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년지기 싱가포르인 친구

너를 통해 나를 보며

by 메이

스물한 살, 교환학생으로 호주 멜버른에 갔을 때 만난 싱가포르 친구 Clyde는 진정한 한류열풍의 초창기 개척자였다. 신화에서 시작해 동방신기, 빅뱅을 거쳐 이제는 K뷰티까지, 나보다 더 해박한 지식으로 한국을 설명하던 사람. 한국을 사랑하는 그녀는 매해 최소 한 번은 이곳을 찾는다.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 없다는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자신의 시간을 꽉꽉 채우기 위해 한국에 온다. 김치찜과 선지해장국을 먹고, 최근에는 ‘흑백요리사’를 보고 출연 셰프의 레스토랑에 들러 거하게 식사를 하고 갔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한때 ‘너는 남편도, 아이도 없으니 좋겠다’는 자조를 스쳤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를 통해 확인한다. 좋아하는 것으로 자신을 채우는 일은, 누군가의 삶의 조건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Clyde를 처음 만났던 교환학생 시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던 때였다고, 나는 여전히 믿는다. 멜버른 반두라 캠퍼스로 가기 위해 트램을 기다리던 아침, 잔디 냄새가 선명하다. Clyde와 다른 대학에 다니면서도 인터넷 language exchange 게시글로 처음 만나 코코아를 마셨던 코코블랙의 테이블도 기억난다. 우리는 멜버른 시내를 후비고 다녔지. 기말고사가 나만 가장 먼저 끝나서 나홀로 아들레이드까지 기차를 타고 가 등산을 하고, 독일인 마을을 돌아, 돌아오는 기차 옆자리의 호주인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날. 세상은 넓고, 나는 자유롭다고 믿었던 시간. 이것은 전생이었나?


1년에 한두 번 한국에 오는 그녀를 만나는 일은, 찬란했던 그 시절의 나를 만나러 가는 일이기도 했다.

이번 주 내내 아이를 데리고 출근하며 업무에 허덕였고, 아이들의 삼시 세끼를 챙기느라 정작 나는 제대로 먹지 못했다. 어질러진 집을 한숨으로 바라보던 하루 끝에, 새 직장이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는 그녀를 배웅하겠다고 공항으로 향했다. 침대에 누우면 바로 잠들 것 같은 몸이었지만, 굳이 배웅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녀를 만나러, 그리고 나를 만나러.


그렇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단기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인천공항 1터미널 4층 식당가에 앉아 그녀의 화려한 싱글 라이프를 듣고 있는데, 문득 생각이 스쳤다. 나는 왜 그녀를 통해 과거를 나를 만나려고 하는가. 그녀는 앞으로의 시간을 향해 가고 있는데, 나는 왜 자꾸 뒤를 돌아보고 있는걸까. 내가 지금 가진 것들이 어린 날 꿈꾸던 것과 다를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계속 뒤를 돌아보는 일은 그만두어도 되지 않을까.


사우디아라비아로 새로운 꿈을 찾아 떠나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나도 앞으로 나아가기로. 내 여건 안에서, 그러나 작지 않게. 과거를 추억하되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의 자리에서 조금 더 단단하게.


아마 내년 이맘때쯤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되겠지. 그때는 나도 나의 현생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건네고 싶다. 그녀의 이야기만큼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미래를 향해 나아간 흔적이 담긴 이야기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놈의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