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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뿔나거든

by 오선희

공무원 수업을 하던 때, 명절을 앞둔 수업에서 내가 늘 하던 말이 있다.


“명절에 친척들을 만나면, 내 삶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잔소리를 하는 분들을 만나게 될 거예요. 공무원 시험 준비하고 있다고 하면, ‘그거 준비하는 게 힘들다던데, 그거 준비해서 언제 결혼하냐’ 같은 참견을 할 텐데, 잊지 마세요! 우린 지금 생애 최고로 열정을 다해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말에 ‘중뿔나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일에 관계없는 사람이 불쑥 참견하며 나서는 것이 주제넘다’ 라는 뜻이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상황은 어느 누가 봐도 기분이 좋지 않다. 말 그래도 뿔나는 상황이 된다. 다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데, 나를 위하긴 ‘개뿔’, 고민과 배려가 사라진 조언은 ‘중뿔’난 상황만을 만들 뿐이다. 당사자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할까. 당사자가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결정한 것이겠나. 당사자에게 모든 선택권을 주는 것이 맞다.


그렇게 누군가의 조언 “안 들어, 안 들어” 하는 마음으로 살아온 지도 꽤 되었다. 누군가 내 삶에 잔소리를 얹으려고 하면 그냥 나는 “넵!(후토크가 이어지지 못하게)” 하고 말았다. 그런데 살다 보니, 때로는 제3자의 엉뚱한 소리가 나의 삶에 아주 작은 변화를 이끌어 내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영화 <쿵푸팬더>를 보면, 쿵푸와 가장 관련이 없는 인물임에도, 매번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 인물은 바로 포의 거위 아버지, ‘핑’이다. 1편에서 핑은 포의 자존감을 올려 주기 위해, 국수의 비법은 없다고, 특별하다 믿으면 된다고 말해 주었다. 2편에서, 포는 내적 평화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내적 평화를 얻고 악당을 처치한 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깨달은 것는, 결국 자신이 핑의 아들이라는 사실이었다. 3편에서 혼란스러워하는 포를 위해 힘을 내 보자고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북돋워 주는 사람도 핑이다.


쿵푸의 ‘ㅋ’도 모르지만, 삶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애정 가득한 거위 아버지, 핑은 영화를 볼 때마다 나의 눈물버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걸 ‘제3자의 법칙’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내 삶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 같은 제3자가 어느 순간 나에게 건넨 한마디가 내 삶을 변화시키는 것, 그 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제3자의 법칙이다. 제3자의 한마디는 나에게 엄청 큰 변화를 가져오진 않지만, 그것이 비틀어 놓은 내 삶의 각도가 궁극적으로 엄청 크게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공교롭게도 ‘중뿔나다’에는 ‘하는 일이나 모양이 유별나거나 엉뚱하다.’라는 뜻도 있다. 엉뚱한 누군가의 한마디가 나를 중뿔난 상황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 뿔이 새로운 방향을 향하게 할 수도 있음을 안다. 그것은 신비한 경험이 될 수 있다. 순수, 순결, 신비의 상징인 유니콘의 뿔처럼.


감기에 걸려 코 막히고 기침 나고 머리까지 지끈지끈했던 어느 날, 이비인후과 진료를 받는 중에 “저 일해야 해서, 빨리 나을 수 있게 주사 한 방 놔주세요.”라고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아프면 쉬어야죠. 나을 생각이라면”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빨리 낫고 싶다면서 엉뚱한 질문을 했던 거였다. 그때부터 아프면 쉰다는 철칙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 챙겨야 하는 본질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시 생각해 보면, 의문점도 생긴다. 어디까지가 나와 관계 있는 사람이고, 어디부터 나와 관계 없는 사람일까. 그 경계가 모호하다. 크게 보면 이 지구에서 나와 아예 관계가 없다고 여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티비에 나오는,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사람도, 내 눈에 들어온 순간, 이미 나에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있는 우리의 인간관계, 그리고 그 속에서 주고받는 영향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어느 날 나에게 지나치게 참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중뿔나거든, 잠시 생각을 고르고, 그가 나에게 미친 영향을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 보면 좋겠다(어렵겠지만). 제삼자의 말이나 행동을 내 삶의 중요한 깨달음으로, 영감으로 삼자는 말을 해보고 싶다. 그게 나의 내적 평화에 이득이다. 내적 평화는 쿵푸팬더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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