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을 하며
거북맘 카페(느린 아이 키우는 부모들의 카페)에서 세부가 시터천국이라는 글을 읽고 세부로 여행지를 정했다.
준비를 한다고 이것저것 알아보고 계획을 세웠지만, 역시 여행은 현지에 가서 이것저것 조율하는 게 제맛이긴 하다는 생각에 적당히 알아보고 왔다.
계획과는 조금 달랐지만, 여하튼 시터를 구했고,
아이들은 시터와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적어도 나와 남편은 편했다.
덕분에 나에게는 리조트에 와서 무려 책 한 권을, 그것도 400페이지에 달하는 책 한 권을 읽을 수 있었다.
제목은 “이상한 나라의 괜찮은 말들. “
영국, 아일랜드의 장애인과 자원봉사자의 생활공동체인 캠프힐에 머물렀던 작가의 이야기인데,
1차로 필력에 감탄했고, 2차로 현재의 내 여행과 과하게 대조됨에 웃음이 나왔다.
사람들을 피해, 현실을 피해 떠난 캠프힐 여행에서 사람을 통해, 그리고 장애인들과의 생활을 통해 얻는 깨달음들을 읽으며,
캠프힐 여행 너무 내 취향이다, 뭐 그런 생각을 하며 눈물도 짜고 웃음도 터트리곤 했지만
내가 있는 곳은 세부의 한 리조트의 선베드였다.
그래, 나는 세부의 한 리조트의 선베드에서,
책을 읽고, 생각을 하고, 나는 지칠 줄 모르는 우리 아이들이 리조트 수영장에서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700페소(약 17,000원)를 내고 며칠간 시터를 쓰면서 (그런데 리조트 데이유즈 비용 2,100페소(약 5만 원)를 내야 해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크긴 하지만)
깨달은 사실은,
1. 역시 우리 부부에겐 사람이 필요했어.
우리에겐, 그 누구든, 우리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 필요했어.
우리가 항상 화가 나있고, 서로에게 가시 돋친 말들을 던졌던 것은, 우리 둘 다 너무 지쳐서야.
아이들에게 어떠한 정신질환이 있든, 그것은 핑계일 뿐,
그동안 우리 둘에게 주어진 그 막중한 삶의 무게를 0.1g이라도 덜어줄 사람이 있었다면 우리의 갈등은 좀 덜했을까.
2.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그 느낌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
현재 내가 있는 리조트는 약간 외진 곳에 위치해 있어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오늘 저녁 식사를 먹기 위해 잠깐 리조트 밖으로 툭툭를 타고 외출하긴 했지만,
내일은 또 뭐 하나 검색하고 있는 나를 보며,
사실상 쉬러 왔으니, 리조트에서 아이들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남이 차려준 밥을 챙겨 먹고,
조금 걷고, 500페소짜리 마사지를 받으며 쉬고 해도 충분하다.
왜 나는 항상 뭘 못해서 안달인가.
왜 뭘 못하면 조급하고 불안한가.
뼛속까지 경쟁사회의 한국인임을 팍팍 티 내며 사는 나는
이 리조트에서 주어진 잠시의 여유도 용납을 못하고 있었다.
내일은 더 쉬자.
쉴 수 있을 때 더 쉬자.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전쟁이니까.
3. 우리 부부는 둘이 앉아서 이야기할 주제가 참으로 적다.
남편이 자신의 베프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남편이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인가 보다, 혹은 남편이 얘기를 재밌게 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며 부러워 하지만,
어찌 보면 나도 나 스스로가 남편의 이야기에 그다지 반응을 많이 해주지 않는, 나 스스로가 good listener가 아니라서 우리의 대화는 그토록 메말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렇게 모처럼 여유가 주어졌을 때 남편과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고,
잠시라도 둘째의 발달에 대해 첫째의 산만함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 둘에 대한 얘기를 나누어 보자.
세부 4일 차, 그렇게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