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파악 제대로 하다
유일하게 나의 허접한 서류를 통과시켜준 그 고마운 회사는 성수동에 있는 작은 제조업체였다.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제법 규모가 커지고 회사 대표 홈페이지도 있는 어엿한 중소기업으로 변모했지만 내가 입사할 당시만 해도 직원은 총 10명 안팎의 여직원은 나 혼자일 정도로 작은 회사였다.
그곳에서 나의 역할은 비서/경리/설계보조/총무/견적/구매 등의 일이었고 10개월간 근무하면서 업무적으로 참으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웠다.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사장님과 나를 제외한 모든 직원이 현장에서 밀링, 선반, 머시닝 등의 기계로 철판에 구멍을 뚫거나 쇠를 깎고 다듬는 일을 하셨기 때문에 사무적인 업무는 모두 내가 처리해야 했었다.
가끔 현장에서 하는 검수에도 동원되서 버니어캘리퍼스로 길이를 측정하고 설계도면과 비교하면서 오차를 찾아내기도 했었다.
현장 직원들이 나이 어린 나를 귀엽게 봐주셔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사장님과의 관계는 무척 괴로웠다. 주로 바깥일을 하면서 영업활동을 하시던 사장님은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나에게 풀어내셨다.
정말 말도 안되는 것으로 트집을 잡고 훈계하기를 여러 차례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서 살이 쭉쭉 빠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현장 직원들이 커피를 많이 마시는 것이 내 책임이라고 사장님이 트집 잡으면서 한참 동안 잔소리를 하셨다. 직원들 커피 값이 아깝기도 하셨겠지만 무엇보다 커피 마시느라 바쁜 현장에서 일을 제대로 안한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다. 그걸 직원들한테 얘기하기엔 본인 자존심이 아쉬웠는지 만만한 나에게 직원 관리 못한다고 훈계를 하셨다.
예나 지금이나 커피를 안 마시는 사람으로서 직원들 커피 마시는 것 가지고 잔소리를 해대는 사장님이 무척 원망스러웠다.
(어린 마음에 커피를 한잔도 안 마시는 나에게 직원들 커피 마시는것 가지고 훈계하는 게 무척 억울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마음의 상처가 켭켭이 쌓여가던 어느날, 급기야 사장님의 말도 안되는 트집에 터지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하면서 눈물을 쏟아내었다. 다음날 바로 사직을 표하고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마친 후 회사를 완전히 관뒀지만 사장님에 대한 트라우마가 워낙 강해서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사장님 휴대폰과 똑같은 벨소리만 들어도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피는 버릇은 한동안 지속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회사 대표 로고 조차 없을 정도로 작은 신생 회사였으나 회사가 성장할 때 나도 같이 성장하는 기분이 들었고 미력하게나마 회사에 기여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만약 내가 그때 직장을 관두지 않고 버텨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해도 아마 버티지 못하고 직장을 관뒀을 것 같다. 사장님의 말도 안되는 훈계와 잔소리를 견디기에 난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나의 첫 직장은 지독한 맘고생 때문에 상처로 얼룩졌고 한동안 직장생활을 하기 싫을 정도로 심신이 지쳐 있었다. 그렇게 3-4개월 쉬면서 편입을 준비하게 되었는데 공부를 전혀 안한 상태에서 치룬 시험이라 큰 기대를 안했지만 덜컥 편입에 합격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편입시험이 끝난 후 당연히 떨어질 거라 생각하고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에 편입시험 일정과 별도로 다시 직장을 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