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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갬포갬, 낫 포기

by 오선희

작년 여름부터 진행하는 교재 작업이 있다. 마감 날짜가 다가왔을 때, 왜 미리 하지 않았나 자책하기 싫어서, 나름 원고의 양을 주 단위로 적절하게 나누어 나만의 데드라인을 정해 놓았었다. 하지만 이것저것 다른 일에 밀려, 그 데드라인은 무너지기 일쑤였고, 결국 마감날짜를 두 달이나 어기고 말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출판사 역시 다른 교재 작업에 열중하느라 내 책을 검토할 시간조차 없다고 했다. 죄송한 마음을 조금 덜어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약 6개월 전, 그러니까 작년 여름쯤 나는 계획에 맞춰 착착 일을 처리하는 나를 상상했었다. 애초에 정해진 마감날짜에 1분도 늦지 않고 멋지게 메일을 보낸 뒤, 그동안 못했던 일들, 만남, 여행 등등을 해낼 생각이었다. 그래서 작년 하반기에는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먼저 만나자고 얘기도 꺼내지 못했었다. 그 정도로 하고 싶은 일을 미루고 몰두했다면 일을 끝냈어야 하지만, ‘이쯤하면 되었다! 이 정도면 완성이다’라고 생각이 잘 들지 않아, 일이 계속 미뤄졌다. 내가 쓴 원고를 의심하고 의심하는 나날들이 지속되고, 작업 속도는 지지부진하다 보니, 내가 상상했던 그 멋진 모습들은 이미 내가 아니었다. 그런 상상을 했던 내가 너무나 우습게 느껴졌다.


그러던 중, 출판사 담당자분과 통화를 하다가 망치로 머리를 띵 하고 맞은 것 같은 말을 듣게 되었다.


“원고가 늦어져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다 된 원고부터 보내주셔도 돼요. 아직 초고니까요. 고칠 부분이 많을 거예요.”


아직 초고니까요.. 아직 초고니까요.. 그렇다, 내가 쓰고 있는 건 초고일 뿐이었다. 이 초고는 다 뒤집어 엎어 새로운 원고가 될 수도 있고, 차곡차곡 새로운 내용이 덧붙여져서 더 탄탄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뭐 때문에 나 따위가 한 번에 완벽한 원고를 쓸 거라 생각했던 걸까. 완벽하게 써서 제출하고 나비처럼 자유롭게 훨훨 날 생각을 했던 걸까. 초고를 작성해서 넘기면 그때부터 다시 작업의 시작인 걸을. ‘아직 초고니까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자만했던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초고니까요’라는 말이 결국엔 ‘최고니까요’라는 말로 바뀔 수 있도록 힘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나는 포기하지 말고 차근차근 해 나가야 한다. 우리말에는 ‘포갬포갬’이라는 아주 귀여운 의태어가 있다. ‘물건 따위를 겹쳐 놓는 모양. 또는 그렇게 되어 있는 모양.’이라는 뜻이다. 내가 쓴 원고는 새로운 내 욕심들이, 새로운 내 열정들이 포갬포갬 쌓여 완성을 향해 갈 것이다. 앞이 막힌 것 같아 막막해지는 순간도 찾아오고,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심장이 콱 조여 오는 것 같은 날도 있겠지만, 그저 포갬포갬, 포기 아니고, 포갬포갬 하기로 마음 먹었다.


버거운 일을 마주하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먼저 하는 루틴이 있다. 지금 쓰는 이 글도 그 일환으로 작성되고 있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나는 다시, 나만 만족할 수 없는, 여러 사람을 만족시켜야 하는 큰 책임감의 글을 쓰러 가야 한다. 지금 쓰는 이 글은 적어도 내가 좋으면 장땡인 글이니, 너무 편안하다. 이렇게 잠시 잠깐의 숨구멍이 있어서 다행이다. 이렇게 숨구멍으로 쓰는 글도 포갬포갬 쌓이면, 그땐 나도 멋진 작가가 될 수 있겠지.


그래, 뭐든 포갬포갬 해 보자. 내가 좋아하는 일도, 내가 해야 하는 일도 모두 포기하지 말고, 포갬포갬 하는 사람이 되어 보자. 포갬포갬한 시간과 노력과 정성들은 날 배신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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