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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May 28. 2024

나는 얼마나 자라고 있을까

오은×재수 著, <마음의 일> [청소년 그림 시집]


- 제목 : 마음의 일

- 저자 : 오은 글, 재수 그림

- 출판사 : 창비




오은 시인의 글과 만화가 재수의 삽화로 이루어진 청소년 시집이다. 두 사람은 학창 시절에 동창생이었다고 한다. 브런치에는 시집을 주제로 독후감을 쓴 적이 없으니 이 책이 처음이다. 시집은 시마다 감상평을 모두 붙일 수 없으니 ― 사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면 독후감이 한 편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한 후 인상 깊게 읽은 시를 몇 편 소개하는 게 모범적인 독후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독후감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하게 독파하며 읽은 시집이 없기도 했고, 요즘에는 시집도 자주 읽으려 하지만 소설도 에세이도 산문도 아닌 '시'로 독후감을 쓰자니 이렇다 할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고등학생 때 샀던 이 시집이 떠올랐다. 그림과 만화 사이에 있는 창의적이고 따뜻한 삽화가 가미되어 시의 맛을 훨씬 끌어올리는 청소년 시집.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제 다시 이 책을 처음부터 천천히 정독했다. 역시 좋은 책이다. 아이들을 위한 동시와 어른들을 위한 시 사이에 있는, 순수함과 조숙함을 모두 아우르는 경계 속 작품들은 시를 읽고 싶지만 아직 시에 친하지 않은 사람이 읽는다면 좋을 것 같다.


시의 세계는 끝이 없다. 문학이라는 이름 안에 놓인 것들의 가능성은 무한이다. 어떤 것도 시가 될 수 있지만 아무것이나 시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성숙하지만 앳된 아이들


나는 청소년 문학을 좋아한다. 청소년 문학 공모전에서 수상한 작품들을 훑어보기도 한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는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 이희영 작가의 <페인트>는 고등학생 시절에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이 책은 청소년 시집이다. 사실 처음에는 그림 시집으로만 알고 있었기에, 책의 주제이자 대상이 청소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동시보다는 성숙하고 단단하지만, 흔히 '어른들'의 사유로 여겨지는 일반 현대 시보다는 앳된 느낌이 물씬 풍긴다. 아직 덜 자란 아이들의 철없는 웃음을 들었고, 자라나는 나무처럼 산뜻하고 묵직한 내음을 느꼈다. 사춘기라고 부르는 청소년기는 한 인간의 생애에서 가장 크고 격렬한 성장이 이루어지는 시기다. 인간은 평생 성장하고 변화하지만, 결코 이때만큼 변덕스럽고 혼란스러운 과도기를 맞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내가 뭘 잘하는 지도 모르고 나의 장점은 떠오르지도 않았던 어린 날. 이 시집은 바로 그 미성숙과 조숙을 아우르는 시절만의 고민과 성장통을 담고 있다. 그리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조금씩, 자연스럽게 사그라든 어린 학생만의 순수하고 밝았던 에너지도.


사실 고작 20대 초반에 불과한 나도 요즘 10대 청소년들은 무섭다. 길을 걷다가 무리를 지어 걸어오는 학생들을 보면 아무 이유 없이 괜스레 위압감을 느끼기도 한다. 학생들은 늘 그랬다. 아이들은 언제나 '요즘'에서 밀려난 메마른 어른과 겨우 미성년자 딱지를 뗀 성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개중에는 뉴스에 나올 정도로 정말 무서운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대부분의 아이들 혹은 학생들의 마음에는 아직 시들지 않은 빛과 온기가 남아 있다고 믿는다. ― 혹은 그렇게 믿고 싶다. 아니면 정말 무서울 테니까…. ― 저마다 자신의 목표를 가지고, 특별한 꿈이 없더라도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며 세상을 사랑할 힘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읽으면 책은 훨씬 안온하고 말랑해진다.




p20~21 - 이렇게 방황하는 나의 궤적이 모이고 모여 / 또 하나의 문이 되지 않을까 / 나는 문이 되어 가고 있다 / 그런 상상을 하면, 열리고 싶다 / 동시에 내 안으로 꼭꼭 숨고 싶기도 하다 / 문득 / 문의 정면과 책의 정면이 닮아 있다


본격적으로 책 속에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는 시다. 인생이란 안이 보이지 않는 수많은 형태의 문을 마주하는 일과 같다고. 문의 정면과 책의 정면이 닮아 있다는 문장이 인상 깊었다. 책을 읽는다는 건 단순히 글을 머릿속에 입력하거나 지식을 습득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몰랐던 나를 발견하거나,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문을 갑자기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별안간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세상에 발을 들이기도 한다. 책을 읽는다는 건 문을 열고 나가 하나의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테니.




시집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인상 깊은 구절이나 가장 마음에 드는 시를 보여주고 싶어서 하나씩 가져와 보았다.


1부 - 딴이 우리를 꿈꾸게 한다고

<장래 희망>

p77~79 - 가슴에 잠깐 물결이 쳤는데 빗금이 그어지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는데 / 장래는 아직 멀고 희망은 어딘가 있을 것 같아 아무렇지 않은 척 / 잠시 후를 향해 초침처럼 살금살금 걸어갔다


2부 - 봄 방학처럼 짧았다

<졸업>

p108 - 여기가 아니라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많다고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3부 - 잘 봐, 떠오를 거야

<아무의 일>

p158~161 - 집에 있는 모든 조명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어떤 불도, 어떤 빛도 없는 곳에 자발적으로 기어 들어갔다 / 불빛이 없어도 비치는 것이 있었다 그것과 함께 그것 옆에서 나는 아무렇지 않게 잠들었다 / 아무도 내가 몇 시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 다만 나와 가까워지는 나는 안다 새 불과 함께 새 빛 옆에서 / 불빛을 껴안고 / 지금 여기에 아무쪼록 나는 있다


4부 - 내내 나일 거야

<아침의 마음>

p192~193 - 눈을 떠도 다 보이는 것은 아니다 / 세수를 해도 다 씻기는 것은 아니다 / 걷고 있다고 해도 꼭 어디론가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 가만있다고 해도 법석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 입을 다물고 있다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심장이 뛸 때마다 / 속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 발끝에 고인 눈물이 굳은살로 박이는 아침 / 바깥이 밝다고 안까지 찬란한 것은 아니다




불과 이삼 년 전에는 나도 10대였고 평범한 학생이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등학교 생활을 걱정하는 신입생이었고, 고등학교 입학을 걱정하는 중학생이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예민하고 변덕스럽고 우울했던 시기다. 단순히 사춘기의 호르몬 영향이나 갑작스러운 성장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지금의 나와 몇 년 전의 나는 크게 다르지도 않다. 여전히 모르는 게 많고 모르면서도 아는 척을 한다. 혼자 걱정하며 불안에 떨고 시간의 소중함을 모른 채 귀찮다는 이유로 모든 일을 등지곤 한다.


하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그 시절만의 내가 가지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 시집에서 불확실한 장래를 고민하고, 우울과 슬픔을 혼자 앓다가 이내 눈물을 흘리고, 쉬는 시간에 나누는 수다나 방과 후에 먹는 떡볶이로도 한없이 행복해지는 아이들처럼. 친구들을 만나 조금은 흉내 낼 수는 있지만 이미 시간은 지나버렸고, 결코 돌아갈 수는 없는 시절이기에 시를 읽으며 유난히 마음이 뭉근해진 것도 같다. 내가 조금 더 조숙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였다면 일기장에 이런 글을 썼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시를 읽다 보면 문득 궁금해진다. 나는 얼마나 자랐을까, 어떻게 자라고 있을까, 하는 것들.


여담이지만 오은 시인은 언어유희에 굉장히 능통한 작가이다. 산문 <초록을 입고>에서는 아예 자음마다 단어를 모아 언어유희처럼 문장을 만드는 글이 있는데, 이 시집에서는 덜하지만 여전히 단어를 향한 애정과 언어를 다루는 센스가 느껴졌다.





시를 다듬는 삽화의 힘


이 시집의 특별한 점은 '그림 시집'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한두 개의 삽화가 들어간 수준이 아니라, 책에 수록된 시 전체가 그림과 어우러진 책이다. 어떤 시는 시보다는 만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모든 삽화는 연필로 그려졌는데, 부드럽고 온화한 연필선으로 그려진 그림은 단순한 듯하면서도 곳곳에 디테일이 살아 있다. 세밀하게 부분 부분 잘 그린 그림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귀엽다. 특유의 그림체와 더불어 놀라운 창의성이 돋보이는 연출이 많아서 그림을 보며 놀랄 때가 많았다. 발자국을 말줄임표로 사용하거나, 그림과 문장 배열을 아예 뒤집어서 표현하거나. 백문이 불여일견.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한 번 보는 게 빠르다.


말줄임표 같은 발자국
힘이 빠져나갈 때 빠지는 무기력의 바다
기울어진 마음을 따라 기울어지는 세상


시집에 그림이나 삽화가 있다고 하면 조금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상상력을 크게 만들어 주는 삽화의 힘은 크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느꼈다. 아무것도 없이 시만 있었다면 그냥 읽고 넘겼겠지만 그림이 있고 시의 주인공과 화자가 분명하게 드러남으로써 더 많은 이야기를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아이들은 어떤 성격일까, 어떤 과목을 좋아할까,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어 할까, 취미는 뭘까, 가족들과는 주로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그런 시답잖은 상상들.


그림 같은 요소가 있으면 방해되어서 글에 집중이 안 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림 시집을 읽어보는 것도 좋다는 말을 하고 싶다. 친구가 쓴 시에 친구가 그린 그림이라니. 소중한 사람과 함께 어떠한 작품을 만드는 일은 정말 어렵고, 그래서 대단하며 그만큼 부럽다. 친구 사이의 협업은 서로를 온전히 믿고 모든 창작의 자유를 일임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루어질 테니 말이다.


책의 맨 뒷장에 있는 문구는 이 책의 모든 마음을 담아낸 문장이다. 그것을 남기고 오늘의 짧은 독후감을 끝낸다. 글을 쓰는 일에는 어떠한 제약이 없어야 한다. 그게 나 자신이 만들어낸 규칙이라도 말이다. 나도 글을 쓰고 무언가를 상상하는 일이 언제나 마음에 남아 있기를 바라며.


"우리는 자랄 것이다.

마음 때문에 힘들고

마음 덕분에 힘 나는 일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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