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알람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깼다. 평소 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일어나는 게 힘들지만은 않다. 오늘은 백상예술대상 생방송이 있는 날이다. 그렇게 꿈꿔오던 백상예술대상의 TV드라마 부문 극본상 후보에 올랐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로 거울을 보고는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브런치 프로젝트 2기 지원자로서 매주 고작 한편 작성하는 글이 버거워서 꾸역꾸역 써내려 갔었다. 꾸준함을 이기는 것은 없다고 했던가? 일단 쓰면서 버텨보자라고 했던 나의 글쓰기 인생의 5년을 꽉 채워 가던 시점에 방송드라마 극본에 공모했다. 그리고 내 극본이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더욱더 믿을 수 없었다.
침대에 걸터앉아서 잠시 생각해 봤다. 이 얼마나 꿈꾸던 일이었는지. 그리고 이내 몸을 움직이며 내게 주어진 이 선물 같은 하루를 완벽하게 온전히 다 누리고 말겠다는 야무진 다짐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미루나무 같이 훌쩍 커 버린 아들은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도 있는 듯했다. 중학교 3학년인 아들은 그렇게 바라던 자사고에 합격을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하고 싶은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많아서 질문이 많았던 아이인데 일하는 엄마라고 살갑게 대해주지 못했다. 하지만 아들은 스스로를 챙기며 그렇게 잘 자랐다. 정보력이 많은 엄마라서 진학할 때 좋은 선생님을 붙여 주거나 사설 컨설팅을 알아봐 줄 정도로 열성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런 엄마를 아이는 원망하지 않았다. 가끔씩 작은 충돌이 있기는 하지만 이제는 일하는 엄마라고 글 쓰는 엄마라는 사실을 짐짓 자랑스러워하는 눈치다. '무슨 글 쓰는데? 나도 보면 안 돼?' 하면서 물어볼 때면 궁금해서 알고 싶어 하는 모습이 가끔씩 귀엽기도 하다. (덩치는 귀여움과는 이미 거리가 멀다. 가끔씩 내 어깨에 팔을 올리고 어깨동무를 하니 옆집 청년 같은 느낌이다.)
잠이 덜 깬 채로 소파에 앉아 있으니 막내딸이 와서 냉큼 안긴다.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인 늦둥이 딸은 애교가 철철 넘친다. 내 옆에 비스듬하게 누워서는 엄마의 하루 일과를 물었다.
"오늘 진짜 엄마 거기 TV에 나오는 거야?"
"상을 받아야 나오지, 후보에 올랐다가 상 못 받으면 그냥 후보자 얼굴에만 슬쩍 비치고 집에 오는 거야.
큰 기대를 하지 마세요"
어리광 부리는 막내딸은 뒤로하고 메이크업 샵으로 출발했다. 오늘 준비된 의상은 디올의 블랙 정장이다. 발목까지 딱 떨어지는 바지라인에 힙라인을 살짝 덮은 정장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블랙 구두를 매치하니 이보다 더 시크할 수가 없다. 사실은 처음 가는 시상식인 데다가 방송으로 중계되는 시상식이라 어떤 의상을 입을까 고민했지만 무심한 듯 툭! 걸쳐 입는 블랙 정장이 제격이라는 생각에 픽한 옷이다. 머리는 굵은 웨이브를 넣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화장은 눈매만 살짝 강조하며 고급스러운 느낌을 연출했다.
'아 오늘 헤어 의상 메이크업 너무 찰떡이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무심한 듯 하지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좋네요. 감사합니다' 하고 메이크업 샵을 나섰다. 방금 나 너무 시크했다. 속으로 이 상황이 너무 신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하고 싶지만 이내 경망스러운 마음을 살포시 내려놓고 차분하게 시상식 장으로 향했다.
시상식에 도착해 주위를 둘러보니 정우성, 현빈, 공유 그리고 차은우까지 눈이 돌아가서 미칠 거 같지만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 드디어 극본상 후보작을 발표하고 있다. 심장이 터질 거 같지만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앉아있다. 이윽고 내 이름이 호명되고 무대 옆의 거대한 스크린을 통해 내 얼굴이 비치고 있다.
"드라마 부문 극본상, '어제와 다른 오늘'의 김신아 작가님 축하합니다!"
살다 보니 이런 일이 다 있다. 집에서 아이들하고 지지고 볶으며 처절하게 글만 쓰던 내가 저 무대 위로 올라갈 수상자가 된 것이다. 발로 걸어가는지 손으로 걸어가는지 진공관에 있는 듯한 느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세상에 어머나! 내가 받았다.
5년 전 가정주부라서 햄 볶던 이 김신아가 백상예술대상에서 상을 받았다. 허무맹랑한 꿈이라서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 못하고 있던 꿈이 이루어졌다.
준비했던 수상소감을 깔끔하게 하고 돌아왔다. 내 손에 트로피가 있다. 진정 행복한 하루다. 웃음이 나서 입이 찢어질 거 같은데 최대한 덤덤한 척하고 있다. 집에 가서 가족들과 트로피를 들고 춤이라도 춰야겠다. 오늘은 시크하고 엣지있는 금요일을 완성하고 돌아갈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