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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Sep 06. 2023

리조트 여행을 와서, 베이비시터를 쓰면서, 책을 읽고

사색을 하며

거북맘 카페(느린 아이 키우는 부모들의 카페)에서 세부가 시터천국이라는 글을 읽고 세부로 여행지를 정했다.

준비를 한다고 이것저것 알아보고 계획을 세웠지만, 역시 여행은 현지에 가서 이것저것 조율하는 게 제맛이긴 하다는 생각에 적당히 알아보고 왔다.


계획과는 조금 달랐지만, 여하튼 시터를 구했고,

아이들은 시터와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적어도 나와 남편은 편했다.


덕분에 나에게는 리조트에 와서 무려 책 한 권을, 그것도 400페이지에 달하는 책 한 권을 읽을 수 있었다.

제목은 “이상한 나라의 괜찮은 말들. “

영국, 아일랜드의 장애인과 자원봉사자의 생활공동체인 캠프힐에 머물렀던 작가의 이야기인데,

1차로 필력에 감탄했고, 2차로 현재의 내 여행과 과하게 대조됨에 웃음이 나왔다.


사람들을 피해, 현실을 피해 떠난 캠프힐 여행에서 사람을 통해, 그리고 장애인들과의 생활을 통해 얻는 깨달음들을 읽으며,

캠프힐 여행 너무 내 취향이다, 뭐 그런 생각을 하며 눈물도 짜고 웃음도 터트리곤 했지만

내가 있는 곳은 세부의 한 리조트의 선베드였다.





그래, 나는 세부의 한 리조트의 선베드에서,

책을 읽고, 생각을 하고, 나는 지칠 줄 모르는 우리 아이들이 리조트 수영장에서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700페소(약 17,000원)를 내고 며칠간 시터를 쓰면서 (그런데 리조트 데이유즈 비용 2,100페소(약 5만 원)를 내야 해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크긴 하지만)

깨달은 사실은,


1. 역시 우리 부부에겐 사람이 필요했어.

우리에겐, 그 누구든, 우리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 필요했어.

우리가 항상 화가 나있고, 서로에게 가시 돋친 말들을 던졌던 것은, 우리 둘 다 너무 지쳐서야.

아이들에게 어떠한 정신질환이 있든, 그것은 핑계일 뿐,

그동안 우리 둘에게 주어진 그 막중한 삶의 무게를 0.1g이라도 덜어줄 사람이 있었다면 우리의 갈등은 좀 덜했을까.


2.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그 느낌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

현재 내가 있는 리조트는 약간 외진 곳에 위치해 있어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오늘 저녁 식사를 먹기 위해 잠깐 리조트 밖으로 툭툭를 타고 외출하긴 했지만,

내일은 또 뭐 하나 검색하고 있는 나를 보며,

사실상 쉬러 왔으니, 리조트에서 아이들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남이 차려준 밥을 챙겨 먹고,

조금 걷고, 500페소짜리 마사지를 받으며 쉬고 해도 충분하다.

왜 나는 항상 뭘 못해서 안달인가.

왜 뭘 못하면 조급하고 불안한가.

뼛속까지 경쟁사회의 한국인임을 팍팍 티 내며 사는 나는

이 리조트에서 주어진 잠시의 여유도 용납을 못하고 있었다.

내일은 더 쉬자.

쉴 수 있을 때 더 쉬자.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전쟁이니까.


3. 우리 부부는 둘이 앉아서 이야기할 주제가 참으로 적다.

남편이 자신의 베프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남편이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인가 보다, 혹은 남편이 얘기를 재밌게 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며 부러워 하지만,

어찌 보면 나도 나 스스로가 남편의 이야기에 그다지 반응을 많이 해주지 않는, 나 스스로가 good listener가 아니라서 우리의 대화는 그토록 메말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렇게 모처럼 여유가 주어졌을 때 남편과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고,

잠시라도 둘째의 발달에 대해 첫째의 산만함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 둘에 대한 얘기를 나누어 보자.



세부 4일 차, 그렇게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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