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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Jun 12. 2024

홀로 머무르는 계절의 순간

황수영 著, <여름 빛 아래> [산문]


- 제목 : 여름 빛 아래

- 저자 : 황수영

- 출판사 : 별빛들




이 책을 마지막으로 읽은 것은 2022년 11월 8일 화요일이다. 1년 하고도 6개월이 더 지난 오늘, 2024년 6월 11일 화요일이라는 날짜가 책의 맨 뒷장에 새겨졌다. 생각보다 오래전에 산 책이다. 회사 직원의 결혼식이 있어 서울로 향했던 주말, 이대로 집에 돌아가기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고 엄마를 불러 함께 카페에 갔다. 작은 전시회도 겸하고 있는 곳이었고 카페 위층에 서점 겸 소품점이 있었다. 그곳에서 이 책을 샀다. 아닌가? 이 책을 그곳에서 본 건 맞지만 산 것은 그곳이 아닐지도 모른다. 눈여겨보았다가 나중에 따로 구매했던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다만 첫 만남은 분명 그 서점이 맞다. 전시 작품의 엽서를 사서 돌아왔던 날.


산문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나는 책등에 산문이라고 쓰인 게 좋다. 자유로운 문장으로 얽매이지 않고 쓴 글이 좋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시 같기도, 에세이 같기도, 일기 같기도 하다. 세 가지 글이 모두 존재하는데 정확히 어느 것이 시다 에세이다 일기다 구별하기는 어렵다. 어떤 글은 한눈에 알 수 있지만 어떤 글은 긴가민가하다. 글이란 건 원래 명확한 목적으로 쓰이지 않을 때가 많으니까. 그저 기록하기 위해 태어나는 글도 있고, 그저 쓰이기 위해 나타나는 문장도 있는 것이다.


모든 글에는 제목이 없다. 1부, 2부, 3부로 나누어져 있을 뿐 부마다 어떠한 주제도 없다. 말 그대로 정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쓴 글이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좀처럼 해내지 못하고 있다. 글은 쓰고 싶다고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쓰고 싶지 않다고 쓰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글을 잘 쓰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말이 우스운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항상 노력한다. 노력이라고 해봤자 조금 더 읽고 조금 더 쓰는 것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아예 안 읽고 아예 안 쓰는 날은 없다. 읽기도 쓰기도 싫은 날이면 생각을 한다. 이 책은 그런 기분을 담아낸 책 같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에 떠오른 생각들을 써 내린 책. 작가님이 보신다면 기분 나빠하실까.


꽤 늦은 시간에 책을 다 읽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감상문을 쓰고 있지만, 아무래도 오늘 자정 전까지 글을 다 쓰기는 틀린 것 같다. 마음을 내려놓고 쓰겠다. 어차피 내 글은 읽는 사람도 얼마 없다. 등단도 하지 않은 무명작가로 살아가는 삶은 외롭지만 편안하다. 어느 눈치도 볼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나의 첫 시집은 아직 한 권도 팔리지 않았다. 나라도 내 시집을 12,500원이나 주고 사지는 않을 것 같다. ― 게다가 배송비도 따로 붙는다! 시를 50편이나 실었더니 책이 두꺼워졌다. ―




외로운 계절은 항상 내 곁에 있다


이 책의 제목이 <여름 빛 아래>인데, 읽다 보면 여름보다는 겨울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춥고 외롭고 저절로 몸과 마음이 움츠러드는 겨울. 그러나 여름과 겨울이 상반된 계절이라고 해서 연결점이 없다는 생각은 섣부르다. 여름은 겨울이 있기에 존재하고 겨울도 여름이 있기에 존재한다. 봄과 가을은 시달리지 않는 대신 어떻게든 잡아내야 하는 계절이다. 지긋지긋하게 곁에서 오래 머무르는 여름, 겨울과는 달리 다정하고 온화한 품을 내어주고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소박하고 찬찬하고 잔잔한 글의 좋은 점은, 읽는 행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시를 읽으면서 시상을 떠올리듯이 이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화자, 즉 작가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까만 개와 함께 강변을 산책하고, 느린 걸음으로 강가에 피어난 풀꽃들을 바라보고, 하얀 눈이 내리는 어느 겨울날에 따뜻한 보리차를 내려서 마시고, 친구들과 웃으면서 떠들고 술을 마시고, 그랬던 날을 혼자서 그리워하고, 그러다가 옆에 다가온 까만 개를 쓰다듬으며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들을 그려 보았다. 그것이 완전한 타인의 일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 또한 사계절 내내 무언가를 그리워하거나 실없는 외로움을 느끼며 사니까. 다만 그리워하는 것이 선명하지는 않고 외로움도 짙어지지는 않는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p13 - 어쩌면 여름이 아니라 여름의 곁가지들만 사랑했던 건 아니었을까.

많은 창작물에서 여름은 찬란하고 아름다운 계절로 묘사되지만 현실의 여름은 끔찍하다. 가만히 서 있어도 뜨거운 햇볕에 살갗이 따가운 것은 물론이요, 땀으로 온몸이 축축해져서 에어컨이 없으면 온종일 찝찝하고 불쾌하다. 뜨겁고 습한 공기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고 두피와 머리카락이 뜨거워지다가 이내 어지러워지기까지 한다. 어쩌면 매서운 겨울보다 끔찍한 여름이 훨씬 움츠러드는 계절이 아닐까. 뭘 해도 태양빛이 땅을 녹여버릴 기세로 쏟아지는 그늘 밖 세상으로는 도무지 발을 내디딜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름을 떠올리면 아름다운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은, 온갖 창작물에서 뜨거운 첫사랑이나 시원한 바닷바람이나 하릴없이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며 집 안에서 뒹굴거리던 방학을 그려내며 여름을 미화한 탓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의 어린 시절도 그랬으니까. 기나긴 여름방학마다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시원한 집 안이나 그늘 아래에서 몸을 피하고, 시끄러운 매미 소리를 듣다가 꾸벅꾸벅 졸고, 선풍기가 탈탈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엄마가 만들어 준 냉면을 먹고…. 여름은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하고 견디기 힘든 계절이지만, 그만큼 좋은 추억도 많다. 가족들과 해수욕장에서 놀았던 기억과 외조부모님 댁에서 사촌들과 물놀이를 했던 기억도 있다. 기억은 미화된다. 때로 사람은 추억으로 남은 과거를 말미암아 현재를 버티며 살기도 한다.


여름의 곁가지는 비단 여름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수많은 곁가지를 마음대로 꾸며내며 동경하다가도 막상 그것의 본질은 알려고 하지 않을 때. 누군가를 좋아하면서도 정작 그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기이한 짝사랑도 생각보다 무수하다. 나는 글을 쓰면서도 정작 글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최대한 잘 쓰고 싶지만, 잘 쓴 글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술술 읽히는 글이 잘 쓴 글인지, 한 문장마다 깊이 생각하며 통찰해야 하는 글이 잘 쓴 글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냥 쓰는 것이다. 이 또한 내가 사랑하는 곁가지일까.



p29 - 어디에나 있는 것이 사람을 외롭게 한다. 그래야 없는 것이 더 실감 나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있고 나에게는 없는 것. 나에게 없으나 저기에는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것. 보이기는 하나 닿을 수 없는 것. 만질 수 없고 주머니에 넣을 수 없는 것.

나는 살면서 버리자고 다짐한 마음으로 욕심과 질투를 생각했다. 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욕심과 질투가 좀처럼 마음에서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과도하지는 않더라도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과하게 만드는 감정. 살면서 욕심을 내거나 무언가를 질투했던 적은 많지만 한 번도 만족했던 순간은 없다. 욕심은 욕심대로 괴로웠고 질투는 질투대로 힘겨웠다. 충족되지 않는 욕심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지도 않았고, 타인을 향한 시기나 질투가 나를 더 유능한 사람으로 발전시키지도 않았다. 스스로의 감정도 제대로 읊어내지 못하면서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이다. 분명 존재하는데 나에게는 없는 것, 가지고 싶지만 내 안에는 결코 없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괴로웠다. 나의 분명한 결핍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외로워지는 순간이 있기에, 나는 나에 대한 기대를 한층 접기로 결심했다.



p33 - 어떻게 해볼 수도 없이 혼자구나 정말로 혼자구나 온몸이 소리 낼 때. 외칠 때. 사라지고 싶었다. 그럴 때 시를 읽었다. 혼자인 사람이 혼자인 것을 소리 내 외치는 시간을 읽었다.

삶에는 항상 그림자가 존재하지만, 편안하다는 이유로 그늘 속에서만 머무를 수는 없다. 이상과 낭만을 사랑하고 그것을 좇는 일은 아름답지만 그럼에도 내가 사는 세상은 현실이다. 생활을 영위하고 관계를 만들거나 유지해야 하는 삶.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지치고 마모되는 삶은 자주 고독하게 느껴졌다. 아마 내가 유난히 내향적이고 혼자 있는 시간을 자주 가지는 사람이기에 더 그런 게 아닐까 싶지만.


외로울 때는 외로운 글을 읽는 것도 의외로 나쁘지 않다. 특히 시는 대부분 혼자 있을 때 나온다. 물리적으로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거나 시끌벅적한 장소에 있어도, 심지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라도 시를 쓰는 순간에는 내면에 나 말고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떨 때는 나조차 내 안에 없다. 가을과 겨울뿐만 아니라 모든 계절이 외로움을 안고 있다. 그럴 때 가장 좋은 건 각자의 방식으로 공허한 마음을 채우거나 쓰라린 마음에 약을 바르고 가만히 있는 것인데, 말이야 쉽지 실제로 실천하기는 참 어렵다. 나는 그냥 시간이 지나 상태가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다.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 같은 것이므로.




사랑하는 삶도 살고, 생각하는 삶도 살고


이 책에 실린 글에서는 유독 사랑이 느껴진다. 까만 개 ― 작가의 반려견 ― 와 가족, 친구, 일상, 산책, 계절, 날씨, 꿈, 책, 글, 자신의 삶과 세상까지도. 나는 사랑에 다소 회의적인 사람이지만 인간의 삶에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사랑이라는 말에는 부정하지 못한다. 사실 우리는 모두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마음에 품고 살기도 한다. 왜냐하면… 내가 무언가를 깊게 사랑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까. 사랑이 없는 세상이 얼마나 흉측하게 변해가는지를 두 눈으로 보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p77 - 나는 그 마음을 알고 있다. 기다리는 것과 여태 보내주는 것의 중간 마음을. 떠난 지 오래된 사람을 여태껏 보내주는 마음, 그러면서 혹시나 돌아올까 기다리는 그 마음을.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집에서 현관물을 바라보다가 잠든 자신의 까만 개를 보며 작가가 쓴 글이다. 다만 까만 개는 앙심 같은 건 품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사랑하니까 그립고 그리워서 보고 싶은 마음이 까만 개의 마음에는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해서 미워하고 망치려 드는데. 무언가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기란 참 어렵다. 떠난 존재를 미워하지 않고 그리워하기도 어렵다. 그러다가 서서히 잊다 보면 미움도 사랑도 그리움도 옅어지는 것이다.


사랑과 생각.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돈도 중요하고 건강도 중요하고 평화도 중요하지만, 내가 나의 삶을 가장 행복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사랑과 생각이 불가피하다. 이 책은 담담하게 작가의 일상과 단상을 쓴 책이다. 그러니 일상을 담담하게 사랑할 수도 있고, 그동안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문장 속에서 생각할 수도 있다. 작가와 내가 비슷한 결의 생각을 한다는 사실도 이 책에서 발견했다. 의외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차이다.



p123 - 어떤 마음은 흘러가게 해야 한다. 고여 있는 마음의 둑을 터서 어디로든 흘러가게, 어디에든 닿게 해야 한다.

고이는 마음은 서서히 썩어 들다가 이내 마음이 곪아터지게 만든다. 그러고 나면 아물기까지 많은 시간과 통증이 소요된다. 심한 상처와 흉이 생겨서 다시 예전과 같은 마음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수십 년 동안 아픈 마음을 참고 살다가 정말 아파진 사람을 안다. 몸이 약해지고 원인 모를 두통이나 소화불량이 잦아지고 죽을 때까지 약을 먹어야 하는, 건강했던 시절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어진 사람을 안다. 모든 병의 원인이 스트레스는 아니겠지만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에는 어느 정도 공감한다. 우울증에 걸리면 알 수 없는 통증이 잦아지고 공황장애가 오면 심장이 터질 듯이 아픈 것처럼, 몸과 마음은 온갖 신경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마음의 둑을 터뜨리지 않으면 언젠가 몸과 함께 와르르 무너져버릴 것이다.


흘러가게 해야 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자괴감, 불가항력으로 찾아오는 외로움과 불만, 부당한 처지에 놓였을 때 느끼는 분노와 슬픔, 나와 결이 맞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느끼는 괴로움, 모든 게 증오스러워지는 순간, 세상이 흑백으로 보일 때의 무기력감, 사랑하는 존재를 함부로 여기게 되는 순간은 어디로든 흘러가게 해야 하는 마음이다. 흘러가다가 점점 희석되고 옅어져서 세상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해야 하는 마음.




책의 말미에 간단한 감상(賞)을 쓴 이병률 시인은 "쓸쓸히, 내밀한 열정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세밀한 충돌과 잔금 ― 가늘고 짧은 금(추정) ― 과 그 그림자들을 적어내고 있었습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이 책은 살아가면서 뜻하지 않게 수시로 찾아오는 쓸쓸한 순간과 내면에 존재하는 뜨거운 사랑, 열정, 마음을 담았다. 꾸며내지도 않았고 그래서 담백하고 담담한 글이었다. 정말 좋았다. 자극적이지 않고 시원하고 따뜻한 국물을 떠먹는 기분이었다. 시원하지만 따뜻한 국물 요리.


모든 계절의 다채로운 빛과 색깔과 냄새를 담아낸 책이어서, 어떤 글에서는 여름 냄새가 날 것이고 어떤 글에서는 새하얀 눈밭이 보일 것이다. 빗소리가 들리기도 할 것이고 부드러운 강아지 털이 손바닥에 스치기도 할 것이다. 청각을 시각화하고 시각을 촉각화하는 공감각적 심상처럼, 다양한 감각과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열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작고 가볍지만 무게감이 있는 책이다. 좋은 글이 아주 많아서 밑줄을 듬뿍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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