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반틴 카페와 레모니 카페
보통 여행을 1주일 이내로 가면, 그리고 더 정확히 말해서는 아이들이랑 여행을 다니다 보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곳 위주로 가게 되고, 좀 힙하다 싶은 곳을 간다 해도 간신히 한번 가서 그 공간에 잠깐 몸을 담그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보라카이 섬 자체가 상당히 작았던 덕분에, 그리고 우리에게 보름이라는 넉넉한 시간이 주어진 덕분에, 게다가 3명의 투덜이 초등학생들이 수업에 들어가 있었던 덕분에 언니와 나는 좋았던 카페를 재방문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그중 하나는 레모니 카페. 보라카이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언니가 구매한 여행 가이드북을 읽는데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상큼한 느낌의 카페가 바로 이 이름마저 상큼한 레모니 카페였다. 보라카이에서 가장 핫한 디몰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이 카페는 그냥 지나치기 힘들 정도의 밝은 매력을 뿜으며, 이미 많은 서양인들을 매료시켜서 만석일 때도 있었다.
필리핀은 커피가 맛없기로 유명한데, 우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위해 아무 카페나 들어갔다가 커피 가루를 물에 타서 얼음만 넣은 커피에 몇 번 당했던 터였다. 제발 우리가 아는 그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셔도 된다며 레모니 카페의 야외에 자리가 있을 때 냉큼 앉아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여 마셨는데, 바로 이거였다. 우리가 원했던 그 아이스 아메리카노 맛이었다! 첫날엔 에그 베네딕트와 함께, 두 번째 방문엔 파니니와 함께 커피를 들이켰다. 기가 막히게 구부러진 나무 옆 테이블에 앉아, 언니와 나는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들이켰고, 3초간의 침묵이 흘렀다. 진한 행복감이었다. 우리는 보라카이에서 가장 핫한 곳에서 '멀쩡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먹기 아까운 비주얼의 브런치 메뉴를 함께 즐기고 있었다. 왜 그런 내 모습이 항공뷰 보듯 보인 걸까. 나중에 나는 분명 이곳을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것을 그때 커피를 마시면서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동행한 둘째에게는 포키 한통이 주어졌다. 네가 이 걸 다 먹을 때까지 엄마와 이모는 이 행복을 누릴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둘째가 포키를 다 먹자 언니는 둘째에게 띠띠뽀 영상을 쥐어줬다. 휴대폰으로 영상을 보여주면 아이가 무슨 큰 병에 걸릴 수 있는 것처럼 난리를 치던 나였지만, 레모니 카페에서 우리는 띠띠뽀 영상을 보며 조용해진 둘째를 옆에 두고 우리는 느릿하게 브런치를 마쳤다.
그러나 내가 단연 최고로 꼽는 보라카이의 명소는 블라복 비치 근처의 레반틴 호텔의 카페. 관광객들이 몰려 시끌벅적한 화이트비치의 디몰과 달리, 여유롭게 카이트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 블라복 비치를 따라 조금 걸으면 나오는 현지 느낌 가득한 이 호텔의 카페. 혼자 왔었다면 나는 이 호텔에 숙박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뙤약볕 아래 이 카페를 찾는다고 헤매고 다닐 때, 둘째는 덥고 다리 아프다며 나에게 안아달라고 얼마나 보챘는지 모른다. 언니와 나는 서로 번갈아가며 둘째를 들쳐 엎고 이 카페에 첫 방문을 했다. 우리는 땀을 닦으며 블라복 비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앉아, 센스 있는 여자 종업원에게 커피를 주문했다. 언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나는 아이스 라테를 마셨고, 한 모금 들이키자마자 커피 맛에 대해 극찬을 했다. 언니는 여자 종업원에게 이 커피가 우리가 마셔본 커피 중에 최고라고, 꼭 그 얘기를 하고 싶은데, 영어를 못해서 너무 아쉽다는 마음을 내비쳤다.('그래! 이런 순간이 바로 영어공부에 내재적 동기가 생기는 순간인 거야. 한국 가면 바로 공부시작하길 바라'~라고 했지만, 언니는 아마 또 현실의 벽에 부딪혀 영어 공부를 까맣게 잊고 있겠지.)
두 번째 방문 때는 첫날 방문했던 좌석 말고 키친 쪽 바에 앉아서 유머러스한 남자 종업원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커피를 마셨다. 종업원에게 얼음을 더 달라고 하니 냉동고에서 얼음을 꺼내서 컵에 골인시켜보겠다고 한다.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진짜 할 수 있냐고 물었고, 종업원은 당연히 장난이라며 웃었다. 나는 그런 가벼운 농담에 과하게 깔깔 거리며 웃었다. 마음에 쏙 들었던 장소에서 만난 의외의 농담이 그 순간의 행복감을 배가 시켰다. 반전은, 첫날 마셨던 커피가 압도적으로 더 맛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유쾌했던 레반틴 호텔 카페의 두 번째 방문에도 매우 만족했다.
우리가 이곳에 한달살이를 했다면, 마음에 쏙 들었던 이곳에 더 자주 왔을 것이다. 1년 이상 살았다면 단골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보름이란 기간도 너무나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마음에 쏙 들었던 곳을 여행기간 동안 재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롭게 깨닫게 된 여행의 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