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서는 면대면으로 고객을 계속 마주해야 하는 업무 환경으로 인해서 자리를 비우면 바로 표시가 난다. 그래서 업무 중에 잠시 화장실을 가는 것도 다른 일로 자리를 비우는 것도 휴가를 가는 것도 모두 고객의 눈에 쉽게 띄게 마련이다. 자리를 비울 때는 출장 중이라는 팻말을 세워놓고 가거나 휴가일 때는 당당하게 휴가라는 팻말을 세워 놓고 가면 된다. 하지만 급하게 화장실을 가야 하는 일이 생기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옆 직원이 점심교대로 자리를 비우거나 휴가를 가거나 해서 자리를 비운다면 그건 더 심각해진다.
1. 입행 한 달 차, 죄스러워서 화장실 가는 게 이렇게 힘들 수가 없다.
'띵동~' 벨이 눌렸다. 앗차! 이번 고객님 업무만 하고 화장실을 가야지 했는데 또 속절없이 눌러버린 호출벨에 내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다. 요동치는 이 방광은 주책맞고 흥겹게 날 자극 하고 있다. 연수원에서는 여러 가지 지식, 서비스 정신은 그렇게 열심히 가르쳐 주면서 정작 중요한, 그 중요한 제일 중요한 화장실 가는 요령은 왜 가르쳐 주지 않은 건지. 연수원에서 만났던 그 멋진 교수님들이 야속할 뿐이다.
그래 내가 이렇게 화장실을 못 갈 정도로 바보는 아니지 ‘나 나름 융통성 있는 사람이야! 이번에는 가겠어!’라고 생각하며 고객님 업무를 속전속결로 처리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너무 급해 보이는 다음 번호 고객님이 이미 옆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삐약 삐약 병아리 신입행원은 다시 노랗게 질린 얼굴로 업무를 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화장실에 가야 한다. 모든 시선을 외면한 채 화장실에 가려던 찰나 다른 고객님이 성큼성큼 걸어오신다. 난 아직 호출벨을 누르지도 않았단 말이다.
일어나서 황급히 상체를 고정한 채 빠른 걸음으로 객장을 빠져나와 화장실에 들어갔다. 다행이다. 객장에서 하나만 물어보자고 나를 잡는 고객님은 안 계셨다. 거기서 잡혔으면 눈뜨고 못 볼 상황이 벌어질 뻔했다.
객장에 대기 고객님이 적당히 빠지면 분위기를 살피고 화장실에 다녀온다. 이때 벨을 누르지 않았음에도 다음번호가 내 차례라며 성큼성큼 걸어오시는 고객님을 애써 외면하거나(너무 죄송하지만 급박한 상황이면 어쩔 수가 없다.) 혹은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해서요" 하고 황급히 화장실에 다녀와야 한다. 하지만 이때 매우 친절하고 공손한 태도는 기본이다. 나의 편의를 위해 업무 시간에 자리를 비워야 하는데 급하게 오셨던 고객님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화장실에 다녀와서는 앉지 않은 채로 벨을 누르며 자연스럽게 다음 고객님을 모신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죄송합니다. 어떤 업무 도와 드릴까요?"
몸도 마음도 가뿐해졌다. 이때부터는 또 다른 고민거리가 생긴다. 오늘의 점심메뉴를 골라야 한다.
'아 무엇을 먹어야 잘 먹었다는 소리를 들을까?'
혼자서 속으로 심오한 고민을 하면서 업무를 진행한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식사 중입니다' 팻말을 사뿐히 올리고 지갑을 챙겨서 갱의실로 향한다. 다른 팀 직원들과 이미 눈인사로 약속을 잡아놨다. 야무지게 먹고 오리라. 이미 속을 비워 놨단 말이다.
3. 입행 5년 차, 적당히 컨트롤이 가능하다.
이젠 뭐 장트라블타와 요동치는 방광까지도 컨트롤할 수 있는 베테랑이 되었다. 하지만 갑자기 신호를 주는 장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일단 객장을 살펴본다. 자주 방문하는 거래처의 회계팀 직원이나 근처에 사셔서 자주 오시는 나이 지긋하신 엄마 또래의 고객님이 계시다면 일단은 다행이다. 번호를 호출하고 난 뒤 서류를 작성하고 계시는 시간 동안 황급히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자주 방문해 주시는 안면이 있는 고객님이 오셨다.
“어머님(보통 고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만 오랜 시간 거래하신 고객님에게는 친근함의 표시로 어머님이라는 호칭을 쓰기도 한다.) 저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아침부터 고객님들이 너무 많이 오셔서 계속 못 가고 있었어요.”
“어 어 김대리 다녀와요. 내가 여기서 이거 서류 쓰고 있을게 천천히 다녀와요!”
“금방 다녀올게요”
천사 같은 우리 고객님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다녀오라는 말까지 해주신다. 물론 부리나케 뛰어갔다 왔지만 내 자리에 착석해 준 고객님이 철옹성 같다. 아니 그 보다 더 든든하고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다녀오면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친절함을 더한 업무처리까지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업무를 다하고 자리를 나서려던 고객님은 미안한 듯 물으셨다.
“미안한데, 나 이거 통장 커버랑 카드 커버 하나씩 더 줄 수 있을까요?”
“어머나 그럼요 10개씩도 드릴 수 있어요”
“아니야 한 두 개만 줘요, 고마워요. 김대리 점심 맛있게 먹어요.”
이렇게 배려해 주시는 고객님 업무를 하고 나면 입이 찢어질 듯 웃으면서 인사를 한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다음에는 더 친절히 모시겠습니다. 이런 고객님만 있으면 아무리 바빠도 안 힘들다 진짜 안 힘들다.
퇴직할 무렵에 들어왔던 신입 직원이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할 때면 내 신입행원 시절이 생각났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 방광 소중하다. 내가 다음 고객님 업무 해드릴 테니 얼른 다녀와. 죄스럽게 가지 말고 당당하게 걸어서 다녀와."
"대리님 얼른 다녀올게요"
당당하게 가라니깐 후다다닥 뛰어 나간다. 그래도 신입이라서 그런지 다 귀여워 보인다.
화장실에 신입 직원을 보냈는데 옆에서 기다리던 고객님이 이 직원 업무 중에 어딜가냐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