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어려움을 호소하는 나의 아이에게
맑음이의 기준은 꽤 높았다. 다섯 살 위의 형이 있으니 더 그랬다. 형은 레고도 척척 만들고, 수학학원에 가서 두 시간 반이나 공부를 하고 온다. 영어 숙제를 하는 걸 보면 보통이 아닌 듯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 오기도 한다. 맑음이는 스스로를 중학생이라고 말하고 다니기도 했는데, 아마도 형보다 더 ‘높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맑음이가 최근에는 현실 파악이 조금 된 모양이다.
“난 그걸 잘 못해!”
“나에게는 너무 어려워!”
“7살은 그런 것도 해야 해요?”
“안 할래!”
요즘 가장 자주 듣는 레퍼토리다.
종이접기를 더 어려운 걸 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잘 되지 않고, 수영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그림 그리기도,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이든 본인의 기준은 너무나 높다.
내가 복직을 하면서 아이를 일반 사교육 학원에 보내기 시작했는데, 어쩌면 그것이 또다른 화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발달하는 또래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맑음이는 자신과 다른 아이들의 차이를 더 적나라하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나는 네가 그저 네 안에 네가 가득한, 조금은 자기중심적인 아이이길 바랐는데, 그렇게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스스로를 비교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아이의 자존감은 어느새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특수교육이 필요한 아이에게 일반 교육을 시키겠다고 욕심을 부린 나를 원망한다. 나는 타임 푸어에 피플 푸어, 아, 그냥 푸어다. 자금 사정도 넉넉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내 퇴근 시간까지 유치원 픽업이 되는 일반 학원을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이 선택이 아이에게 이런 마음을 심어준 건 아닐까 자꾸만 스스로를 탓하게 된다. 세상 멀쩡한 또래 아이들도 유치원에서 일찍이 가족의 손을 잡고 픽업을 가는데, 나는 아이의 픽업이 온전히 나의 몫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서글퍼진다. 야근은 나에게 럭셔리다. 회식은 더더욱 그러하다.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가진 게 없을까. 가진 거라곤 사실상 내 체력과 정신력밖에 없다.
이래나 저래나 맑음이의 자존감을 지켜주고 키워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부모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네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매일 말해주는 것. 한때는 내 인생을 망치러 온 아이 같다고까지 생각했지만, 지금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아이. 네가 세상에 예쁜 말을 더 많이 건넬 수 있도록, 나도 너에게 예쁜 말을 더 많이 해줘야겠다고. 그리고 더 자주, 더 오래 안아줘야겠다고.
며칠 전 주민센터에 장애 등록 서류를 제출했다. 글을 쓰는 교사모임에서 우리들의 포부와 꿈에 대해 신나게 떠들고 돌아오는 길에 주민센터를 들러서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서류를 건넸다. 하지만 장애 등록은 어쩌면 지금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일거야. 등록이 되든 안 되든 상관없이, 내 소중한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교육을 제공하고, 그 속도에 맞춰 함께 가야겠다고 다시금 마음먹는다. 그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떠오르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