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앞으로 4년
예비 초5인 첫째는 인생의 절반을 태권도 학원에 다녔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아이를 키우며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태권도. 태권도는 단연 가성비 사교육의 끝판왕이다. 그래서 태권도를 안 보낸다는 선택은 늘 어딘가 아깝게 느껴진다. 태권도가 싫다는 둘째에게는 끝내 설득에 실패했다. 대신 그 빈자리를 메우려 수영, 인라인스케이트, 축구를 전전했는데, 아무리 해도 태권도의 가성비는 결코 따라갈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식 정석 아닌 정석으로 보자면, 태권도는 초등 저학년 즈음 마무리하는 코스다. 돌봄의 기능을 겸하며 ‘효’, ‘예의범절’, ‘존경심’을 배운다. 아, 품새도 덤으로 익힌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다. 하지만 우리 첫째는 초 4가 끝나가는데도 그만둘 생각이 없다. 운동신경이 뛰어난 편도 아니고, 이사 후 다니게 된 태권도장은 ‘제자 양성’이라든가 '인성함양'에 각별히 진심인 곳도 아니다. 위치가 좋아 가만히 있어도 아이들이 줄을 서서 등록하는 도장일 뿐(우리 집 창문에서 태권도 도장 내부가 보일 정도로 위치가 좋음), 솔직히 말해 “와, 여기 정말 좋은 태권도 학원네!”라는 감탄이 나오는 곳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이가 좋아했고, 그래서 꾸역꾸역 다녔다.
문제는 시간이기 시작했다. 영어학원에 이어 수학학원까지 다니게 되자 태권도에 쓸 시간이 도저히 나지 않았다. 저녁 7시에 보내면 식사 시간이 꼬였고, 그 시간에 도장에 가보면 중학생들과 험한 이야기, 게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아이, 태권도는 커녕 '심야 괴담회'를 열고 있는 사범님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 순간 확신이 들었다. 이제는 그만둘 때라고. 더 이상 돌봄의 기능을 상실한 태권도에 보내지 않겠다고.
사실 그 판단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ADHD가 있는 첫째에겐 집중력과 자기조절이 늘 과제인데, 태권도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몸을 쓰는 운동이니 산만함이 조금은 가라앉지 않을까, 규칙과 질서를 배우며 스스로를 다잡게 되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기대는 조금씩 옅어졌다. 몸을 움직인다고 해서 집중이 정돈되는 것 같지도 않았고, 태권도를 통해 아이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확신도 들지 않았다. ‘운동이니까 도움이 되겠지’라는 희망만으로 계속 붙잡고 있을 이유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다니던 태권도에서 3품 심사를 받을 시기가 다가왔다. 2주 남짓 벼락치기 연습을 하느라 아이는 매일 피곤해했다. 심사 전날 집에서 그동안 연습한 걸 보여 달라 했더니 영 시원찮았다. 남편과 나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놈의 태권도, 3품만 따면 강제 종료다.’
심사 당일은 눈이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난 아이는 아침 7시도 되기 전에 도장으로 향해 최종 연습을 했다. 심사장 한켠에서 멀찍이 지켜보니, 아이가 전날 집에서 보여주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각 잡힌 자세로 품새를 제법 잘 해냈고, 겨루기에서도 진지함이 느껴졌다. 전날 20분 벼락치기로 연습한 종목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이었다. 무대 체질이었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심사를 마치고 첫째와 친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둘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우리는 초4 겨울방학에 3품 땄으니까 빠른 편이야.” “중2 때 4품 딸 수 있겠다.” “중3에 따는 형아들보다 1년이나 빠르네.” 라며 자신들이 앞서나가고 있다는 것에 우쭐거리는 대화였다. 결론은 하나였다. 그러니까, 그만두지 말고 꾸준히 해보자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태권도는, 예상치 못하게 앞으로 4년을 더 다니게 되었다.
문득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삼남매를 키우던 우리 엄마에게 중학생 때까지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떼를 쓰던 나. 어느 날 엄마가 원비를 내지 않으면서 얼렁뚱땅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고, 그 기억은 아직도 어딘가 쓰라리게 남아 있다.
아이가 태권도 선수가 될 가능성은, 내가 지금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만큼이나 희박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하겠다’는 아이를 말리지는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태권도장이 여전히 썩 탐탁지 않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