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10대는 투쟁이었다-3

방어기제

by 시면

<방어기제: 받아들일 수 없는 잠재적 불안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사고, 행동 수단>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정말 수많은 방어기제로 나는 나를 보호하고자 애썼다. 그 방어기제들이 건강하기에는 내가 너무 어려서 온갖 미성숙한 방어기제들은 가끔 나를 더욱 악화된 상황으로 끌어갔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것이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었다.


그중에서도 갖가지 현실도피를 위한 방어기제들이 내 일상을 차지해서 나는 온갖 만화책과 소설책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몰래 빌려온 책들이 걸리면 그 역시도 폭력의 결과를 낳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와 소설은 내가 현실을 잊게 해주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나는 추리물을 너무 좋아해서 이미 초등학생 때 셜록 홈즈 시리즈를 독파하고 아가사 크리스티를 넘어서서 추리만화에까지 손을 뻗치게 되었다. 명탐정 코난, 소년탐정 김전일, 탐정학원 Q까지. 인간은 살의, 증오, 분노, 원망과 같은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걸 나는 소설과 만화 속 인물들을 통해 배웠고 다행스럽게도 아빠로 인해 억압된 나의 많은 감정 중에 그나마 저 감정들은 아빠와 상관없이 내가 가져도 되는 감정으로 허락할 수 있었다.

추리물을 탐독하던 나는 서서히 다른 만화들로 눈을 돌리게 되는데 로맨스물, 스포츠물, SF물 다양한 장르를 거쳐 도달한 그 다음은 소년만화였다. 당시 한참 시대를 풍미하던 원나블(원피스, 나루토, 블리치)이 연재 중이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만화와 애니를 좋아하는 소녀가 되었다. 내가 본 소년만화의 주인공들은 다들 포기하지 않았고, 어떤 역경이든 헤쳐나갔고, 무너지더라도 다시 일어섰다. 자신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신념을 관철시키고자 하였고, 다치더라도 소중한 이를 지키고자 하였고, 힘들어도 누군가와 함께하고자 했다. 아빠로부터 배우지 못한 정의로움, 헌신, 신념, 의지, 사랑을 여기에서 배웠다.

메이저를 탐독하던 나는 마이너한 장르에까지 손을 뻗치게 되었다. 지금은 명작으로 손꼽히는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만화책인지에 대한 정보들이 없어서 그때도 명작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때의 내가 보게 된 만화들은 기생수, 몬스터, 가시나무왕과 같은 좀 더 철학적이고 깊은 주제, 인간에 대한 고찰을 담은 만화들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인간”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인생에서 처음, 내 자의로 사람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도피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고,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었다.

하지만 그 곳엔 내가 있었다.

글로 세상을 배운 나,

만화로 인간을 배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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