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한 한 그릇

by 오선희

한식뷔페에서 제육볶음이 나오면 난 매우 바빠진다. 접시에 밥을 담을 때에도 전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전략이라는 것은 밥의 가운데 부분을 오목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라산 백록담이나 백두산 천지를 생각하면 쉽다. 이 오목한 부분엔 제육볶음이 담길 예정이다. 그렇게 제육 덮밥이 완성된다. 밥을 오목하게 담지 않으면, 제육볶음의 양념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서 다른 반찬과 섞여 맛에 영향을 준다. 제육볶음의 양념은 덮밥을 위해서만 그 사명을 다하면 된다. 사장님은 제육볶음과 같은 고기류를 만드실 땐, 상추도 함께 내어 주신다. 난 이 상추도 잘게 뜯어서 제육덮밥과 함께 비벼 먹고 싶지만, 그러면 너무 야무지게 먹는 돼지 같아 보일까 봐 단념했다. 근데 그걸 걱정하는 애가 이렇게 주기적으로 먹는 재미를 주제로 한 글을 쓰고 있다니,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긴 하다.


제육덮밥은 든든한 한 그릇 음식이다. 다른 반찬을 함께 먹을 것도 없이, 그냥 그 한 그릇만으로 풍족한 식사가 되는 음식. 그래서 젓가락도 필요없어, 숟가락만 그릇에 꽂아 책상에 놓고 먹기도 하는 간편한 음식이다. 이런 제육덮밥은 여러모로 나에게 의미가 있다.


때는 바야흐로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맞는 중간고사의 봄이었다. 나는 시험을 치르고 피폐해진 얼굴로 인문관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고 있었다. 대학에 와서까지 벼락치기 공부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뭔가 학자다운 면모가 입학과 동시에 생겨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1학년의 교양 철학 시험은, 인문대 시험이 늘 그렇듯 양치기였다. 문제에 대해 아는 것을 긁어 모아, B4 용지의 시험지를 가득 채우면 되는 것이었다. 글의 짜임새도 중요하지만, 많이 쓰면 꽤 긍정적인 결과를 받곤 했다. 나는 몇 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문장의 살을 붙여 시험지를 채우는 데는 자신 있었다. 내 글짓기 실력은 그때 일취월장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과도한 서술로 손목이 시큰하고, 알맹이 없는 답을 쓴 건 아닌지 헛헛한 그때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화장실에서 만난, 나보다 3학번 위의 귀여운 말투를 쓰는 선배 언니는 “너네 시험 끝났어? 그러면 미향 먹어야지.”라고 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 버금가는, ‘나는 시험이 끝났다. 고로 나는 미향을 먹는다’라는 진리를 그때 처음 말해 준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미향’이 단지 식당의 이름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학교 정문 앞 ‘미향식당’에 도착해서야, ‘미향 먹어야지’의 ‘미향’은 미향식당의 시그니처 메뉴 ‘제육덮밥’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집의 제육덮밥은 오목한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겨 나오는데, 밥 위에 제육볶음, 그 위에 잘게 잘린 상추를 푸짐하게 담아주었다. 주문하고 1분이면 각 테이블로 전달되는데, 그때 우리에게 오는 제육덮밥은 그릇 위로 넘실넘실대는 상추가 봉송되고 있는 성화 같았다. 마음이 벅차 오르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시험이 끝나고 자유의 개막을 알리는 의식 같은 느낌?! 이게 느낌만은 아닌 게, 제육볶음에선 진짜 불향이 났다. 아름다운 불향, 미향, 가게 이름 잘 지으셨네. 자, 이제 싹싹 비비면 된다. 넘실대던 상추는 제육볶음의 뜨거운 양념과 만나 숨이 죽고, 밥알 사이사이, 고기 사이사이에 잘 달라붙었다. 모든 밥에 양념이 배고 기름기가 싹 돌면, 한 숟가락 푹 퍼서 입으로 직행하면 된다. 매콤 달달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지고 한입 가득 넣고 씹으면 아직 음식이 위로 넘어가지도 않았는데도, 포만감이 밀려 온다.


어떤 작가님은 ‘위’로 들어가는 음식이 ‘위로’를 건네준다고도 했었다. 맞다, 그 순간 난 위로 받았다. 성적이 뭐가 나오든 상관 없을 것 같은 느낌, 성적이 좋게 나오지 않더라도 교수님을 포용하겠다는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포만감에서 나오는 포용심이라니. 이 또한 진리다. 제육볶음에도 철학은 있었다.

다시 그 맛을 느끼고 싶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로드뷰를 통해, 그 가게는 이제 그곳에 자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너무 아쉬웠지만, 밥집에서 제육볶음이 나올 때마다 야무지게 제육덮밥으로 만들어 먹으면서 그 아쉬움을 풀어보려 한다. 그때 그 제육덮밥은 20대의 나의 불안함과 공허함을 사라지게 해 주었던 음식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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