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속에서 헤매다 보면, 가끔 마법 같은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내가 이 일곱 음절의 단어를 만나게 된 순간도 딱 그랬다. 마치 만화 영화에 나오는 주문과도 같았던 단어 ‘따로따로따따로’. 이 말의 뜻 또한 주문 같다는 것이 더욱 흥미가 돋는 부분이다. 이 말은 ‘어린아이가 따로 서는 법을 익힐 때, 어른이 붙들었던 손을 떼면서 내는 소리’이다. 이 소리를 내면서 아이가 넘어지기를 바라는 어른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응원의 단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엉금엉금 기어다니던 아이가 양육자의 손에 의지해 허리를 펴고 바로 선다. 발바닥에 닿는 땅을 느껴보고, 비틀비틀 움직인다. 두 다리를 접었다 폈다 리듬을 탄다. 그러다 서서히 다리에 힘이 생기고, 양육자의 손에서 벗어나 제힘으로 서 있을 수 있게 된다. 아이의 앞에 선 양육자는 ‘이 아이가 언제 바로 서서 내 손을 놓게 될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그 아이의 성장을 마음 다해 응원하는 것이다.
양육자들은 알 것이다.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바로 설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성장인지. 가끔 아이의 첫 걸음마를 담은 영상을 볼 때가 있는데, 그 영상 속 어른들 중 무표정인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 영상을 보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무표정인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아이의 인생 첫 도전을, 그리고 그 성공을 보면서, 모두 환희에 차 눈이 동그래지고, 입이 벌어지고, 두 팔을 쭉 뻗고, 폴짝폴짝 뛰기도 한다. 이렇게 환희에 차서 하는 말이 바로 ‘따로따로따따로’인 것이다.
나는 아이를 낳아 길러 본 적은 없지만, 조카의 첫 걸음마를 보았고, 제자들의 성장을 보았기에 ‘따로따로따따로’를 외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수업 시간에 나와 함께 공부한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다가 그것을 문제에 적용해 푸는 모습을 볼 때, 그리고 슬쩍 넘어가는 말로 한 주의사항을 잘 기억하고 있다가 나중까지 잘 지키는 제자들의 모습을 볼 때, 장난을 치다가도 어느 순간 내 말에 집중하며 뭔가 알았다는 듯 표정을 짓는 제자들의 모습을 볼 때, 나 또한 희열에 차서 아이의 첫 걸음마를 바라보는 양육자의 표정이 되어 있다.
자라는 것은 참 고되고 애를 써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성장통’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자랄 땐 참 피곤하고 때론 아프기도 하다. 양육자에 기대어 있다가 스스로 서게 되기까지 아이들은 참 많이 애썼을 것이다. 그 노력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따로따로따따로’를 외쳐 주고 싶다. 스스로 설 수 있게 되었다면 다음 단계는 걷는 것, 그리고 그 다음 단계는 뛰는 것, 그리고 결국은 스스로 상황에 맞게 속도를 조절하는 것까지 해내야 할 것이다. 해야 할 일이 아직 너무도 많이 남았지만, 그 모든 단계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따로따로따따로’를 외쳐줄 생각이다.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노력은 결과와 상관없이 의미있다는 것이다. 설사 실패를 했다 해도 그 실패 또한 위로하는 마음으로 ‘따로따로따따로’를 외춰줄 준비가 되어 있다.
이 단어 안에는 ‘따로’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한다. 심지어 ‘따따로’라고 변주까지 하여 재미를 더했다. 이 단어를 보면 자연스럽게 ‘따로’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양육자의 보호에서 벗어나 ‘따로’ 독립적으로 살아가야 할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독립적으로 살아갈 세상이 좀 더 안전했으면 좋겠다. 아니, 안전해야만 한다. 응원을 가득 담아 아이를 세상에 내 놓았는데, 그 세상이 안전하지 않다면, 그리고 그 세상이 언제고 우리 아이들을 주저앉히려 하고, 먹어삼키려 한다면, 양육자들은 우리 아이의 첫 걸음마를 환희가 아닌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게 될 수도 있다. ‘따로따로따따로’ 외칠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가득 담겨 응원은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두려움만 마음에 가득 담기게 된다면, 그건 너무 슬픈 일이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 아이들이 양육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사회가, 학교가, 학원이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은 ‘따로’ 잘 설 수 있고,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