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쓱쓱 해내는 사람

by 오선희

중학생 아이들과 문제를 풀거나, 글쓰기를 하다 보면, 아이들의 실력 차이가 한눈에 보일 때가 많다. 그리고 그 실력 차이는 별것 아닌 것에서부터 드러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수업 시간에 자주 딴생각에 빠지는 그 아이는, 글씨는 제법 잘 쓰지만, 지우개로 틀린 부분을 지우는 것에 서툴렀다. 중학생 아이에게 지우개질이 어려운 일이 될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 아이에게는 그게 참 어려웠나 보다. 손에 힘을 주어 종이가 흔들리지 않게 잡고, 남은 손으로는 지우개를 바투 잡은 후, 틀린 부분을 힘껏 꼼꼼하게 지워야 하는데, 그 아이는 그냥 대충 슬슬 지워서 틀린 답안의 형체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심지어 그 상태 위에 새 답안을 겹쳐 쓰게 되니, 나중엔 뭐라고 쓴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이 어떻게 답안을 썼는지 알아야 어디가 틀렸는지 알 테고, 어떻게 고쳐 써야 할지 가늠할 수 있을 텐데, 자기가 쓴 것도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난감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만약 우리 아이의 학습능력이 조금 떨어지는 것 같다면, 그 아이가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틀린 것을 잘 지우고 깨끗하게 고쳐 적는지 살펴보라고 말하고 싶다.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여기에서부터 아이들의 학습 태도는 달라지고, 그 태도와 정성이 결국 멋진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나는, 결국 제대로 이루어내려면, 제대로 지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은 어른들에게도 적용되는 원리일 것이다. 화장도 깨끗하게 지워야 좋은 피부를 유지할 수 있어, 그 다음날의 화장을 성공할 수 있는 것처럼, 싹 지운 후, 제로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나는 종종 파일을 덮어쓰기 하다가 실수해서 똑같은 일을 다시 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다시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최종 파일의 이름을 바꾼 후 이전 파일은 아예 지우는 게 낫다고 생각했었다.


멍청이처럼 실수했던 기억, 자책했던 못난 기억들도 얼른 털어내야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다. 후회와 자책감은 날 작아지게 만들고, 그러면서 자신감은 점점 줄어든다. 우리말 ‘쓱쓱’은 ‘자꾸 슬쩍 문지르거나 비비는 모양’이라는 뜻인데, 이 말의 두 번째 뜻은 ‘거침없이 일을 손쉽게 해치우는 모양’이다. 지우개로 안 좋은 기억을 문질러 ‘쓱쓱’ 지우면, 이후엔 더 멋진 내가 되어 거침없이 일을 ‘쓱쓱’ 해낼 수 있다. 한 쇼핑몰의 이름도 ‘쓱’이던데, 주문한 물품을 집앞으로 ‘쓱’ 가져다 놓는다는 의미의 그 단어를 보면, 거침없이 배달을 완료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너무나도 믿음직스러운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쓱쓱’ 쓰다듬는 행동은 참으로 여러 의미가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어떤 일을 손쉽게 해치우는 모습도 ‘쓱쓱’, 누군가가 여러모로 참 잘했을 때에도 머리를 ‘쓱쓱’, 굳은 결심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에도 내가 선 자리를 손으로 한 번 ‘쓱쓱’. 그렇게 ‘쓱쓱’ 하는 중에 우리는 ‘쑥쑥’ 자라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실수한 자리를 지우개로 ‘쓱쓱’ 문지르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더 잘하기 위한 준비자세이자, 쑥쑥 자라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그러니 실수를 안 보이게 다른 것으로 덮으려 하거나 대충 뭉개지 말고, 깔끔하게 지우는 것부터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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