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어떤 글을 써야 하나… 글방에 들고 갈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을 때면 늘 하는 고민이다. 사실 이 고민은, 컴퓨터 화면에서 깜빡대는 커서를 보기 전부터, 길을 걸을 때,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 자려고 누웠을 때도 항상 한다. 이번에는 여러 고민을 뒤로 하고, 우선 컴퓨터 앞에 앉아 보았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열고, 검색창에 그냥 무턱대고 ‘겨울’이라고 쳐 보았다. 지금이 겨울이니까, 눈도 내리는 완벽한 겨울이니까. 그랬더니 연관 검색어에 ‘겨울것’이라는 단어가 떴다. 그 뜻은 ‘겨울철에 입는 옷이나 쓰는 물건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었다. 앗, 그렇다면 다른 계절도 ‘~것’이라는 단어가 있으려나 싶어 다 찾아보았더니, 있다, 있어!!! ‘봄것’, ‘여름것’, ‘가을것’ 다 있었다. 뜻도 금세 눈치챌 수 있으리라. 각 계절에 쓰는 것들을 모아 그 계절의 이름을 붙여 단어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단어를 만드는 방식이 직관적이어서 좋았다. 직관적으로 만들어진 단어는 그 뜻을 금세 짐작할 수 있고, 금세 뜻을 짐작할 수 있는 단어는 여기저기 잘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단어를 가지고 재미있게 놀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방식대로 ‘아침것’, ‘점심것’, ‘저녁것’, ‘밤것’과 같은 단어들도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다. 언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니, 언젠가 그러한 단어들도 사전에 올라가겠지.
나의 ‘겨울것’들을 모아 보자. 뭐가 있을까. 나이가 들면서 부쩍 건조함을 느끼는 나는, 립밤, 인공눈물, 핸드크림을 늘 가방에 넣고 다닌다. 또, 겨울만 되면 감기와 두통에 시달리는 나는, 병으로 된 쌍화탕과 타이레놀을 챙기고, 전자렌지에 따뜻하게 데울 수 있는 콩주머니를 곁에 두곤 한다. 귀만 따뜻해져도 훨씬 좋다길래, 얼마 전부터는 귀마개까지 살뜰히 챙겼다.
겨울이 되면 해가 늦게 뜨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더 힘들고, 몸이 뜨끈하게 데워질 때까지 샤워기로 몸을 적시니, 샤워 시간은 배로 늘어난다. 원래도 몸 참 안 쓰는 애지만, 겨울이 되면 그 안 쓰는 몸을 더 안 쓰게 되니, 훨씬 굼뜨고 느릿느릿 행동한다. 겨울을 통과하는 나란 인간은 한해를 마무리하고, 또 다른 한해를 시작하는 중대한 임무를 잘 수행해 나가지 못하는 듯하다. 그저 하루하루를 최소한의 에너지로, 구멍만 나지 않게 만든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
추억을 저장하는 방법에 ‘동영상’이 없었던 시절, 우리 집은 목소리를 녹음하거나 사진을 찍어 추억을 저장했었다. 그 시절, ‘겨울바람’이라는 동요를 불러 녹음했던 테이프를 발견했다. 그때 나는 세 살도 채 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언니에게 녹음 기회를 빼앗길까 봐 노래 하나 끝나면 바로 다음 노래를 이어 불렀다. 테이프에는 그 욕심쟁이의 목소리가 아주 잘 녹음되어 있었다. 발음도 잘 되지 않아, ‘손이 시려워 꽁’이 아니라 ‘손이 시려워 꼼’으로 불렀던 그 노래를 어른이 되어 들었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입을 옴짝거리며 최선을 다해 노래 불렀던 어린 시절 나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그리고 중간 중간 젊은 엄마의 목소리도 들렸다. 아마도 추운 겨울, 밖에 나가 놀 수 없으니, 엄마는 작은 방에 이불로 텐트를 만들어 주고, 라디오에 공테이프를 넣어 두 자매의 노래를 녹음해 주었던 것 같다. 그 노래를, 더 정확히는 젊은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았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런 추억들이 소소하게 남아 나의 ‘겨울것’이 되었다.
눈사람을 만들 듯 겨울것들을 하나 하나 모아 이 계절을 만끽할 수 있다면 너무도 행복할 것 같다. 이제 새로운 계절을 만날 때마다 그 계절의 ‘어떤 것’, 그러니까 ‘봄것’, ‘여름것’, ‘가을것’, ‘겨울것’을 모아나갈 생각에 설레기까지 하다. 적어도 일 년에 네 번은 행복을 약속받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