하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그녀의 외로움과 고통을 알게 된 나는 다시는 그것을 몰랐거나 모르는 척했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죗값일지도, 혹은 그저 인연이 자유연상처럼 이어져 닿고 닿다가 벌어진 참견과 인간관계의 참담한 말로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떠나고 더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추울 때마다 내내 세실리아의 상처와 웃음과 목소리를 기억하리라.




네 번째 이야기는 <반월>. 반달을 뜻하는 단어. 방학을 맞이하여 '나'는 이모가 사는 섬으로 향한다. 휴양이나 여행 목적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애석하게도 나와 가족은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있었고 일종의 도피 겸 은신 목적으로 섬에 들어간 것이다. 나는 단짝 친구에게 "누가 찾아오면 내가 죽었다고 말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 나는 섬에 있는 이모와 가까운 도시에 있는 이모부에게 주기적으로 편지를 썼는데, 이모에게서는 종종 답장을 받았지만 이모부에게서는 한 번의 답장도 받지 못했다.


나는 섬에서 지내면서 근처 리조트의 데스크를 지키는 청년 직원을 만나고 그를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나는 그를 이야기 내내 '애인'이라고 칭하지만 당연히 그는 나의 애인이 아니다. 주기적으로 이모를 찾아오는 매점 남자도 있다. 나(현실)는 처음에는 그가 이모를 흠모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후반부에 가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어떠한 금단 증상에 시달리는 것처럼 초조한 모습으로 이모를 찾아온다.


나는 섬에서 지내던 중 우연히 울리는 집 전화를 받음으로써 이모의 아들, 나의 이종사촌인 '동수'의 존재를 알게 된다. 동수는 나의 이모와 이모부, 그러니까 자신의 부모님이 헤어진 후 줄곧 아버지와 살았고 내가 이모부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사촌인 나의 존재를 알았다. 동수는 이모에게 전화를 걸며 섬 이름을 알려달라고, 이제 자신도 갈 수 있다고 애타게 엄마를 부르지만 이모는 동수에게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고 늘 전화를 끊어버린다. 그리고 나에게도 절대 주소를 알려주지 말라며 뺨을 때리기까지 한다. 이모는 왜 자신의 아들을 그토록 밀어낼까. 그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어쩌면 이모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두고 어딘가로 멀리 떠내려가고 싶었던 게 아닐까 문득 생각했다.


책에 남긴 글 -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왜, 작가는 동수를 아빠를 잃고 엄마에게 거부당하는 불쌍한 아이로 만들었을까. 왜, 작가는 '나'를 학교 왕따, 바보, 미친년으로 만들고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애인을 붙여 주었을까. 왜, 나와 이모는 섬에서 점점 멀어지고 파도 위에서 견디듯이 떠 있었던 것일까.


반월. 반쪽은 빛나지만 다른 반쪽은 어둡고 반쪽은 있지만 다른 반쪽은 없는 달. 반월인 사람은 누구일까. 생각해 보니 엄마와 이모 아니면 나와 동수라는 생각이 든다. 각각처럼 보이나 알고 보면 결국 하나인 것. 그렇다면 사실 누구도 반월이 되지 않는 것일까? 반월은 아무도 아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사랑하기로 한 나의 애인이 빛인지, 주사를 바라며 찾아오는 매점 남자가 어둠인지 따지는 일도 시선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나는 노래 부르며 죽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살아서 돌아가기엔 죽음에 가까운 상태다. 몸은 멀쩡하지만 정신이… 마치 죽고 싶은 사람 같다. 하지만 어쨌든 죽지 않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넘치는 이 밝고 고요하고 숨 막히는 세상 속에서 떠밀려가듯 견디고 있다. 생(生)과 사(死)는 등을 맞대고 있다. 나와 이모에게는 어느 쪽이 생이고, 사였을까.




다섯 번째 이야기는 <고기>. 이 책에서 가장 섬뜩한, 장르를 따지자면 호러에 가까운 이야기라고 느꼈다. '그녀'는 직장을 다니는 대신 일곱 살짜리 딸을 돌보는 일에 모든 시간을 쏟는다. 남편은 다니던 회사가 어려워진 후 '현정 고모'라는 사람의 지시를 받아 늦은 시간까지 이런저런 일을 하며 돈을 벌지만 집은 경제적으로 점점 어려워지기만 한다. 그녀에게는 부모님이 있으나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그녀와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했고, 지금은 당뇨 때문에 시력을 거의 잃은 데다가 발가락까지 까맣게 곪아가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속을 파헤치면 참담하고 개운하지 못한 현실이다.


최근에 그녀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마트의 정육팀장인 남자다. 그녀가 친정집에 가지고 간 고기가 상해 있었는데, 라벨을 뜯어보니 그 밑에는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라벨이 붙어 있었고, 그녀가 본사에 항의하자 고기를 판 정육팀장이 자신과 직원이 해고되게 생겼다며 그녀를 따라다니며 선처를 빌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할 말은 다 끝냈고 절차대로 진행하라며 남자의 사과를 거부하고,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찾아 굽신거리며 자비를 구걸한다. 그마저도 후반부에는 날 선 본모습이 드러나버리고 말지만.


그녀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건지 알 수 없는 남편이 집에 두고 간 자루에 핏물이 배어 나온 것을 발견한다. 두려워진 그녀는 어떻게든 그것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해 자루를 가지고 바깥을 돌아다닌다. 남편은 멧돼지를 잡으로 갔다고 했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멧돼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정육팀장인 남자를 만난다. 그는 그녀 대신 자루를 풀어 안을 들여다보고는 말한다. "고기네요, 사모님."


이야기의 마지막 대사다. "그냥 고기일 뿐이에요."


책에 남긴 글 - 호러 단편소설 같다. 남자가 말한 '그냥 고기'가 죽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은 살인 청부업자처럼 의뢰를 받고 도망친 사람을 잡아 죽인 것이라고. 멧돼지 한 마리에 천만 원이나 받을 리는 없을 테니까.


어린 시절부터 폭력을 행사했지만 이제는 눈이 멀고 발가락이 썩어가는 아버지, 정체 모를 일을 하면서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한 고모의 지시를 따르기만 하는 남편, 경제적 어려움과 정서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애써 다 괜찮을 거라고만 생각하는 그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딸, 그런 딸을 어수선하고 불안한 친정집에 맡기고 남편과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는 그녀, 그녀를 따라다니는 정육점의 남자, 가장이자 한 사람인 남자… 인간이 그저 고깃덩어리라면, 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도 그저 고기일 뿐이다. 고작 고기일 뿐인데 왜 그리도 집착하느냐는 말이 사람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순식간에 그저 고기로 함락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삶과 자녀의 존재를 늘어놓으며 선처를 요구했던 한 남자로 인해. 다음에 고기가 될 인간은 누구인가? 고기가 되지 않을 사람은 누구인가?




여섯 번째 이야기는 <개를 기다리는 일>. 외국에 나가 있던 '그녀'가 급하게 한국에 들어온 이유는 어머니가 '개'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개는 이름이 개다. 개를 개야, 라고 부르다니. 멍멍이도 아니고 개라니. 고양이는 고양아, 라고 부를 수 있어도 어쩐지 개는 개야, 라고 부르기가 어렵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강아지야, 그렇게 부르면 조금은 유순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녀와 어머니는 어머니가 개를 잃어버렸다는 공원 입구에 차를 세우고 교대로 차를 지키며 개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누군가가 개로 보이는 무언가가 담긴 영상을 문자로 보내왔고 그녀가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은 없었다. 나타나지 않는 개를 찾고 돌아오지 않는 개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 그녀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역시 화목한 가정은 아니다. 더불어 그녀의 아버지는 가정폭력, 성폭력, 부적절한 여자관계 등 부도덕하고 문란한 일에 얽힌 사람이다. 어머니 또한 의뭉스러운 언행을 일삼아서 이야기가 마치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하나의 함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주체가 그녀를 둘러싼 세계 전체인 것처럼.


마침내 연락이 닿아 만난 영상 제공자는 여학생이었다. 여학생은 그녀의 어머니가 '목줄을 잠시 풀었는데 하필 셰퍼드가 나타나 놀란 개가 도망쳤다'라고 말한 것과 달리, "그 아줌마는 뭔가 무거운 것을 들고 등산로로 갔다. 목줄도 없었고 셰퍼드도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혼자 걸으면서 여학생을 되바라진 계집애가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해서 돈을 얻으려고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그녀의 마음에는 어머니를 향한 의심과 다시는 개를 찾지 못할 것 같다는 절망감이 피어났을 것이다 모든 세상이 회의적으로 보이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녀의 어머니는 개가 죽었다며 미안하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외친다. 거짓말이라고. 다 거짓말이라고.


그녀는 비틀거리며 다가와 자신에게 안기던 개를 떠올린다. 개가 짖은 소리가 들리면 그녀의 표정에는 균열이 생긴다. 마음에 틈이 생기고 그 틈으로 다시 마음이 바스러진다. 그러다가도 전망을 생각한다. 균열과 전망은 공존한다. 그녀가 잃어버린 것은 단지 개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책에 남긴 글 - 개는 그녀에게 일종의 안식처였다. 가혹하고 끔찍한 현실을 잊고 벗어날 수 있는 존재. 개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외국에서 돌아와 몇 주 동안 그곳에서 기다릴 정도로 간절하게 개를 바란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 것일까. 개는 그녀가 바랐던 자신의 강인한 생명력, 또는 세상을 향한 경계심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일곱 번째 이야기는 <우리가 어느 별에서>. 병원에서 일하는 '그녀'는 고아원 ― 책에는 보육원이 아닌 고아원이라고 나온다. ― 에서 자랐다. 고아원은 최근 들어 사정이 어려워지고 수녀님이 편찮으시다며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온다. 그녀는 고아원에서 보낸 시절을 회상하지만 마냥 유쾌하거나 따뜻한 기억은 없다. 냉정하지만 공평한 수녀님 아래에서 자란 시절은 그녀에게 애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내내 고아원이 정말 어려운 건지, 그렇다면 얼마를 보내야 적당할지 계속 생각하고 고민한다.


어느 날 나이 든 환자가 그녀에게 자신의 구두를 찾아달라고 한다. 그녀는 환자의 밤색 구두를 찾아 헤매다가 보관소에서 주인 없이 버려진 구두 세 켤레를 찾는다. 퉁퉁 부운 환자의 발에 구두는 맞지 않는다. 그녀는 환자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따라가고, 환자가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가는 모습을 보고 따라간다. 하지만 옥상에는 환자 대신 그녀와 안면을 튼 병원 도어맨 ― 출입문 가까이에서 손님의 시중을 드는 사람 ― 을 마주친다. 그는 그녀에게 말한다. "도어맨 사무실은 지하 오층에 있는데 그곳에 있으면 인생이 아주 어두컴컴해지는 것 같다. 그럴 때 여기로 올라오면 사는 것도 한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원해서 태어난 건 아니지만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인데 열심히 살아보자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보고 있는 저 별들도 죽고 태어난다."고 말하고, 그녀는 정말 내일이면 사라질지도 모르는 어떤 세계에 대해 생각한다.


202p - 싱싱한 잎들이 엄청난 기세로 자라나 마치 이 별에 그 세계밖에 없는 것처럼 뒤덮던 여름의 옥수수밭도 겨울이 되면 모두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그 순환은 뜻하지 않은 시점에 정지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녀와는 아무 상관 없이.

그녀는 끝내 환자에게 구두를 전해주지 못한다. 구두를 찾는 사람이 다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전히 복잡한 병원 내에서 길을 잃곤 한다. 위치를 가늠하는 그녀에게 환자들이 지금 어디 와 있는 거냐고 물으면, 그녀는 때로는 그 답을 알았고 때로는 몰랐지만, 여전히 그녀는 환자들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 간호학원을 갓 졸업한 사람을 뜻하는 에메랄드빛 유니폼을 입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 겨울의 어느 날처럼 어딘가를 향해 여전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실이라는 문장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책에 남긴 글 - 별은 무엇일까 어디에 있을까. 별은 폭발하여 죽는다. 별은 지구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기에, 별빛이 지구에 도달하는 데까지 무려 수만 년이 걸리기도 한다. 피라미드가 세워질 때 폭발한 별의 빛과 에너지가 어젯밤에 겨우 우리 눈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녀는 별빛처럼 희미한, 눈에는 보이지만 닿을 수는 없는 공평한 사랑과 무관심 속에서 자랐다. 그리고 고아원에서 나온 지금은 작은 방에서 희미한 별과 별보다도 밝고 선명한 도시의 불빛, 많은 집들의 형광등 빛을 바라보고 산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환자들 틈새. 그곳에서 그녀가 무엇을 원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랑을 원했을까. 그녀는 사랑을 하거나 받고 싶어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쓸쓸하고 허한 마음을 지나온 과거에 투영하여 현재로 끌고 온다. 그녀에게 별은 헛된 희망일까. 혹은 지금 당장이라도 행할 수 있는, 수녀님 따위는 두렵지 않은 성숙한 자유와 빛의 가닿음일까. 어쩌면 그녀는 아직도 그 고아원과 수녀님의 목소리에서 나오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별이 어디에 있는지, 언제 폭발하는지, 이미 죽은 게 아닐지 또한 나는 모르겠다.




여덟 번째 이야기는 <보통의 시절>. 책의 중심인물은 네 명의 남매, 화자는 그중 막내인 '나'이다. 나는 첫째인 큰오빠를 마귀, 악당, 괴물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회고하는데, 이는 첫째인 그가 어릴 때부터 동생들을 심하게 폭행하고 학대했기 때문이다. 공부방을 운영하는 나는 공부방 첫 졸업생인 '상준'과 적당히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낸다. 그리고 그와 동행하여 나는 큰오빠와 작은오빠, 언니를 달갑지 않은 재회를 한다.


큰오빠는 말한다. 우리 김대춘을 만나러 가자고. 당시 노숙자였던 김대춘은 사 남매의 부모님이 운영하던 목욕탕 보일러실에 불을 질러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만든 흉악한 범죄자로, 남매에게는 불행의 기원과도 다를 바 없는 인물이다. 그리고 큰오빠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동생들이 김대춘에게 '우리가 널 죽이러 가겠다'라는 카드를 쓰도록 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는 김대춘을 향한 증오, 원망, 복수심을 품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사실 나는 부모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을뿐더러 김대춘을 향한 특별한 원한 또한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큰오빠가 품은 살기 어린 감정을 어설프게 흉내 내듯 전달받았던 기억만이 전부다. 함께 김대춘을 만나러 가자는 큰오빠의 말에 '혼자서 가면 되지, 왜 우리더러 가자고 해?'라고 생각하며 투덜거리기도 한다. 어쨌든 나를 비롯한 남매들은 김대춘을 만나러 간다. 김대춘이 사는 일산의 아파트에 가서, 어쩌다 보니 동행한 상준이 배달원 행세까지 하면서 김대춘의 집에 쳐들어간다. 하지만 막상 이렇다 할 복수는 하지 않는다. 무단 침입을 강행했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엎드려 벌벌 떠는, 노쇠한 김대춘의 주변을 서성거리며 어설프게 분노를 표출할 뿐이다. 마치 이다음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듯이. 막상 원수를 마주하자 생각보다 싱겁게 느껴지는 감정이 당혹스럽다는 듯이.


김대춘은 자신이 불을 지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보일러실에서 잠을 자다가 더럽다고 자신을 목욕탕에 받아주지 않는 게 괘씸해서 보일러만 끄려고 했다고. 자신도 왜 불이 났는지는 모른다고 말한다. 그렇게 김대춘의 집에서 쫓겨나듯이 나온 남매들은 카페로 향한다. 그동안 동생들을 지배하고 모든 분노와 원망을 담당했던 큰오빠는 더는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한다. 그들은 조금은 심심하게, 엉성하게 복수도 아닌 복수를 행하고 와서는 이것이 별거 아닌 해프닝이었다는 듯이 행동한다. 그것을 잊지 못하겠다고 말한 사람은 상준밖에 없다. 그는 누가 제일 나쁜 놈인가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허허실실로 시간이 지나간다. 나는 마음 한편에 이는 불안을 꺼뜨리며 커피와 추로스를 먹는다.


책에 남긴 글 - 원망, 공포, 슬픔, 두려움, 우울, 수치, 자괴감, 증오, 혐오… 삶에 그림자를 만들고 이내 울퉁불퉁한 자갈을 마음에 뒤엎는 감정과 순간이 있다. 그것들이 이내 힘을 잃고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지는 것은 그저 뇌의 망각일 뿐일까. 때로는 깨달아야만 끊어낼 수 있는 존재도 있다. 그건 착각이거나 몽상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자신의 죄를, 죄책감을, 모든 잘못을 망각한다. 마치 오래전이라서 지워진 기억처럼. 과연 그런 것들을 시간이 지났다고 희미해질 수 있는가. 100년 전에 일어난 민간인 대학살은 옛날 일이라는 이유로 모두가 잊어야만 하는가? 가해자는 사라지고 피해자만이 남는다. 이것은 기억하는 피해자가 잊히는 아픔을, 그저 무책임과 안전하다는 착각 너머에서 관조하는 이야기일까.




마지막 아홉 번째 이야기 ― 솔직히 나도 단편이 아홉 개나 되는 줄 몰랐다. ― 는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건설회사에서 일하며 현장 일꾼들과의 갈등이 끊이지 않던 '그'는 결국 직능계발부로 발령이 난다. 그는 직능계발부로 차출되어 회사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과 동조하거나 노조 사무실에는 가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할 일을 한다. 그중 무뚝뚝하고 신경질적인 그가 하는 일 중 하나가 '고양이 탐정'이다. 집을 나간 고양이를 찾아 주는 일. 그는 고양이를 잃어버렸다는 남학생을 만나 고양이를 찾는다. 남학생은 학교 부적응으로 등교를 거부 중이고, 히어로 피규어 모으기를 좋아하며, 집에 돈은 많지만 어쩐지 나가 하나가 빠진 것처럼 어리바리하게 군다. 그는 그런 학생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쨌든 집을 나갔다는 벵골 고양이를 찾는다. 고양이를 잃어버린 사람이 아닌, 온전히 낯선 바깥세상에서 무서워하고 있을 고양이를 위해서.


남학생의 이름은 '순태'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고양이 이름으로 착각했고, 배관실에 숨어든 고양이를 순태라고 생각해 이름을 부르지만 바깥에서 진짜 순태가 대답하는 바람에 고양이를 놓치고 ― 다만 처음부터 없던 것일 수도 있다. ― 순태에게 크게 화를 내고는 돌아온다. 그는 산으로 간 고양이가 굶어 죽거나 물려 죽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지만 순태는 태연하게 말한다. 도시 고양이들은 자기들끼리 군집해서 살기도 한다고. 다 죽는 건 아니고 집을 나가서 그렇게 새 삶을 산다고.


평생을 혼자 산 그는 우울감과 알코올에 젖어 자살을 시도하곤 했으나, 그때마다 자꾸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훼방을 놓아 실패했다. 그리고 십오 년 전에는 죽으려고 결심한 날에 길고양이가 그가 사는 집 마당에 새끼를 낳는 바람에 죽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고양이들과 함께 산다. 그가 우연히 공원을 돌던 사장을 만나 사장이 그에게 직능계발부의 책임자 자리를 줄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돌아오면서 자신이 직능과 계발로 몇 명을 여기서 내보내게 될지 생각한다. 그렇게 나간 사람들은 어떻게 될지, 살 수 없게 되는 건 아닐지 생각한다.


그는 해고자가 설치하려다가 포기하고 두고 간 듯한 현수막을 발견하고 문득 그 현수막에 쓰인 글씨가 읽고 싶어서 굴뚝으로 가는 철제 사다리를 올라간다. 그렇게 그는 굴뚝을 올라간다.


책에 남긴 글 - 고양이는 그가 살게 된 이유다. 거창한 삶의 의지는 아니고, 그저 말 그대로 살아 있게 된 이유. 그런 그가 예민하고 신경질적이고 무뚝뚝하고 우울한 인간으로 살면서 고양이를 찾아다니는 것은 일종의 자기 연민이나 간접적 구원 따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고양이는 사랑스럽지만.) 고양이를 찾는 것처럼 삶의 이유를 되찾고 싶어서. 혹은 상실했던 생의 감각이나 생존감을 느끼고 싶어서. 그러나 이제 그에게 그런 것은, 더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이물스럽게 변하는 세상


권여선 작가는 이 책을 읽은 후 "평범한 세상이 김금희의 문장을 통과하면 우리가 매일 맞이하는 정오처럼 익숙하면서도 이물스럽게 변한다"고 평했다. 이 문장은 작품과 잘 들어맞는다. 소설 속 세계는 분명 현실이지만 어쩐지 내가 사는 세상과는 다른 차원처럼 느껴졌다. 이질적이고, 익숙하지 않고, 평소에는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했던 어떤 감각이나 뇌세포가 자극을 받은 것처럼 새로이 깨어나는 느낌. 그래서 평소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끼고 하지 않았던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르곤 했다. 대부분 불유쾌하고 어두운 쪽이었지만, 그 이질적인 긴장은 캄캄한 어둠보다는 환한 낮에 가까웠다. 버려진 공터처럼 순간 마음이 섬뜩해지는 정적과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데 미묘하게 생기가 없는 듯한 햇볕이 존재하는 낮.


이 책을 '어렵다'라고 느낀 이유는 책 속 인물들의 시선이나 감정선이 모두 나와는 결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현실이 무감각해질 정도로 체념하거나, 자각하지 못한 절망으로 무너지거나, 아주 철저히 혼자가 되거나, 증오나 그리움이나 죄책감 같은 감정을 내 안으로 흡수해 체득한 경험이 없다. 그렇기에 모든 생에 통달한 것처럼 초연하게 굴다가도 갑자기 불완전하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는 소설 속 인물들을 나와 조금은 먼 존재라고 생각했다. 가상의 인물이지만 동시에 현실에서도 존재할 법한 그들. 그들과 나는 아주 멀리 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아주 가까이 존재하다 못해 살결이 맞닿기도 한다. 그들이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내가 완전히 거부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소설은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 손을 집어넣고 슬그머니 헤집거나, 내 속에 무언가를 슬쩍 놔둔 채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서.


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아는 세계, 내가 경험한 세계가 하나씩 늘어난다고 믿는데, 그럴 때마다 책 한 권 읽은 바보가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는 말도 떠오른다. 허접한 사상과 엉성한 감상력으로는 무엇도 제대로 느끼거나 생각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내가 무언가에 아주 깊이, 제대로 빠져들어서 모든 이야기를 흡수하는 천재가 될 거라는 기대 또한 전무하기에 나는 최대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조금 더 많이 생각하려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하고, 한 움큼 더 깊이 짚어보는 것. 그러면 세상을 느끼고 자각하는 힘도 조금이나마 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다.


나의 세상과 내면을 이물스럽게 만드는 책을 더 많이 접하고 싶다. 중고등학생 시절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싶은 이유도 그것이다. 예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갔던 것을 새롭게 찾고 싶다. 당시에는 내게 전혀 찾아오지 않았던 감정이 피어나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몇 년 뒤에 읽으면 또 감상이 달라지고, 마음이 달라지고, 시선이 달라지는 일들. 그것이 문학을 비롯한 많은 예술과 작품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시간에 편승해 변화하고 성장하며 살아가는 인간이 받는 놀라운 선물일 것이다. 이 책은 훗날 나에게 어떤 책으로 다가올지 궁금하다. 어려운 책이었던 만큼 더 큰 변화가 있을지도 모른다. 뒤늦게 읽은 책들이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던 순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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