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책임에 대하여

by 메이

육아 11년 차임에도 여전히 육아는 어렵다. 세상이가 초등 고학년이 되니 오히려 더 어렵다. 이 아이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이 아이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가. 내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알 듯 말 듯한 그 거리를 매일 새롭게 배운다.


세상이는 ADHD라는 이름을 가진 특성과 함께 자라는데, 그 덕에 더 분명해진 면도 있고 더 안개처럼 모호한 면도 있다. 집중하는 대상은 누구보다 깊지만, 기다림과 감정은 예고 없이 격하게 흐른다. 그 진폭을 이해하려는 과정이 종종 나의 한계를 드러내곤 한다.


오래전에 읽었던 미치 앨봄의 『Tuesdays with Morrie(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죽음을 앞둔 모리 교수는 “다시 태어나도 자식을 낳겠는가?”라는 질문에 주저 없이 “예스”라고 답한다. 그 이유를 설명하며 그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full responsibility(전적인 책임)을 지는 경험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말한다. 그 책임이란 단순히 양육이 아니라, 아이의 삶 전체 — 행복, 안전, 미래, 감정, 실패, 성장 —을 함께 짊어지는 일이다. 모리 교수에게 그것은 삶이 줄 수 있는 가장 멋진 경험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이 전적인 책임이라는 것이 과연 축복이기만 할까. ADHD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동안 나는 내 그릇이 얼마나 작은지 수없이 확인한다. ‘다른 방식으로’ 자라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얼마나 부족한지도 깨닫는다. “그건 틀렸어. 그렇게 하면 안 돼.” 이 말이 얼마나 빠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지. 직업이 교사라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기준이 선명한 사람일수록 판단도 빨라지니까.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과정이 곧 나를 키우는 과정이라는 말이 생겨났나 보다. 나는 오늘도 탐탁지 못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본다. ADHD 특유의 산만함이나 충동성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 때가 있고, 그 눈빛이 아이의 성장을 막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그 눈빛을 유지한 채 서 있다. 참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아이러니 속에서 조금씩 배운다. 아이의 삶에 책임을 지는 일은 결국 아이의 삶을 통제하는 일이 아니라, 그 방식이 내 예측과 달라도 지켜보며 함께 성장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모리 교수의 말처럼, 그 책임은 여전히 멋진 일이다. 비록 힘겹고 어설퍼도, 축복이란 결국 이렇게 불완전한 형태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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