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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Jun 19. 2024

'살아 있음'의 빛과 잔해

문진영 著, <최소한의 최선> [단편소설집]


- 제목 : 최소한의 최선

- 저자 : 문진영

- 출판사 : 문학동네




애정하는 책 중 하나이다. 특히 이 책을 계기로 나는 책의 비하인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구매할 때 일정 포인트를 지급하면 '코멘터리북'이라는 것을 준다기에 이게 뭔가 싶어서 별생각 없이 선택했는데, 작가와 편집부의 인터뷰와 작가의 출간일기 등이 수록된 코멘터리북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대략 90페이지 정도에 마지막은 수록작 중 하나인 [변산에서]의 전문이 실려 있으므로 상당히 알찬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수록작 본문보다도 더 집중했던 것 같다. 하마터면 이렇게 흥미로운 작품 비하인드를 읽지 못하게 될 뻔했다니! 포인트로 코멘터리북을 구매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계기로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구매할 때마다 사은품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작가 인터뷰 등이 수록된 비하인드북이 있으면 무조건 선택했고, 정작 본문이 수록된 책은 없는데 비하인드북만 가지고 있는 책도 있다. 이것들은 추후에 본래 책까지 구매하여 읽을 예정이다. 작품 비하인드는 작가가 글을 쓸 당시 했던 생각과 의도, 글을 쓰며 느꼈던 마음까지도 세밀하게 알 수 있기에 글에 더욱 풍부한 서사와 감정을 불어넣는다는 생각이 든다. 잔뜩 몰입했던 작품에서 한 걸음 벗어나 외부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도 의외로 재미있고. 책을 사면 저절로 쌓이는 포인트로 살 수 있으니 손해라는 느낌도 안 든다. 왠지 홍보글이 된 것 같지만, 내게 1원 한 장은 물론 혜택을 주는 온라인 서점은 이 세상에 없음을 밝힌다. 구매 금액이 일정 수준으로 떨어지면 나의 등급도 순식간에 떨어진다.


이 책을 읽고 문진영이라는 작가에게 관심이 생겼다. 2021년 김승옥문학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 <두 개의 방>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 작품은 아직 읽지 않았다. 나에게는 2019년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밖에 없다. 읽으면서 '이 책은 글이 전부 무겁고 묵직하네'라고 생각했던 작품집. 벌써 2024년이지만 나의 시간은 5년 전에 머무르고 있다. 나중에 여유가 좀 생긴다면 2020년과 2021년 수상작품집을 사서 읽을 생각이다. 우리나라에는 권위 있는 문학 공모전이나 문학상이 많은 편인데, 매년 출간되는 수상작품집은 등단 작가를 목표로 하는 작가 지망생들에게는 필수 교재 같은 존재일까? 이 정도는 써야 작가라고 하는구나! 그런 느낌으로. 다만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은 작품도 일반 대중들에게는 혹평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많고 그 반대의 경우도 수두룩하니, 결국 작품의 평가는 개인의 주관과 가치관과 감상이 중심이구나 싶다.


이 책 또한 단편을 하나 읽을 때마다 맨 마지막 장에 감상평을 적었다. 어떤 것은 종이 한 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길다. 물론 상대적으로 짧게 쓴 글도 있다. 맨 마지막에 있는 인아영 문학평론가의 해설은 일부러 읽지 않고 이 독후감을 쓴다. 나는 책 하나를 다 읽으면 2~3개의 독서기록장을 써서 때로는 책 읽는 것보다 독후감을 쓰는 게 훨씬 힘들게 느껴지곤 한다.





누군가의 삶에 대한 이야기


책의 뒤표지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한껏 끌어당겨지고 싶었다. 삶 쪽으로."


수록된 작품 중 하나인 [고래 사냥]에 나오는 구절이다. 말에도 힘이 있듯이 글에도 힘이 있다. 삶 쪽으로 끌어당겨지고 싶다는 글을 읽어서인지 이 책을 읽는 동안, 정말 미묘하게 삶 쪽으로 서서히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미 살아 있고 살고 있으며 시름시름 죽어가는 것도 아닌데, 가끔은 정말 내가 살고 있는 게 맞나, 그런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는 건 버티는 일이고, 버티는 일은 죽고 싶을 만큼이나 힘들고 괴롭고 고달픈 일이라는 걸 깨달을 때마다 점점 삶의 정반대로 떠내려가는 것 같다. 죽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삶도 아닌 것. 눈을 뜨고 있긴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떤 힘겨운 날처럼.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넘어 온몸을 잠식한다 싶으면 책이나 글을 읽는다. 외부에 있는 것들은 모두 차단한 채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유심히 생각하거나 존재도 몰랐던 존재에게 유대감을 가지는 순간을 위안으로 삼는다. 몸은 건강해야 좋고 속은 편해야 좋다. 하지만 건강한 몸도 편안한 마음도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내가 발 벗고 나서서 직접 찾아야 한다. 무엇도 쉽게 오지 않는다. 온 줄 알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홀연히 사라지기도 한다. 이런 삶에는 이런 이야기가 필요하다. 삶에 대한 이야기, 인생의 빛과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가 말이다.


여담으로 이 책의 모든 단편은 화자인 '나'의 일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첫 번째 이야기는 [미노리와 테츠]. 화자인 '나(희주)'가 친구인 '수민'과 일본 여행을 떠났을 때 만났던 부부에 관한 이야기로, 태국 음식점을 운영하던 일본인 부부의 이름이 '미노리'와 '테츠야'였다. 미노리가 부인이고 테츠야가 남편이며 테츠는 테츠야의 애칭이다. 그곳에서 미노리, 테츠와 친해진 나와 수민은 넷이서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종종 연락을 이어가는 등 원만한 친분을 유지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미노리와 테츠는 이혼했고 더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미노리가 둘이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보내오는데, 활발하고 수다를 많이 떨었던 수민이 아닌 비교적 조용하고 차분했던 나에게 연락한 것을 의아하게 여긴다. 그렇게 미노리와 단둘이 만나서 테츠, 수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후 소설은 끝이 난다.


미노리와 만난 나는 왜 나를 보자고 했는지 묻는다. 영어도 한국어도 능숙하지 않은 미노리가 너에게 사과를 빚졌다고 말하며 뒤에 붙일 단어를 고르지 못하고 있을 때,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나도 알아. 우리는 지구의 다른 한쪽을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이지.' 어쩐지 그 문장이 계속 마음에 맴돌았다.


* 책에 쓴 감상문 : 지구의 다른 한쪽을 떠받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타고난 성격이 밝고 영혼이 쾌활한 사람을 바라보는 기분을 어렴풋이 안다. 그것은 신기함이기도 하고, 경외감과 소외감이 뒤섞인 특이한 형태이기도 하다. 나는 평생 동안 결코 가닿지 못할 빛과 에너지의 영역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사람을 보는 기분.


미노리와 테츠는 사랑하는 부부였고, 나(희주)와 수민은 서로의 부재를 상상한 적 없는 소꿉친구다. 분명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소중한 관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결이 다른 부분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노력이나 희생으로도 완전히 맞지 못하는 조각처럼 말이다. 미노리는 테츠에게, 나는 수민에게 이따금 그런 '낯선 어긋남'을 느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고 가까운 사이여서 더욱 도드라졌을 거리감은 훗날 미노리와 테츠의 이혼으로 이어졌다. 물론 비단 그것만이 이별의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얼기설기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면서도 때로는 허탈할 만큼 단순하고 쉽게 파하는 것이 인연이니까.


나(현실)는 희주가 느꼈을 소속감과 외로움을 생각한다. 소속감은 강하지 않고 외로움은 깊지 않다. 억지로 인연을 이어가는 것보다는 흘러가는 대로 가만히 놔두고 관조하거나 체념하는 점이 나와 조금 비슷한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세상은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종종 외롭다. 어떤 세상이든 어떤 집단이든 그렇다. 모든 인연은 소중하고 즐거운 순간 너머로 조금씩 어긋나고 그것을 다시 맞추어가는 과정을 거쳐 제각기 무늬를 만든다.




두 번째 이야기는 [변산에서]. 화자인 '나(희진)'가 오랜 친구인 '민주', 그녀의 초등학생 딸인 '수온'과 함께 해안가로 여행을 떠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민주의 남편이자 수온의 아버지인 '승민' 또한 나와 민주의 친구였는데, 승민은 수온이 갓난아기였을 때 돈을 더 많이 벌어야겠다며 들어간 작은아버지의 건설사에서 과로사했다. 나와 민주는 승민의 죽음이 과로사임을 밝히기 위해, 그것을 인정받기 위해 회사 측과의 기나긴 싸움을 시작하지만, 몇 년 동안 소송전을 이어가다가 끝내 항소를 포기한다.


p59 - 그 애는 고난과 시련이 있더라도 결국엔 착한 쪽이 이기는 거라고 알고 있었고, 우리는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때 가르쳐주지 못했다. 우리가 수온에게 말하지 못한 진실은 그것이었다. 우리가 졌다는 것.

저 '졌다'라는 말이 유독 아프게 느껴졌다. 억울한 사람의 이야기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약한 사람이 법의 보호 아래에서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이라면 참 좋겠지만, 그런 아름다운 세상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억울한 사람은 끝내 죽어서도 진실을 인정받지 못하고, 약한 사람은 강한 자의 압력에 짓눌리다가 세상으로부터 버림 당하기도 한다. 이런 세상에서도 내가 기어코 끝까지 진실이라고 믿으며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책에 쓴 감상문 : 희진, 민주, 승민, 수온. 네 명이 지키던 공간에서 승민이 먼저 떠나고 남은 빈자리는 아마 줄곧, 혹은 평생 그저 빈자리로 남을 것이다. 승민의 과로사에 대한 해명과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며 몇 년 동안 싸웠고, 갓난아기였던 수온이 무럭무럭 자라는 동안 이어지는 싸움은 결국 '착한 쪽'의 패배로 끝났다. 항소를 포기하고 갈비를 먹었던 두 사람은 어떤 심장이었을까. 너무나도 일찍 떠나간 연인과 친구의 억울함을 끝내 풀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가득해 피멍 같았을 마음. 사랑하는 아빠 없이도 아이 다운 아이로 자란 수온을 향한 고마움과 대가 없는 사랑이 가득했을 것이다. 애정과 외로움은 빛과 그림자처럼 공존하는 존재니까. 세 사람의 추억이 떠오를 때마다, 수온의 체온과 따스한 숨결이 느껴질 때마다 떠나간 이의 그리움과 상실감은 바람처럼 불어올 것이다. 눈물로 얼룩진 마음에도 언젠가는 빛이 스며들어 볕이 찾아오기를.




세 번째 이야기는 [오! 상그리아]. 화자인 '나'와 나의 엄마, 나의 외할머니가 등장한다. 참고로 외할머니는 내가 생김새를 고스란히 물려받는 것과는 별개로 핏줄로 이어진 관계는 아니다. 막걸리를 너무나 좋아해서 집에 들어와서 잠드는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았던 나의 외할아버지가 어느 날 데리고 온 갓난아기가 바로 나의 엄마였고, 할머니는 남편이 밖에서 외간여자와 낳은 혼외자 ― 로 추정되는 아이 ― 였던 엄마를 미워하려고 여러모로 노력하였으나, 결국 엄마를 가장 아픈 손가락이라고 여겼고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는 엄마 대신 나를 도맡아 키웠다.


나 또한 외할아버지를 닮은 엄마를 두어서인지 친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할머니는 나의 친아버지로 예상하는 남자 ― 한때 엄마와 사랑의 도피를 떠났던 엄마의 첫사랑 ― 가 있어 엄마를 여러 번 추궁하였으나 결국 확실한 답을 듣지 못했다. 나(현실)는 소설 속 엄마도 자신의 딸의 친아버지를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스페인에서 우연히 눈이 맞아 상그리아라는 칵테일을 함께 마시며 함께 했던 남자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지만, 나의 친아버지는 끝내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끝난다. 어쩌면 이게 더 깔끔한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자주 떠나지만 언젠가는 돌아온다. 나 또한 그런 엄마를 오매불망 기다리거나 구태여 재촉하지 않는다. 홀연히 사라졌다가 돌아오는 엄마로 인해 나는 이별에 상당한 면역이 있다. 어쨌든 엄마는 돌아온다는 믿음, 어쩌면 사랑. 나는 그것이 자신이 삼대째 물려받은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 책에 쓴 감상문 : 사랑, 그중에서도 가족애를 다룬 작품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지만 이 작품은 피와 물의 농도가 같다. 오히려 물이 더 짙고 맛 또한 강하다. 나는 자유로운 엄마로부터 언젠가는 돌아온다는 약속을 받았고, 나의 할머니는 남편이 밖에서 낳아온 (것으로 보이는) 딸을 가장 아픈 손가락으로 여기며 키우고 함께 살았다. 물론 애증의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배우자가 불륜으로 데려온 자식을 친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할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애정과 유대감이란 혈연 관계에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와 엄마와 할머니는 가족이 될 수 있었으리라. 엄마의 친모와 나의 친부는 끝까지 정체불명이다. 나의 친아빠는 여러 추측과 후보 속에서 돌아다닐 뿐, 끝내 미지수로 남지만 그것은 딱히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탄생의 근원 중 하나로 남을 인생의 미스터리 정도일까.


어쨌든 나와 엄마, 엄마와 할머니, 나와 할머니는 갈등을 겪기도 하고 서로에게 말 못 할 불만을 품으면서도 서로를 버리지 않고 사랑했다. 그 형형하고 깊은 마음이 세 사람을 연결시켜 주었다.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 사랑하자."(88p)라는 말이 '피'를 뜻하는 '상그레'에서 따온 상그리아에 가득 담겨 있다. 무엇이든 잃기 전에 사랑하자고.




네 번째 이야기는 [내 할머니의 모든 것]. 화자인 '나'의 엄마는 사십 년 만에 자신의 어머니, 그러니까 나의 외할머니인 '배정심' 여사와 해후를 마치고 돌아온다. 엄마와 엄마의 남동생인 삼촌이 어렸을 때 집을 나간 이후 연락 한 번 나눈 적 없었던 할머니. 그녀는 삼촌이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어머니로서 상속 일 순위가 되는데, 상속을 포기한다는 의사를 밝혔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수십 년 전에 두고 떠난 딸과 다시 만난다.


정 정(情)에 깊을 심(深)을 쓰는 배정심 여사는 조건 없는 환대와 사랑을 베풀었던 나의 친할머니와는 정반대였다. 말수는 적었고 행동과 말투는 우아했으며, 수십 년 만에 만났지만 당신의 자식인데도 나의 엄마가 먼저 말을 놓으라고 하기 전까지 깍듯하게 존댓말을 사용할 정도로 조심스럽고 차분한 사람이었다. 패션 감각이 뛰어났고 취향 또한 고급스러웠다. 나는 그런 외할머니 배정심 여사를 보면서 '만약 그녀가 평범하고 친근한 사람이었다면, 그래도 나는 할머니의 삶을 궁금해하고 그녀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했을까?'라며 나 자신에 대한 의문을 품는다.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의 진중하고 예의 바른 할머니. 어쩌면 내가 배정심 여사에게 호기심을 느낀 것은 할머니라는 사실 자체보다는 그녀가 살아온 삶의 모습, 속을 파악하기 어려운 그녀의 비밀스러운 모습에 동경심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p101 - 말하자면 배정심 여사의 삶은 엄마에게 '가지 않은 길'이었으므로, 그녀의 행 혹은 불행을 확인하는 일이 엄마에게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엄마는 어린 시절에 떠난 외할머니를 원망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원망스러운 마음을 내비치지 않았다. 속마음은 어떨지 모른다. 오랫동안 자신과 남동생을 버리고 간 엄마를 미워하고, 그리워하고, 원망하며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엄마에게 배정심 여사의 인생은 어떤 존재였을까. 가족을 버릴 정도로 소중하게 여겼던 것, 그래서 더욱 증오스러운 것, 반대로 그렇기에 별다른 생각이나 감정이 없는 것, 어떤 것도 정답이자 오답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길을 걷고 그중에는 남이 가지 않은 길도 많으니까. 남의 입장에서 보면 그 길은 '자신이 가지 않는 길'인 것이다. 세상에는 수천만 갈래의 샛길이 틈틈이 존재하고 있다.


* 책에 쓴 감상문 : '갈 길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사십 년 만에 만난, 엄마와는 해후지만 나에게는 생전 처음 보는 외할머니이자 고독하고 우아한 배정심 여사. 그녀는 흔하지 않은 노인이었고, 당신의 딸인 나의 엄마와 손녀인 나 또한 그리 흔치 않은 결의 사람이지만 이들과는 또 다른 이질감과 특별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이야기의 중심은 가 보지 않은 길, 갈 길이 다른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멀어질 사람은 어떻게든 멀어지고 가까워질 사람은 어떻게는 가까워진다는 말을 어딘가에서 들었다. 배정심 여사는 나와 엄마에게, 어쨌든 언젠가는 멀어질 사람이었다. 핏줄이고 가족이지만 사람의 길은 피로 이어진 게 아니기에. 어쩌면 우정, 사랑, 추억 모두 갈 길이 있는 사람에게는 미련이 남거나 붙잡힐 아닐지도 모른다.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 '너의 목소리가 그리워도 뒤돌아 볼 수는 없지'라는 가사가 있는 것처럼. 나도 나의 할머니가 배정심 여사처럼, 남들과 다른 독특하고 고고하고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조금 더 관심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앞으로도 나는 지금 나의 할머니가 제일 좋을 것이다.


언젠가 곁에서, 관계에서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면 갈 길이 다른 사람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대상을 잃어버린 애정과 기억이 방황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두에게는 자신만의 길이 있다. 그 삶에, 그 자리에는 누구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다. 배정심 여사의 삶은 누군가의 아내, 어머니, 할머니로 머무를 수 없는 삶이었을 뿐이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너무 늦지 않은 어떤 때]. 김소연 시인의 시에서 가져온 제목이다. 육 년간 일한 직장을 그만두고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연애에 종지부를 찍은 후 ― 정확하게는 종지부를 찍기 위해 어딘가로 떠나자고 생각한 후 ― 화자인 '나'는 인도로 떠난다. 이질적이고 물가가 싸고 다소 위험한 곳. 그리고 어쩌다 보니 지내게 된 숙소에서 현지인 '안와'를 만난다. 큰 키에 넓은 어깨, 무슬림의 하얀 정장을 입고 붉게 염색한 머리를 하나로 묶어 늘어뜨린, 아내가 두 명 있는 오십대 정도의 남자. 나와 안와는 긴밀할 정도로 가까워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사람인 듯 서로를 지나치지도 않는다.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안와가 자신의 집에 나를 초대하는 등 나름대로 친근한 사이를 유지하기도 한다. 서로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가지지도 않고 지나치게 무심하지도 않은, 그럭저럭 평화로운 관계다.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도와준다는 안와는, 훗날 나에게 자신이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신은 믿지만 천국과 지옥은 믿지 않는다고. 신은 믿지만 자신이 믿는 신은 천국에 살지 않는다고. 안와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있는 이곳의 아름다움만을 믿는다고 말한다. 소설 속에 존재하는 안와는 나(현실)와 나이, 인종, 성별, 국적이 모두 다르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비슷한 결을 생각한다. 나는 신이나 미래나 행복 같은 것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믿고 싶다. 내일이 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오늘 보고 있는 풍경이나 살아 있는 이 순간이 아무런 언질 없이 마지막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질 수도 있으니, 지금 당장 느껴지는 것과 보이는 풍경에 모든 마음을 집중하고 싶은 것이다. 서서히 짙은 노을이 지는 고요한 세상 속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당장 내 온몸으로 쏟아져 흘러내릴 것 같은 무수한 별하늘 아래에서도 나는 여전히 지금 이 순간을 잊어버릴 수도 있을까? 다만 어쨌든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건 지금뿐이라는 사실만은 기억하고 싶었다.


p146~147 - 나는 가끔씩 내 삶이, 필름이 들어 있지 않은 카메라로 셔터를 누르는 것처럼 느껴져.

가끔은 마음에 박히지만 왜 이 말이 유독 눈에 걸렸는지 명확히 알 수 없는 문장이 등장한다. 이 문장도 그렇다. 필름이 들어 있지 않은 카메라로 셔터를 누르는 건 어떤 행위일까. 열심히 눌러봤자 아무런 결과물도 남지 않는 허무한 과정일까, 아니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찍어서 남기고 싶을 만큼 깊은 의미가 있다는 뜻일까. 혹은 둘 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p150 - 다만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영원히 살 수 있는 꿈 같은 건 없다는 것을. 이 순간은 오직 지금뿐이라는 것을. 어떤 오늘도 내게 너무 늦지는 않았다는 것을.


* 책에 쓴 감상문 : 낯선 이국에서 만난, 언어도 환경도 사고방식도 다르지만 낯설지는 않은 이국인과의 기묘한 우정을 다룬 이야기다. 중반부에 나온 '불행만을 몸에 걸친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던 그'가 이야기의 화자이자 주인공이 지지부진한 연애의 끝을 맺었다는 대상일까. 인도에서 우연히 만난 안와는 가까워지는 듯하면서도 여러 부분에서 나와 멀어진다. 아내가 둘이라거나, 무슬림으로서의 생활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하지만 사실 안와는 신에게 기도하지 않고 천국과 지옥을 믿지도 않는다. 신앙이 없거나 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존재하는 세상을 믿고 그것을 사랑하기 위해 모든 마음을 쓰는 것이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인종, 성별, 나이 모두 다른 존재임에도 나와 안와가 어떤 부분에서는 연결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점이나 생각에 관해서. 세상을 관찰하기보다는 먼저 느끼는 감각이나 신 혹은 사랑을 믿고 매달리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려 하는 것. 어쩌면 그 마음이 가장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내면일지도 모르겠다.




여섯 번째 이야기는 [고래 사냥]. 아마 이 책에서 가장 짧은 단편일 것이다. 화자인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만난 룸메이트를 '룸메씨'라고 부른다. 대학을 졸업한 지 이 년이 다 되어가지만 나와 룸메씨는 여전히 친한 친구 사이다. 인천 석모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룸메씨는 섬을 떠나는 것을 줄곧 꿈으로 삼아왔지만, 막상 고향을 떠나고 나서는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몰라 혼란스러워했다. 재수를 했는데도 원하던 대학에 합격하지 못해 성적에 맞춰 대학과 전공을 선택했던 나와 룸메씨는 처음 만나기 전부터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나와 룸메씨는 바이킹을 타러 월미도를 가고, 유원지 안을 돌아다니다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이때 룸메씨가 나에게 들려주는 미래 이야기가 꽤 재미있다. 공무원 시험에서 계속 떨어지다가 이내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민박집을 물려받기로 마음먹고, 우연히 어릴 적 친구를 만나 일사천리로 결혼해 아이를 둘 낳고, 아이들은 겨울이 되면 섬에 놀러 오는 나를 겨울에 오는 이모라고 부르며 좋아하고, 성장한 이후 섬이 지긋지긋해진 아이들이 나를 따라가고 싶다고 해서 방학마다 나의 집에 놀러 오는 것. 대기업 부장님이 될 정도로 승진하느라 바빠서 연애를 못 한 나는 방이 네 개나 되는 한강뷰 아파트에서 혼자 살면서, 두 개의 방에 룸메씨의 아이들 이름을 붙여 놓는다. ― 여기서 룸메씨의 아이들 이름이 나연이와 다현이라서 내가 "뭔가 트와이스 아냐?"라고 말하는데, 이 부분이 특히 웃겼다. ― 그렇게 나와 룸메씨는 각자 열심히 삶을 꾸려가면서 시간이 오래 지나도 복작복작 어울리며 사는 관계가 된다. 물론 룸메씨의 상상 속에서만 그렇지만, 터무니없는 미래 공상은 재미있는 법이다.


나는 화장실 옆에서 산 돌고래 풍선을 룸메씨의 손목에 묶어 주고 함께 바이킹을 탄다. 초승달이라기엔 크고 아주 환한 달이 머리맡에 있다. 그리고 바이킹을 타는 동안 돌고래는 밤하늘을 난다.


p159 - 진공 상태로 떠오를 때가 아니라 붙잡혀 돌아올 때. 지구는 나를 이토록 끌어당기는구나. 놓아버리지 않는구나. 기울어진 채 머릴 수평선에 돋아 있는 낮은 섬들을 바라보노라면, 발 딛고 있는 대지가 얼마나 단단하고 안온한 것인지 깨닫게 되곤 했다고.

지구에 관한 영상을 보면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속 1,670킬로미터로 자전하는 지구에서도 우리가 멀쩡하게 생활하는 것은 지구의 중력 덕분이라고 한다. 물론 나는 이과가 아니므로 정확한 원리나 사실 여부는 자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구의 중력이 사라지는 순간, 지구가 어떤 모습으로 멸망할지는 더없이 상상해 보았다. 출근할 때마다 내가 땅을 멀쩡히 걷고 있음이 신기하게 느껴지곤 한다. 아무리 높은 건물에 올라가도 나는 지구의 중력에 의해 땅에 붙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 지구는 우주에서 세포의 핵조차 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작은 존재이지만 그토록 작은 지구에서는, 아주 신기하고 신비로운 현상이 당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벅차게 느껴지곤 한다. 나의 모든 삶이 이 단단하고 안온한 행성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으므로.


* 책에 쓴 감상문 : 짧은 이야기다. 평범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천의 섬에서 태어나고 자란 룸메이트와,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대학생 시절에 만난 룸메이트와 대학교 졸업 후에도 우정을 유지하는 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룸메씨와 아마도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나, 두 사람의 평범한 관광지 나들이가 이어진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평범하기도 해도, 한 사람의 인생을 하나하나 세밀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슷한 양상은 의외로 찾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이 태어난 이후 평생 구축한 취향과 생각과 고민과 몽상의 숲은 결코 다른 이와는 흡사할 수 없을 테니까. 이 소설의 화자인 '나'와 룸메씨도 멀리서 보면 흔한 관광객 중 하나에 불과하고,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그저 평범한 관광객에 '불과하다'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룸메씨가 자신과 '나'의 미래를 상상하며 이런저런 모습을 상당히 세부적으로 가정하는 부분이 재미있었다. 우리는 모두 이야기 속에 나온 것처럼 '지구에게 끌어당겨지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일곱 번째 이야기는 [네버랜드에서]. 소설의 화자인 '나'는 부모님, 언니, 형부, 조카와 함께 태국 남쪽 바다 어느 작은 섬에 위치한 리조트 '네버랜드'에서 2박 3일간 가족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나는 풍족한 식사와 그림 같은 풍경이 존재하는 이국에서의 가족 여행이 그다지 즐겁지 않다. 어떤 대화에도 섞이지 않고 내내 무표정한 아버지, 사위 덕분에 이런 호강을 다 해본다며 같은 칭찬을 반복하는 어머니, 어린 조카에게 밥을 먹이는 일에만 온 신경을 기울이는 언니, 아내가 제대로 식사를 하는지는 안중에도 없는지 음식 손질에만 열중하는 형부, 낯가림이 심해 이틀간 단 한 번도 나를 이모라고 부르지 않는 조카. 더불어 남자친구이자 약혼자인 희욱은 나의 가족들과 며칠 동안 시간을 보내는 게 불편하다며 여행에 동참하지 않았다. 가족 여행이지만 사실상 진심으로 이 여행을 즐기는 사람은, 적어도 어린 조카 말고는 없는 모양새다.


그러던 중 나는 '론'이라는 청년을 만난다. 나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 나의 가족들을 전담하여 관리하는 휴양지의 가이드 직원. 나는 여행 내내 친절하고 능숙한 론의 도움을 여러 번 받고, 그가 직원들과 하는 현란한 불쇼를 불안한 마음으로 관람하며, 이따금 서툰 영어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한국 기업의 태국 지사에서 일하는 형부를 따라 태국에서 살고 있는 언니는 여기 대학생들은 보통 돈 많은 집 자식들이라며, 관광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젊은이들은 그냥 젊은이라고 말한다. 안전요원, 웨이터, 바리스타, 불꽃 곡예사, 스노클링 강사, 밴드 코러스 등 온갖 역할을 수행하던 론은, 동시에 '그냥 젊은이'이기도 한 것이다.


p191 - 언니와 수다를 떨며 지새웠던 과거의 어떤 밤들이 다시없을 희귀한 것으로 느껴졌다. 그 밤들은 캠프파이어 같은 거였구나. 활활 타오르던 불이 재로 남는 모습을 나는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보게 될까.

문득 지금의 나는 캠프파이어를 지나고 있는 중인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시절에 남들이 보기에도 젊다 못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지만, 내가 어리숙하고 부족한 인간이라는 생각만 할 뿐이지 불처럼 타오른다고 느낀 적은 없다. 연애는 물론 외면을 꾸미는 일에도 관심이 없고, 마니아나 덕후라는 이름을 당당하게 자칭할 정도로 푹 빠져 사는 것도 없다. 아무리 끓어도 뜨뜻미지근한 물을 담아둔 주전자 표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독서와 글쓰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고 나이가 들어도 계속하고 싶은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책과 글에 타오르며 살고 있다고 말하기엔 열기도 끈기도 부족하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다 타버리고 하얀 재만 남은 상태인 걸까. 몇 살이나 먹었다고 벌써 불씨도 다 사라지고 재밖에 남지 않았나. 해야 할 일도 많고 할 수 있는 일도 많은데, 내가 평균 수명 정도만 산다고 쳐도 남은 인생이 아직 60년이나 더 남았는데, 그 기나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려고 벌써 나의 장작들을 모조리 태워버렸을까. 사실 터무니없는 걱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 책에 쓴 감상문 : 문득 궁금해졌다. 소설의 화자인 '나'가 태국 휴양지에서 일하는 안내원이자 가족 전담 관리인인 론에게 느낀 마음은 무엇일까? 론은 나의 추측에 따르면 대략 나보다 열 살은 어리고, 온몸에 화상 자국을 남긴 불쇼도 매일 밤마다 열심히 연습하며, 불이 몸을 스칠 때 희열을 느끼고, 철없음과 순진함 중간에 있는 미소를 지을 줄 안다. 이미 나의 삶에서는 오래전에 두고 온 젊은 날을 현재에 두고 머무르는 젊은이. 단지 젊기만 하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젊은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사람이었다. 론은 친절하고 친근했다. 언니와 수다를 떨며 지새웠던 밤이 캠프파이어고 지금 사는 순간을 다 타고 남은 재라고 여기는 나는, 론을 보며 불길 너머로 뜨겁게 태우고 쇼처럼 즐거워했던 지난날과 타버리지 않았던 시절을 무심코 떠올린 것이다. 그래서 론은 나에게 더 가까워지고 싶으면서도 자꾸만 거리를 두게 되는 사람이었다. 내가 지나온 시간, 내가 불타는 젊은이였던 시절, 지금 아는 것을 모르고 지금 느끼는 허무감과 무료함을 몰랐던 무모한 과거로는 평생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론을 보면 제 과거를 떠올리면서도 다시는 그때처럼 되지 못하리란 사실을 자각한 나는, 휴양지로 많은 관광객이 몰리고 아름다운 풍경과 호화로운 식사가 매일 찾아오는 낯선 이국의 네버랜드에서 그동안 잃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살았던 어떤 마음을 이윽고 깨달은 게 아닐까. 그래서 섬을 떠나면서도 론이 자신만을 위한 작별 인사를 해 주길 바란 게 아닐까. 칠 년을 만났지만 여전히 어떤 사람인지 설명할 수 없는 연인 희욱보다 잠시나마 더 깊은 동질감과 그리움을, 바로 론에게서 느꼈기 때문에.




여덟 번째 이야기는 [지나가는 바람]. 소설의 화자인 '나'는 콘텐츠 MD로 일하지만, 유행을 잘 타는 성격도 아니었고 팀장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지도 못한다. 하물며 번아웃이 와서 갭 이어 ― 미래를 준비하며 가지는 자유시간 ― 를 가지겠다며 일 년 전에 퇴사한 입사 동기 민지씨와는 매번 비교 대상이 된다. 민지씨는 퇴사 후 프랑스 파리로 여행을 떠나 여행기를 담은 뉴스레터를 월 구독료 만 원에 연재하고, 퇴사 전에도 팔로워만 이만 명이 넘었고, 새벽마다 헬스를 다녔던 시절처럼 필라테스와 플라잉 요가와 클라이밍을 하고, 사 개월 만에 체지방률 십팔 퍼센트를 달성하고, 갭 이어에 관한 전자책과 전자책으로 돈 버는 법에 관한 전책을 내며 대박을 친, 말도 안 되는 '갓생'을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갭 이어를 위해 퇴사한 나도 나름대로 계획을 세웠다.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회사를 그만두고 따뜻한 나라로 가서 여행을 하고, 요가를 배우고, 태국 요리 클래스를 다니고, 민속적인 스타일의 원피를 입고 사진을 잔뜩 찍을 것이라고. 원피스와 어울리는 히피 펌을 위해 머리를 길렀고, 여행 브이로그 촬영을 위해 촬영 장비와 여행 준비물을 사면서 세 달 치 월급을 썼다. 그렇게 유튜브 크리에이터이자 노마드 워커 ― 휴대용 기기를 이용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이동하며 일하는 사람 ― 가 되는 꿈을 꾸고 퇴사한 지 일주일이 되지 않아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했다. 취소된 비행기표와 함께 나의 꿈도 저 멀리 날아가 버렸지만, 나는 좌절감보다 안도감을 먼저 느꼈다.


나는 퇴사 후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었다. 누워서 핸드폰으로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SNS를 탐방하는 것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간을 쪼개고 잠을 줄여가며 운동, 자기 계발, 공부, 스펙 관리에 힘을 써야 훌륭한 삶이라고 여기는 우리나라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발전도 도모하지 않는 일은 정말 괴로운 일이었으니까. 쓸모없는 사람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겪으며 주변 사람들의 핀잔과 조언 아닌 조언을 감당하는 일이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나날이 어두워지는 마음에 리뷰를 꼼꼼히 살피고 엄선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갔지만 의사는 퉁명스럽고 불친절한 사람이었다. 흉흉한 세상을 직간접적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나는, 퇴사한 회사 후배인 '우림'의 연락을 받고 그와 함께 술을 마신다.


우림은 대리로 승진했다. 감각도 좋고 무슨 소리를 들어도 넉살 좋게 넘기며, 내가 회사에서 제일 잘 적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우림은 매일 밤마다 그 넉살 좋은 캐릭터를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에 미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바닥에 닿아 있는 자신의 등을 생각하다 보면 잠이 들었다고. 모든 게 지겹다고. 그러다가 귀갓길에 서로의 삶과 앞으로의 날을 응원하며 헤어진다.


p211 - 서른 해 남짓 살았을 뿐인데 지금 산 것만큼을 또 살고, 어쩌면 또다시 그만큼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게 두려운 건 내가 젊기 때문일 텐데, 나는 내가 젊다는 걸 아는 동시에 키오스크 앞에 황망하게 서 있는 누군가의 마음을, 브레이크 대신 액셀 페달을 밟아버린 누군가의 살 떨리는 공포를 마치 내 것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산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숱한 두려움과 위기를 넘겨내고, 어떻게든 살아냈다는 뜻이니까. 나는 평균 수명까지 산다고 치면 지금 내가 살아온 인생을 세 번이나 더 겪어야 한다. 그 사실이 가끔은 아주 아득하게 느껴진다. 시간은 금방 흐르지만 얼마 남았을지도 모르는 나의 삶이, 오만하게도 아주 멀고 깊고 넓은 세상처럼 느껴져서 사는 게 저절로 지겹고 무서워질 때가 있다.


p225 - 우린 아마 평생 이러고 살겠지. 갈대처럼 흔들리면서.

근데 갈대 괜찮지 않나. 지나가는 바람에 한껏 몸을 누이면 되니까. 한참 엎어져 있다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고, 또 엎어지고. 누가 누구를 일으켜줄 수는 없지만, 같이 엎어져 있는 건 참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우림에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냥 속으로 생각만 했다.

너무 빳빳하면 쉽게 부러지니 적당히 유연한 사람이 되는 게 좋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자아가 강하고 줏대가 확실하면 자신을 향한 의심은 없겠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쉽게 좌절하고 작은 빈틈에도 무너질 수 있다는 말이다. 솔직히 나는 빳빳하지도 유연하지도 않다. 그냥 고집은 세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우유부단하고 겁 많은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갈대처럼 적당히 바람에 잘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는 사람이 되면 좋겠구나 싶었다. 갈대 같은 사람.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제자리를 찾는 사람. 제법 좋지 않을까.


* 책에 쓴 감상문 : 퇴사한 직장인의 삶. 뛰어난 스펙도, 삶을 향한 낙관도, 넉넉한 잔고도, 나 자신을 향한 믿음도, 미래에 대한 확신도 없는 삶. 나보다 잘살고 나보다 행복한 사람들이 길바닥에 널린 쓰레기만큼이나 넘쳐나는 세상. 사람을 향한 불신과 불만과 불안이 가득한 삶을 잠깐이지만 가장 쓰고 간결하게 맛보았다. 나와 타인을 비교하는 습관이 불행과 무기력의 시발점임을 알면서도, 비교를 멈추지 못하고 나의 행운과 불운을 저울질하는 서글픈 삶이 있다. 내가 무가치한 인간으로 느껴지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 작품의 화자인 '나'가 언젠가는 내 미래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바라긴 하지만 막상 왜 바라는지는 모르고, 사실 그렇게까지 가지고 싶지도 않았다며 아닌 척 포기하는 미지근한 삶. 나쁜 게 아닌데도 그런 인생은 꺼려진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순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탓일까. 적당히 유쾌하고 현실적인 우림은, 어쩌면 내가 원했던 페르소나였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이야기는 [한낮의 빛]. 대학 때부터 에이전시에서 여러 아르바이트를 맡았던 화자인 '나(수정)'는 학예사를 도와 아르바이트생들을 관리하고 전체 업무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다가 웬 진상 관객 때문에 소동이 일어나고, 정신없이 도슨트를 마친 후 휴대폰을 열었다가 '유영 언니'의 메시지를 보게 된다. 한국에 왔으니 만나서 얘기하면 좋겠다는 말.


유영 언니는 나와 어린 시절을 함께 한 소꿉친구이기도 했다. 나의 부모님이 각자 소개한 지인들이 결혼하여 꾸린 가정에서 태어난 유복한 집안의 외동딸. 어린 시절을 남부럽지 않게 자랐으나 IMF로 인해 집안이 기울면서 유영 언니는 나와 함께 방을 쓰며 살게 되었는데, 유영 언니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자신과 집안이 처한 상황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 잘 아는 사람처럼,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나 역시도 그런 유영 언니를 좋아하고 잘 따랐으나, 나보다 여섯 살 많은 나의 오빠가 어른들이 없는 유영 언니를 성추행 또는 성폭행하는 장면을 목격한 이후로는 그 평화가 완전히 깨진다. 내가 그 사실을 부모님께 말하자 나의 오빠는 아버지에게 구타를 당하고, 단짝 친구에게 집에서 일어난 일을 말했다가 학교에 소문이 나 유영 언니의 부모님까지 알게 되어 그토록 친했던 나와 유영 언니의 부모님도 완전히 관계가 끝난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내가 술에 취한 채 유영 언니에게 횡설수설 보낸 메시지에 언니가 답을 한 것이다. 이윽고 이십 년 만에 유영 언니와 만난 나는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눈 후 언니와 헤어진다. 또 보자는 인사는 나누지 않은 채.


소설에는 '주명'이라는 사람도 등장한다. 내가 일하는 에이전시의 아르바이트생인 그녀는 수줍음이 많고 조곤조곤하면서도 상당히 사교적인 성격으로, 나와 단둘이 술을 마시러 간 자리에서 언니라고 부르고 싶었다거나 나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꺼낸다. 사실 나는 주명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언젠가 보고 큰 감명을 받았던 화가 '마리아 막달레나 엘로이즈'의 작품 <이중 자화상> 앞에 붙박인 듯 서서 그림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 나는 주명의 이름이 새겨진 명찰을 보고는 주명의 이름이 한낮의 빛을 뜻하는 주명(晝明)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화가 엘로이즈의 인생을 설명하고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 엘로이즈를 검색해도 기독교의 성인만 나오고, 이중 자화상을 검색해도 에곤 쉴레의 작품만 나온다. 엘로이즈의 인생에 여럿 영향을 끼친 화가들의 이름도 검색했으나 나오지 않는 걸 보아 이 소설 속 엘로이즈는 실존 인물이 아닌 듯하다.


p256 - 하지만 내게 그 그림자는 내 몸만한 어둠이 아니라 빛의 잔해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소설 속 엘로이즈가 말년에 한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다.


* 책에 쓴 감상문 : 소설의 화자인 수정. 그녀는 어린 시절을 함께 했으나, 자신의 오빠로부터 성추행 혹은 성폭행을 당하는 것을 발설하면서 멀어진 유영 언니를 향한 죄책감과 자기혐오로 꽤 오랫동안 선택적 함구증을 앓았다. 그런 그녀가 집을 떠나 조금씩 말을 되찾으며, 전시회의 도슨트로 일하며 '말하기'로 돈을 벌다가 만난 주명. 마치 한낮의 빛일 것만 같은 아르바이트생을 마주치고는 자신과 같은 작품에 감명을 느낀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나(수정)에게 유영 언니가 그림자였다면 주명은 빛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그림자가 몸만한 어둠이 아니라 빛의 잔해라고 말했다. 어쩌면 유영 언니도 주명도 내게는 모두 그림자이자 빛이었을지도 모른다. 몸을 관통하지 못한 빛이 남긴 잔해. 살아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시절이나 감정이 잔해처럼 남아 둥둥 떠다니곤 한다. 존재했었던 마음의 흔적이다. 나에게 유영은 지난 시절의 잔해이자 마음의 흔적, 주명은 언젠가 마음에 담고 싶었던 한낮의 빛이 아니었을까.





삶의 빛과 잔해에 관하여


읽을 때는 잘 몰랐는데, 독후감을 쓰니 무려 아홉 개의 단편이 있었다. 덕분에 상당히 힘겨웠다. 그래도 단편마다 감상평을 써두어서 많은 참고가 되었다. 무엇이든 기록으로 남긴다는 건, 과거의 나를 미래의 나에게 남겨두고 가는 일처럼 느껴진다. 지금의 내가 글을 읽으며 한 생각과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남기는 일. 먼 훗날에 읽으면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 '이런 생각을 다 했구나' 하며 추억 여행하듯 머무를 수 있는 일 말이다.


이 책은 빛과 그림자를 담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그림자인지 명확하게 구분이 불가능하다. 본래 빛과 그림자는 동시에 존재하고, 삶에 존재하는 빛과 그림자는 더욱이 구별이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두 존재는 명확한 경계 없이 공존하니까. 누구는 빛이라고 말하는 게 누구에게는 그림자가 될 수도 있고, 언제는 빛처럼 느껴졌던 게 지금은 어두운 그림자처럼 보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빛과 그림자를 긍정과 부정으로 나눌 수도 없다. [한낮의 빛]에 남긴 감상문처럼, 그림자가 빛의 잔해라면 그것은 어떠한 시절과 마음의 흔적이고, 그것을 남긴 빛 또한 수많은 감정과 시간을 가지고 있었을 테니까. 아무튼 이것은 나의 머리로 정의하기엔 여러모로 어려움이 있다. 답이 존재하지 않으니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삶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삶은 수많은 생애 주기와 하루하루가 모여 만들어지는 것.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모여서 만들어졌고, 미래의 나는 과거와 지금의 내가 모이고 모여서 다시 만들어질 것이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지만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의 인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의 인생은 빛과 그림자 중 하나만으로 존재할 수도 없고,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그것들을 모두 품은 채 걸어가는 과정에 가깝지 않을까. 결과는 어쨌든 죽음일 테니 구태여 고민할 필요도 없고.


나는 이 책의 제목이 <최소한의 최선>임을 상기한다. 사람은 누구나 최소한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최소한인 동시에 최선이기도 한 시간을 산다. 나는 그림자에서 벗어나 빛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늘 속에서 빛을 바라보면서, 따뜻한 빛을 상상하고 빛을 느끼고 빛을 탐색한다. 그러다가 이따금 빛을 향해 나아가 걸어보기도, 돌아다니기도, 밝은 세상을 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두컴컴하고 축축했던 세상도 조금은 바삭해지는 것 같다. 다시 서늘한 그늘로 돌아오긴 하겠지만.


나의 그림자는 빛의 잔해가 된다. 나의 몸을 관통하지 못한 빛이 남기는 영원한 흔적. 앞으로는 그것을 조금씩 생각해야겠다고, 다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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