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오면 한식뷔페의 메뉴도 다양해진다. 기호에 따라 따뜻한 국을 선택할 수도 있고, 차가운 오이미역냉국을 선택할 수도 있다. 물론 나는 늘 따뜻한 국을 받아 자리로 온다. 뜨거운 여름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마시는 따뜻한 국물은 그 어느 것과도 비길 수 없다. 보약 먹는 기분이다.
밥을 다 먹을 즈음, 식당에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있다. 식당 구석에 자리잡은 조그마한 커피자판기. 여기에는 선택권이 없다. 무조건 따뜻한 믹스커피. 버튼 하나를 누르면 톡 하고 종이컵이 떨어져 나오고, 위이이잉 소리를 내며 커피가 제조된다. 커피가 다 만들어지고 나면 삐- 하는 소리로 알려주지만, 우리의 손은 늘 종이컵을 마중 나가 있다. 점심밥의 달달한 마침표인 믹스커피에 대한 적극적인 환대의 표현이다.
밥을 먹고 일에 빨리 복귀하셔야 하는 분들은 종이컵을 들고 밖으로 나가시지만, 요즘 일이 별로 없는 나는 종이컵을 들고 잠시 망설였다. 밖은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 한여름이기에. 잠시 눈치를 보다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다 마시고 나가기로 했다. 우리네 한식 반찬은 짭짤한 것들이 많다. 김치도, 멸치볶음도, 고기반찬들도… 아직 입안이 짭짤한데, 달달한 믹스커피가 들어오자 단짠단짠의 조화가 극대화된다. 식후 혈당관리를 위해서는 믹스커피를 줄여야 하는 것이 맞지만, 이 단짠을 참을 수 없어서 손가락이 향한다, 자판기 버튼으로.
생각해 보면, 믹스커피 사랑은 엄마에게서부터 온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믹스커피는 늘 곁에 있었다. 독서실 자판기에서 프림커피 하나랑 율무차 하나를 뽑아 반반씩 섞어 마시면 진짜 맛있었다. 고3 담임 선생님은 야간자율학습을 자율에 맡기셔서, 나는 늘 정규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왔다. 나는 내가 언제 가장 졸려하는지 알았고, 어떤 소리에 발딱 깨는지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학교가 끝난 늦은 오후에 제일 졸리고, 엄마가 “밥 먹어” 하는 소리에는 주저함 없이 바로 깼다. 이런 내가 야간자율학습을 하면 교실에서 내내 졸면서 시간 낭비를 했을 거다. 그렇기에 야간자율학습을 하지 않고, 바로 집으로 와서 낮잠을 자는 전략을 선택했다. 약 1시간 정도 자고 있으면 엄마가 저녁을 먹으라며 깨워주셨는데, 그 말에 잠이 확 깼다. 다른 말이었으면 안 깼을지도 모른다. 밥 먹으라고 하니까, 깰 수밖에 없었다. 배꼽시계가 곧 알람시계였던 셈이다. 그렇게 일어나서 엄마가 차려주신 밥을 먹고, 커피 둘, 설탕 둘, 프림 둘로 제조해 준 엄마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그러면 피로가 싹 가시곤 했다.
그 길로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하면 새벽 2시까지 거뜬히 집중할 수 있었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독서실에서 친해진 다른 학교 친구들은 내가 전교에서 1,2등 하는, 꽤 똑똑한 아이인 줄 알았단다. 전혀 아닌데.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전교 1,2등을 했으면 좋았겠지만, 나는 아쉽게도 그러진 못했다. 새벽 2시에 독서실에서 나오면 엄마는 늘 나를 데리러 오셨다. 독서실과 우리집 사이엔 어두컴컴한 굴다리가 있었는데, 난 그게 참 무서웠다. 사실 엄마도 무서웠을 텐데 엄마는 한 번도 내색하지 않으시고 꼭 데리러 오셨다. 근데 참 웃긴 건, 그때마다 믹스커피를 타서 들고 오셨다는 거다. 그것도 손잡이가 달린 커피잔에. 내가 믹스커피를 좋아하니까 날 주려고 가지고 오셨다는데, 내 생각엔 엄마가 산책하는 마음으로 커피 한 잔 들고 나왔던 건 아닌가 생각한다. 엄마도 무서운데, 귀찮고 피곤한데, 이 순간을 좋은 기억으로 만들고 싶어서, 좋은 마음을 스스로 만들고 싶어서 그렇게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믹스커피를 자양강장제 삼아 수험생활의 달달한 마침표를 찍었다.
지금도 엄마와 데이트를 할 때면, 밥 먹고 커피 마시고 다 했는데도, 엄마 집에 들어가 엄마 커피를 한 잔 더 한다. 엄마가 커피잔에 물을 부어 주시면, 나는 티스푼으로 살살 저었다. 시계 방향으로 둥글게 둥글게. 티스푼이 커피잔에 가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