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기대 넘치던 여행
둘째 맑음이는 두어 달 전부터 언제 태국에 가는 건지 매일 물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유치원을 안 가기 때문이다. 유치원이 싫은 건 아니다. 그저 다른 친구들이 유치원에 갈 때 자기는 안 가는 경험을 해보고 싶은 거였다. 친구들이 '맑음이는 왜 오늘 유치원에 안 왔어요?'하고 물으면 선생님께서 '맑음이는 태국으로 여행 갔어요!'라고 대답해 주시기를 바랐다. 학기 중에 유치원 결석한 친구들의 결석 사유를 줄줄 꾀고 있던 맑음이. 제주도로 여행 가는 친구, 해외여행 가는 친구, 하다못해 아파서 유치원을 쉬는 친구까지도 부러웠다. 그런 맑음이가 드디어 엄마의 방학과 함께 태국에 간다. 기차를 좋아하는 맑음이의 여행을 더 특별하게 하기 위해 치앙마이에서 방콕까지 나이트 트레인을 타고 이동하는 이벤트도 일정에 넣었다. 그것이 40줄 들어선 애미애비에게 얼마나 고된 일정이 될지 알면서도 말이다.
예비 초5 세상이의 여행 가방에는 학원숙제가 가득이었다. 이걸 할지 안 할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할지도 모르니까 일단은 싼다. 영어학원 수학학원 논술학원까지 다니는 세상이에게 8일의 공백은 크다. 아, 고작 8일인데. 아직 학원숙제에 메이지 않고 실컷 놀아도 되는 나이 아닌가, 예비 초5 따위가 뭐 어때서. 우리 학교 고2들도 학기 중에도 해외여행 가고 하는데 예비 초5가 뭐!! 그러면서도 비싼 돈 내고 다니는 학원에 전기세 보태줄 생각 하니 배가 좀 아프다. 아 그런데 배가 좀 아픈 건 나일뿐, 세상이는 숙제는 챙기지만 할 마음은 크게 없다. 괜찮다. 뒷일은 돌아가서 생각하자. 때론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 아무 일도 안일어나더라. 며칠 조금 바쁠 뿐. 세상이는 이번 여행에서 아빠와 아시아에서 제일 긴 짚라인을 탔던 경험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했다. 짚라인 투어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고 유일한 어린이 었다고 한다.(나는 그 시각, 맑음이와 코끼리 똥으로 종이를 만드는 체험을 하고 있었다.)
나에게 이 여행은, 취향의 발견이다. 결혼 전 배낭을 메고 보름간 방콕-치앙마이-라오스 루앙프라방- 방비엥-비엔티엔- 다시 방콕으로 돌아와 한국 컴백을 했던 자유로운 영혼의 나는 그때 뭐가 좋은지 확실했다. 자주 가슴이 뛰었다. 새로운 것에 설렜다. 기본적으로 행복한 사람이었다.
결혼, 그리고 연이어 허니문 베이비로 태어난 세상이 육아, 5살 터울로 태어난 자폐 스펙트럼을 지닌 맑음이 육아 6년 차, 그리고 15년 차 매너리즘이 올랑 말랑 하는 교사의 삶, 나는 취향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최근 읽었던 김민철 작가의 파리산문집 '무정형의 삶'을 읽으며 가장 부러웠던 점은 작가가 '취향'과 '선호'가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뭘 좋아하지?라는 질문에 앞서 나의 판단 기준은 '아이들에게 득이 될까?'였다. 사실 그 책을 읽으면서도 기본적으로 냉소적이었던 것은 '뭐야 이 사람은 애가 없잖아. 그러니까 취향을 분명히 드러내고 살 수 있는 거지!'였는데, 생각해 보면 그것도 아니다. 애가 있다고 취향이 없어지나? 그건 내가 우선순위를 그렇게 설정했기 때문일 뿐이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드넓은 초원의 코끼리 카페, 초록과 버스킹 음악이 아름다웠던 코코넛 마켓, 그리고 예술인의 마을 반캉왓을 걸으며 아, 나 이런 거 좋아했던 사람이지, 다시 한번 깨닫는다. 여행은 늘 그랬다. 일상에 파묻혀, 아이들 케어하느라, 학교에선 또 담임 역할하느라, 부원으로서 업무 하느라 내 취향이 뒷전이었지만, 여행에서는 온전히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롯이 내 감정에 집중할 수 있다. 그것이 아이들과 함께라고 해서 안될 것은 없다. 하지만 취향은 변하기도 한다. 치앙마이에서 방콕으로 넘어가는 나이트 트레인의 의자가 침대로 변신하는 순간, 나는 생각했다. 아, 나 이제 40인데 기차에서 자는 건 좀 많이 피곤하겠다! 다음부턴 나이트 트레인 금지~!!
이번 여행에서는 괜한 것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수많은 곳을 여행 다녔지만 여행에서 몇 푼 아껴봤자 굉장한 부자가 되지도 않더라. 여행 왔을 땐 먹고 싶은 것 먹고 사고 싶은 것 사도 괜찮다. 누가 뭐래도 괜찮다. 다시 한국 돌아가면 나는 또 성실하게 일하며 생활비를 아껴가며 월급쟁이 생활을 할 거니까. 그리고 정년까지 일 할 수 있도록 건강관리도 게을리하지 않을 거니까.
아이들의 결석 사유가 되었던 여행은, 내 삶의 출석 체크가 되었다. 나의 인생에서 여행의 의미와 나의 취향, 그리고 설렘을 좇아서. 그러니 다음에도 또 떠날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혹은 언젠가는 나 혼자서도. 유치원 결석 사유가 아니라,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