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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Jul 10. 2024

마음이 불어오는 곳

김창완 著,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에세이]


- 제목 :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 저자 : 김창완

- 출판사 : 웅진지식하우스




이 책의 주제곡을 선정한다면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하겠다. 안온하고 정겨운 정서와 밝은 흥취가 묻어나는 노래. 종이책보다 밀리의 서재 이북으로 먼저 읽었는데, 전자책이 정식 발행되기도 전에 자신의 서재에 이 책을 담아두고 기대감을 표하는 댓글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김창완이라는 사람을 잘 알지는 못한다. 그가 형제들과 함께 구성하여 데뷔한 록 밴드 '산울림'도 나에게는 텔레비전에서나 몇 번 들어봤던 이름이고, 아무래도 싱어송라이터보다는 배우라는 이름에 더 가까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그래도 산울림은 우리나라 대중가요계와 록 밴드 역사의 거장으로 여겨지는 밴드라니, 산울림과 함께 자라고 그들의 노래를 즐긴 사람들이 알면 놀랍고 한탄스러울 일이다. 나 또한 지금 초등학생 정도 되는 아이들이 소녀시대나 엑소를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깜짝 놀라며 나이 수십 살 먹은 사람처럼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구나….'라며 우스운 한탄을 한다. 아직은 젊다 못해 어리다는 이야기도 많이 듣는 나이지만.


이 책은 두말할 것 없이 따뜻한 이야기다. 마음이 차갑거나 외로움에 시큰거릴 때, 뜨끈한 밥의 뭉근한 단맛이나 포근한 목소리를 느끼고 싶을 때면 이 책을 펼쳐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막연한 낙천이나 낙관만을 늘어놓은 책이었다면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소 뻔한 위로의 말과는 확연히 다른 깊이와 선명함이 있다. 수십 년 동안 많은 만남과 이별을 겪고, 수많은 감정과 고뇌를 거친 후, 사랑과 미움과 기쁨과 슬픔 사이에서 살았던 어느 한 사람의 애정 어린 시선이 담긴 기록이다. 어쩌면 일종의 회고록이나 자서전처럼 보인다.


저자는 십수 년 동안 라디오를 진행한 만큼 많은 이의 사연을 보고 그들의 마음을 전달받았을 것이다. 그 마음이 조금씩 모여 하나의 길과 숲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내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걸었던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알고, 새로운 풍경을 보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별세계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 김창완 씨의 말대로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 대신 그 마음을 넓혀서, 조금 더 여유롭게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좋을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쨌든 내 마음과 시선이 변해야 한다. 마음이 넓고 깊어지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인간이 될 뿐이다. 나의 생각이 정답은 아니되 삶을 만드는 마음이자 지금 나의 상태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좋은 문장과 안온한 이야기, 그리고 인생을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선물 상자처럼 가득하다. 언제나 외부의 것에 오염되지 않는 맑은 눈과 심장을 가지고 살아가자, 그렇게 한 번 더 다짐했다.





좋은 문장을 조금씩 모아


34p - 가만 보니까 걱정이 안개를 닮았더라고요. 코앞에서 눈을 가리지만 한 발자국만 내딛어도 사라져요. 걱정거리가 있으면 없는 셈 치고 발걸음부터 때세요. [걱정은 안개를 닮았습니다 中]

걱정이 불안으로 번져서 나를 막아서거나 일을 그르친 적은 많다. 그렇지만 여전히 무언가를 시도할 때나 새로운 곳으로 떠날 때는 반사적으로 걱정부터 앞선다. 잘 될 수 있을까, 잘할 수 있을까, 안 되면 어떡하나, 이런 걱정만 하고 있으면 어떡하나…. 하지만 걱정만 해서는 결국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내가 하는 걱정의 대부분은 나 자신을 불신하거나 지나치게 먼 곳까지 손을 뻗어서 생겼다는 사실을 안다. 인사이드 아웃의 불안이처럼. 그나저나 불안이는 감정 본부에 휴식 공간을 만들어서 불안해지면 기쁨이의 응원과 조언을 받는데… 나는 마음이 복잡할 때마다 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곁에서 매번 붙잡아 주는 사람도 없으니, 그 점은 감정들이 부럽다. 내 머릿속에도 부럽이가 있나. 물론 당연히 있을 것이다. 하하하.



36p -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사는 게 별거냐? 후회할 수도 있지. 괜히 그랬구나 싶은 일도 할 수 있고 사랑이 떠나갈 수도 있지. 안 그러면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사랑 노래가 생기기나 했겠나?' [사는 게 별거냐 中]

불안, 걱정, 고뇌, 우울이 존재하는 삶을 유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좋은 태도는 수용이라고 생각한다. 잊을 만하면 자꾸만 머릿속을 파고들어 수치심과 후회를 불러들이는 흑역사도 '이미 지나간 일인데 어떡하나, 그땐 뭘 몰랐으니 그럴 수도 있었으니, 앞으로 그러지 않으면 되지…'라고 달래면서 조용히 쫓아내고, 새로운 일이나 미래를 향한 불안과 걱정과 짜증이 솟구칠 때면 '어차피 닥치면 다 하게 될 일이지. 어쩔 수 없다. 할 수 있을 만큼 하는 수밖에…'라고 진정시켜서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다. 지나간 시간은 이미 내 손을 떠났고, 다가오는 시간은 조금 더 성숙하고 차분한 태도로 임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고 실행하는 게 그나마 나를 가장 위한 일이 아닐까. 그래서 후회 없는 삶을 살자는 좌우명은 세우지 않았다. 어차피 분명 후회하며 살 테니까. 그 후회는 미련한 일이어도 잘못된 일은 아닐 테니.



47p - 학창 시절엔 종종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입맛 없으면 밥맛으로 먹고, 밥맛 없으면 입맛으로 먹으라고요. 먹는 것만 그런 게 아니죠. 꼭 살맛 나야만 사는 것도 아닙니다. 살다 보면 그게 인생의 맛이죠. [꼭 살맛 나야 사는 건 아닙니다 中]

인생의 맛이란 무엇일까. 아리송하지만 알 것도 같다. 힘겨운 하루와 지루한 일상 사이사이에 조금씩 들어 있는 작은 기쁨이나 행복이나 만족감 같은 것들. 사랑일 수도 있고 우정일 수도 성취감일 수도 있고, 주말에 늘어지게 자는 잠이나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사람은 즐거워야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잠깐이지만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시간이 나를 또 살아가게 한다.



64p - 인생이 들숨과 날숨 사이에 있다고 합니다. 숨 들이마시는 것도 일이고 내쉬는 것도 일이지요. 그러니까 계속 일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 사이에 우리의 삶이 있다니까. 오늘도 틈틈이 살아가는 수밖에요.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지 中]

마땅한 직업은 없더라도 '일'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공부든 취업 준비든 소통이든 구상이든 창작이든, 하물며 산책하는 것도 일이고 집안일도 엄청난 일이며 아무것도 안 하는 일조차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만큼 마음이 고단해지겠지. 틈틈이 살아간다는 말이 와닿았다. 어쨌든 하루하루 틈틈이, 이러쿵저러쿵 말은 많아도 여하튼 살아가고 있구나. 나는 언제나 일을 하고 살아가니까 지칠 수밖에 없고 그러니 쉬어야만 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67p - 욕망은 사치품이에요.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습니다.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지 中]

욕심을 조금은 덜어내고 살 필요가 있다. 가질 수 없는 것까지 욕심을 내고 가져서는 안 되는 것에도 욕망을 품으니 사람이 망가진다. 많은 것을 주렁주렁 매달고 살면 걷기만 더 힘들어지는 것 같다.



71p - 저는 아이들은 다 천진하고 사랑스럽기만 하다는 데 동의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른들이 다 지혜롭고 심지가 굳다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흔들리는 어른의 모습도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준비된 어른이 되기보다는 늘 새로운 어른이길 바랍니다. [준비된 어른보다 늘 새로운 어른이기를 中]

어른스럽지 못한 어른들을 얼마나 많이 목격하며 자라왔는가! 나는 저렇게 되면 안 되겠다 생각한 적도 많지만, 아이들 눈에는 나도 엄연한 어른일 텐데 전혀 어른 같지 않다. 아이들이 다 천진하고 사랑스럽지 않다는 말에도, 어른들이 다 지혜롭고 심지가 굳지 않다는 말에도 동의한다. 어떤 시절이든 배려심과 도덕심은 부족하고 기분 따라 감정적으로 행동한다. 어린 시절에는 뇌가 발달하지 않아 그럴 수 있었다고 해도, 어른이 되어서는 뇌도 다 자랐고 어느 정도 쌓은 지식과 경험도 많을 테니 너무 아이처럼 굴지 않았으면 한다. 어른이라는 이름에 부담감을 가지기보다는 그냥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자'라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112p - 눈물이 마른 세상이 무섭지 눈물이 피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눈물이 참을 일은 아닙니다 中]

문득 MBTI(성격유형) 검사를 할 때 나왔던 항목이 기억난다. '사람들이 감정보다 이성을 중요시했다면 더 나은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항목이었는데 ― 감정과 이성의 자리가 반대였던가? ― 여전히 그 답은 확실하지 않다. 감정과 이성 중에서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비슷한 농도와 비슷한 양으로, 적절히 균형을 유지해야만 더 나은 세상이 되는 게 아닌가. 요즘에는 감정을 먼저 내밀어야 할 일에 쓸데없이 이성을 앞세우고, 이성으로 판단해야 하는 일에는 갑자기 기분과 감정이 끼어든다는 감상을 자주 받는다. 어쨌든 결정권자가 어떤 것에 더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판단과 결과가 천지 차이, 천태만상으로 달라진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있다. 연민과 동정이 사라진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114p - 가로등 빛이 떨어지는 곳은 더 밝지만, 그 빛 때문에 못 보던 빛은 만연한 빛 번짐이 사라지고 나서야 눈에 들어옵니다. 가로등 밑처럼 내가 보고 있다고,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못 보고 넘어가는 게 없지 않겠다 싶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조용히 쓸어주는 사람 中]

눈을 가리는 것은 자만이다. 자만은 자신감이나 자긍심이나 자부심과는 다르다. 정도를 지나쳤거나 분수에 맞지 않는 감정이다. 다 안다고 생각했다가 뒤통수 맞고 후회한 전적이 상당하다. 그러면서도 자꾸 자만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나의 그릇이 그 정도라는 의미가 아닐까.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일, 충분히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너무 편안하게 생각해 함부로 대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나의 눈을 가려서 정작 봐야 하는 것을 지나치게 만들 수도 있을 테니.



121p - 마음도 저축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평상시에 조금씩 모아놓았다가 성질나거나 힘들 때 꺼내 쓰는 거지요. 그런데 그럴 수가 없으니 마음이 갑옷을 입고 점점 딱딱해져만 가나 봅니다. [사랑이 뭐 대단히 뜨거워야 하나 中]

마음도 저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이 여유롭고 너그럽고 풍족할 때는 세상이 참 좋아 보이는데, 순식간에 움츠러들고 쪼들리고 생채기가 날 때는 그냥 나 빼고 다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솟구친다. 그럴 때 넉넉히 모아둔 마음을 꺼내서 조금씩 먹으면서 아량이 넓어질 수 있다면, 생각이 깊어질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일도 없겠구나 싶다. 물론 그럴 수 없으니 나는 또 최선을 다해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125p - 차 막히고, 애인 기다리고, 슈퍼마켓 가서 줄 서고, 영화 관람 기다리는 게 버리는 시간이 아니에요. 진짜 버려지는 시간은 누구 미워하는 시간입니다. [사랑이 뭐 대단히 뜨거워야 하나 中]

심수봉의 백만송이 장미가 떠오른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유지혜 작가가 쓴 동명의 책도 있다. 어찌 되었든 미워하는 마음은 미워하는 사람을 괴롭게 만든다. 미워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미움이라는 감정 자체는 마음을 곤란하게 만든다. 쉬지 않고 표면에 마찰하며 상처를 잔뜩 남긴다. 용서가 최고의 복수라는 말은 이해하면서도 공감하지 못한다. 차라리 복수가 최고의 용서라면 모를까. 다만 의미도 가치도 없이 누군가를 미워하는 시간은 내 삶에서 가장 무의미한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139p - 아름다워서 추억이 아니라 추억이라서 아름다운 겁니다. [마음이 다가갈 틈 中]

아름다운 삶은 살기 어려우니, 대신 추억이라도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억할 만한 시절과 기억에 남기고 싶은 순간이 많아질수록 삶은 윤택하고 다채롭게 빛날 것이다.



147p - 그러나 사랑과 이별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빛과 어둠은 하나의 짝을 이루고, 슬픔과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독을 견디는 일 中]

이 문장을 읽고 전에 독후감을 썼던 문진영 작가의 소설집 <최소한의 최선>이 떠올랐다.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상에 빛과 그림자의 간극은 한 뼘 차이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책.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이별은 예견되어 있고, 빛이 나타나는 순간 그림자가 진다. 무언가를 배척하거나 하나만 극대화하여 바라볼 수는 없다. 인생이 희로애락이듯 사람의 마음도 수십 가지의 감정과 감상이 뒤섞여 만들어진 존재이므로, 나는 분명 나의 감정을 인지하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을 것이다.



241p - 제게 몇 시간, 며칠, 몇 달을 덤으로 준다고 해도 제 인생을 바꿀 만큼 멋진 일을 해낼 자신이 없거든요. 가는 해 잘해서 보내고, 오는 시간이나 헛되이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해봅니다. [희망이 뭐 대단한 데 있는 것도 아니고 中]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어떤 일을 제대로 해내지 않은 적이 많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전부 비겁한 핑계에 불과한 마음이다. 지금 못 한다고 손 내젓는 일을 몇 개월 지났다고 갑자기 할 수 있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 년을 주어도 해낼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그럴 자신도 없다. 지금 하지 않은 일은 미래에도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시간이 없었다는 둥 여건이 부족했다는 둥 불평불만 늘어놓는 것은 꼴 보기 싫은 모습이다. 지나간 날이든 오는 날이든 최대한 잘 갈무리해서 보내는 것. 그것만이 내가 나를 위해, 나의 하나뿐인 시간과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전부다.



247p - 나도 미리 가 앉아 있는 빈 의자가 돼야겠다 싶었습니다. 누가 와 앉을지 모르는 빈 의자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쉴 곳만 찾아다니기보다 쉴 곳이 돼보겠다 하는 것도 재미있지 않겠어요. [빈 의자로 살아보는 것 中]

항상 타인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원하면서 살아왔는데, 그 대상을 나 자신으로 돌리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에게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그것을 행하거나 베푸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 나는 내가 원했던 것을 자연스럽게 손에 넣었거나, 내가 무엇을 원했는지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건 나에게 큰 가치가 없었다는 뜻이다. 내가 욕심을 내고 원했던 것 중에서는 의외로 그만큼 가치가 없는 게 많았다. 남에게 의지하거나 기대기보단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255p - 이 아침이 누군가에게는 슬픈 아침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누구나 겪게 될 아침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겪게 될 그 아침 中]

지인의 갑작스러운 모친상으로 장례식장에 문상을 갔던 저자가 쓴 글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고, 어떻게 살든 종국에는 반드시 죽는다. 누가 먼저 떠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살아 있을 때 잘해야 후회가 없다는 말은 몇 번이나 들었지만, 사실 후회 없이 보내는 죽음이나 미련 없는 이별은 썩 많지 않을 것이다. 엄마와 아빠도, 형제들도 언젠가는 죽어 세상을 떠나고 나를 떠나겠지. 온 세상에 비가 내리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것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조금은 위안이 된다.



291p - 근데 오늘 아침의 인자한 햇살을 보니 어제 가을 바람이 가져가고 싶었던 게 혹시 '사람들 사이의 모진 마음' 아니었나 하게 됩니다. 마음을 가을볕에 넣어놓고 싶습니다. [오늘은 낙담하기에 이르고 中]

동화 중에는 그런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축축하게 젖은 마음을 꺼내어 세탁기에 돌리고, 햇볕에 바싹 말리고, 다리미로 주름 없이 펴서 다시 넣어두는 이야기. 마음을 꺼내어 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얼룩도 지우고 깨끗하게 빨아서 보송보송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귀퉁이가 마모된 마음을 잘 다듬어서 예전보다 더 동그랗고 좋은 모양으로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식물이 광합성을 하는 것처럼 사람도 피부로 햇빛을 흡수하면 좋겠다. 허기도 채우고 마음도 채우는 것이다.





안온한 이야기를 읽으며


차분한 말과 진심이 담긴 글에는 안정감이 있다. 흔들리지 않는 방법을 아는 자의 굳은 심지와 유연한 시선, 사랑할 줄도 알고 비판할 줄도 아는 현명함은 나이를 불문하고 부러운 점이다. 이 책은 그런 것들이 선선하게 느껴진다. 화창한 가을날 아침에 읽기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나는 이 책을 형광등 불빛과 에어컨 냉기가 가득한 한여름 사무실에서 몰래 읽었으므로 이 또한 재미있는 점이다. 좋은 책은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좋은 냄새를 품고 있다.


머리가 무겁거나 마음이 복잡한 날에는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좋아하던 책이라도 책장 하나 넘겨서 읽을 힘조차 없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 한두 장씩, 하루에 글 하나씩 틈틈이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구태여 힘을 얻지는 않더라도 뚫린 구멍으로 숭숭 빠져나가는 기운은 막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왠지 작가가 이 글을 쓰면서, 청취자들에게 매일 첫인사로 건네는 라디오 오프닝 멘트를 쓰면서 어떤 마음이었을지 어렴풋이 상상이 간다. 조금이라도 예쁘고 좋은 말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나태주 시인의 시집이 떠오른다. 가장 예쁜 생각을 너에게 주고 싶다. 가장 부드럽게 다듬어진 나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은 것처럼.


유독 기억에 남는 글은 '새들도 외로운 건 질색하는구나'라는 제목의 글인데, 잎이 하나도 없는 나뭇가지에 앉은 새를 보며 춥겠다, 생각하고 있을 때 다른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딱 붙어 앉았다는 글이다 멀리서 봐도 둘이 꽁냥꽁냥하는 게 보여서 새들도 외로운 건 질색하는구나 싶었다는 이야기. 작고 통통하고 동그란 참새들이 몸을 밀착한 채 깃을 비비는 모습은 괜히 염장질 하는 커플 같기도 하다. 어쨌든 귀여우니까 넘어가 준다. 어떤 동물이든 외로움을 느끼며 살지 않을까 싶다. 인간은 외로움에 아주 예민한 존재이다. 곁에 사람이 없는 날에는 책을 곁에 두고 문장을 친구 삼아, 활자를 노래 삼아 끌어안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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