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새벽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연락을 돌렸고 직계가족들은 서둘러 장례식장으로 도착했다. 그리고 상복을 갈아입고 절차에 따라 준비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40년간 외아들이자 맏아들인 남편의 아내이자 맏며느리로 살아오셨다. 장례식도 여러 번 치르셨고 어떠한 순서나 결정을 하는데 막힘이 없으셨다. 하지만 남편을 보내는 마음은 어찌했을지 헤아릴 수 없었다.
엄마는 굉장히 이성적인 성향으로 어떠한 큰일이 있을 때 흔들림 없이 그 자리를 항상 지키고 계셨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감정이 무너져서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는 법이 없으셨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엄마가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의 장례식에서는 자식들을 앞에 두고 한발 물러나 계셨다. 장례식 일정을 조율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여러 가지 결정을 해야 하는 부분에 있어서 모든 결정과 선택을 언니와 나에게 일임하셨다.
"너희들이 알아보고 결정 해...... 엄마 어떻게 했는지 알지?"
"알아, 중요한 건 여쭤보고 할게. 좀 쉬고 계세요. 허리 아픈데 바닥에 앉지 마시고 의자에 앉아 계세요."
언니도 시댁에서 장례를 치른 경험이 있었고 나도 대학생부터 조부모님의 장례식을 경혐했어서 그런지 전혀 모르거나 생소한 절차는 없었다. 아빠는 화장을 해달라고 아주 오래전부터 말씀하셨었다. 자유롭게 훨훨 날아서 오랫동안 가보지 못했던, 젊은 시절 갔었던 해외의 이곳저곳을 다녀올 거라고 하셨었다. 일단 화장을 하는 건 기정 사실화 되어 있었고 수의는 어떻게 할지 고민했는데 엄마는 이미 마음으로 정해 두셨었다.
"아빠는 수의 입는 거 싫다고 하셨어. 갈 때 제일 멋있는 옷 입고 갈 거라고 하셨으니까. 너희 둘 결혼할 때 입으셨던 양복하고 와이셔츠 그리고 제일 화사한 넥타이랑 양복 양말 신겨 드릴 거야. 그때 제일 좋아하셨어."
"알겠어요 집에 가서 챙겨 와야겠네."
큰 결정은 모두 끝마쳤고 상복까지 갈아입었다.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이 조화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생각하고 결정해야 하는 일이 줄지어 있었고 도착한 조화가 어떤 분이 보내신 건지 확인하고 사인했다. 음식을 결정해서 주문하고 몇 인분을 해야 하는지 종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슬픔을 느낄 틈을 주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바쁜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이제 조문객을 맞을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오전 시간 내내 준비를 하고 점심시간이 되면서 가족, 친인척 분들이 도착하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자 본격적으로 조문객들이 많이 오셨다. 시끌시끌하고 대화소리, 간간히 작은 웃음소리도 들렸다. 그 웃음소리가 싫지 않았다. 너무 적막하고 조용한 상갓집보다는 북적이는 모습이 한결 나았다.
오랜만에만난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은 하나 같이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덤덤했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터져버린 친구 몇 명을 제외하고는 잘 버티고 있었다. 다만 배가 고프지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잘 느끼지 못하고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시간에서 한 발자국 멀찍이 떨어져 있는 기분이었다.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 뵙고 오랫동안 뵙지 못했던 가족들 그리고 멀리 지방에서 와주신 친척분들 그리고 안부를 주고 받았지만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 모두가 다 한자리에 모였다.
무엇이 부족하랴...... 아빠는 잘 보고 계실 것이다.
평생 그렇게 함께 했던 배우자가 옆에 있었고 잘 키운 두 딸과 사위들이 상주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장례식장의 분위기가 엄숙해질까 염려할 걱정 정도는 가뿐히 넘기게 해 줄 수 있는 귀여운 손주 2명이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장례식이다. 바쁜 일처리를 어느 정도 끝내고 조화를 받으면서 언니와 앉아 있는데 은행을 퇴직하기 몇 달 전에 언니가 지나가는 말로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너 퇴직하면 안 되는데 대기업 다니는 가족들이 있어야 조화도 많이 오고 장례식장이 북적북적한단 말이야
안 되는데 너 그만두면 안 되는데...... 아 이거 안 되는데......"
"뭐야 아직 멀었는데 뭐 그런 걸 벌써부터 걱정하고 있어! 아하하하 뭐야 진짜 웃겨"
"이거 너 그만두면 곤란해지는데 누구 하나 대기업 들여보내야 하나"
"이제 와서 지금 다들 몇 년 차인데 어딜 어떻게 들어가 진짜 웃겨 아하하하"
그런 이야기를 한지 몇 년 지나지도 않아서 우리는 아빠를 보내드리게 됐다.
하지만 다행히도 대기업 다니는 가족들이 없어도 건실하게 직장 생활하는 형부와 한결같이 묵묵히 일하고 있는 남편 덕분에 장례식은 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