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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학생 시절과 직장인으로서의 성장과 실패

추락한 자존감

by SARASA

두번째 직장은 대기업 파견직이었다.

대기업 계약직이 아니라 파견직, 즉 파견회사에서 대기업에 나를 소개 시켜주고 내 월급의 일정부분을 수수료로 가져가는 계약직보다 못한 파견직이었다.

계약직이나 파견직이나 고용불안 측면에서 별차이 없지만 그래도 기업과 계약한 직원은 수수료를 떼지 않으니 파견직이랑 동일한 업무를 해도 급여는 더 많았다.


그래도 딴에는 입사 당시에 두번째 직장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제일 좋았던 게 조직이 갖춰져 있어서 사장님과 직접 마주칠 일이 없어서 좋았고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장님에 대한 트라우마가 워낙 심해서 면접 볼 때 주요 업무가 사장님 비서인지 여러 차례 확인했었다.) 두번째는 전용 책상에 개인 컴퓨터가 놓여져 있는게 좋았고 세번째는 철가루를 밟고 사무실에 들어가지 않아서 좋았다. 마지막으로 주5일 근무라서 정말 좋았다.


첫 직장은 사무실에 들어가려면 현장을 지나가야 했는데 현장 바닥에 철가루가 난무해서 신발이 남아나지 않았고 창문도 없는 2평정도 되는 사무실에 다른 직원들과 컴퓨터를 공용으로 사용해야 할 정도로 사무실 환경이 열악했다.

비록 파견직이고 월급이 20만원정도 줄었지만 나는 두번째 직장을 입사할 때 정말 정말 좋아했다.




두번째 직장에 입사할 때 혹시 입사 취소 될까봐 편입한 대학교에서 야간에 공부해야 하는 사실을 숨기고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첫 학기는 여자저차 우여곡절 속에 잘 넘기고 두번째 학기에 바로 휴학하고 다시 학교를 다녀야 하는 시기가 돌아왔다.


1년간 직장 생활하면서 한 학기 등록금을 모아 놓고 잘려도 어쩔수 없다는 마음으로 오랜 고민 끝에 팀장님께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팀장님께서 처음엔 무척 당황하셨지만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고 팀원들에게도 나의 정시퇴근을 이해하라고 말씀 해주셨다. 팀장님과 팀원들의 배려로 나는 본격적으로 직장과 학교생활을 병행하기 시작했고 팀장님께서 2년간의 파견직을 끝내면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주신다고 약속도 해주셨다.


직장 다니는 동안 전문대 다니던 시절의 학자금 대출과 그리고 편입한 학교의 등록금을 내기 위해서 월급의 80% 이상을 저축하고 독하게 아끼면서 살았다.

가끔 야근을 하면 발생되는 수당과, 그리고 외근이나 출장 갈 때 생기는 수당을 활용해서 차비나 밥값에 보탰고 여름휴가비가 나오면 그 돈을 아껴서 학자금 대출금을 갚기 위해 보탰다.


결정적으로 펀드가 본격적으로 일반 사람들에게 재테크로 활용되기 전, 코스피 지수가 낮았던 그 시절에 은행원의 권유로 우연히 가입한 적립식 펀드가 거짓말처럼 코스피 지수가 점점 높아지면서 펀드 수익률이 꽤 좋았고 학교 다니는 내내 등록금은 물론이거니와 학자금 대출금을 전부 갚아냈다. 학기 등록할 때마다 펀드를 하나씩 깨면서 등록금을 충당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들 중에 한명이라고 생각한다.




잠시 팀장님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그분은 나에게 정말 고마운 분이고 은인 같은 존재이다.

직장 다니는 내내 힘들고 어려운 일 있을 때마다 나의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시고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던 진정한 리더셨다.

특히, 회사 일이 잘 풀리지 않고 힘들어서 고생할 때 업무 조정까지 하시면서 나의 일을 줄여주셨고 무엇보다 가장 고마웠던 건 대졸 공채 사원들과 동일한 업무를 주시면서 파견직인 나를 인격적으로 대우 해주셨다.

대내외적으로도 나를 사무보조 여직원으로 소개하시는 게 아니라 남자대졸 공채사원과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해주셨고 나에게 비전과 꿈을 이야기하시면서 직장생활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아낌없이 베푸셨다.


가끔 업무적으로 실수하거나 잘못하면 엄하게 꾸중을 하시기도 했지만 뒤끝이 없었기 때문에 팀장님한테 업무 외적인 일로 상처 받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파견직인 나는 연말에 성과급을 받을 수 없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팀장님께서 사비를 털어서 나에게 성과급을 주시기도 하셨고 또 팀 실적이 좋아서 회사에서 우리 팀에게 상을 주실 때 상금도 나눠주셨다.

그리고 입사한지 2년 반이 지나고 나서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고 팀장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나를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주셨다. 대졸공채와 똑같은 3급으로 전환이 되지 않았지만 4급으로 정규직이 확정 되면서 급여가 꽤 많이 올라갔다.

그렇게 직장 생활을 이어가던 중 회사에 대대적인 인사변화가 일어나면서 팀장님께서 다른 팀으로 발령이 나고 새로운 팀장님이 오시게 되었다.




새로 오신 팀장님께서도 나를 좋게 보셨는지 인사 평가때 점수를 후하게 주시면서 3급으로 올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잠시 직급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1급은 부장, 2급은 차/과장, 3급은 사원/대리인데 대졸 공채로 들어온 직원은 3급부터 시작하고 나처럼 파견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고졸/초대졸 사원은 5급이나 4급부터 시작한다. 4-5급은 아무리 오랫동안 일해도 대리로 진급이 거의 불가능하고 사원으로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아주 가끔 4급 사원이 3급으로 올라가면서 대리로 진급한 케이스는 있었지만 아주 드물었다.


그 아주 드문 케이스에 해당되고 싶어서 부단히 애쓰고 노력했지만 행운의 여신은 나의 편에 서지 않았고 입사 5년차에 진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비록 파견직으로 입사해서 대졸로 학벌이 업그레이드 되었지만 출신 성분이 파견직에 초대졸로 시작했기 때문에 사실상 진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진로문제로 고민하던 그 시절, 극심한 슬럼프로 하루하루 무기력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을 정도로 낮아진 자존감으로 인해 심한 자격지심과 열등감으로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진급에 실패하면서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무조건 쉬겠다는 일념 하에 필리핀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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