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 막히고, 머리 아플 때 먹는 감기약 하나만 주세요.”
약국에 가서 감기약을 샀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머리가 띵 하고 울리는 거다. 환절기에 자주 찾아오는 그것이 어젯밤에 내 코에 도착했나 보다. 밤새 숨을 제대로 못 쉬고 잠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아침에 일어났는데 단 한순간도 잠들지 않았던 것처럼 피곤했다. 병원에 갈까 하다가 아직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 약국 약으로 좀 버텨 보기로 했다.
밥을 간단히 먹고 약을 먹었다. 식후 두 알이랬다. 빨간 빛깔의 알약 두 개를 목구멍으로 넘기고, 침대에 앉았다. 머리맡에 베개를 세워 두고, 그 베개에 등을 대고 앉았다. 이불을 배까지 야무지게 덮고는 읽고 싶었던 책을 펼쳤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책 안으로 빠져들진 못했다. 감기약의 기운이 퍼지면 졸음이 몰려 오고, 첫 페이지를 읽다가 집중이 안 되어서 같은 부분 또 읽다가 해롱해롱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아예 시작을 하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 책 표지를 꼼꼼히 보고, 뒷표지에 있는 간단한 소개글도 보고, 작가님 소개글도 읽어 보았다. 이 정도 읽었는데, 다행히 졸음이 몰려오진 않았다. ‘역시 약은 조제약이 잘 드는가, 약국 약이라 잠이 안 오네.’ 생각하며 본문으로 들어가 몇 줄 읽는데, 여지없이 꾸벅 하고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내가 읽는 문장 위로 꿈이 잠시 왔다 가고, 내가 읽는 문장이 꿈이 되어 나타났다. 아, 드디어 약 기운이 퍼지나 보다. 이 나른한 약 기운이 반가워 책을 덮어두고 바로 누웠다.
감기약을 먹고 드는 잠은 평소에 자는 잠과 매우 다르다. 뭐라 표현해야 할까. 눈을 감으려고 해서 감는 게 아니라, 의도하지 않아도 눈꺼풀이 딱 붙어 묵직해진다. 눈꺼풀로 덮인 눈동자는 뜨끈뜨끈해지고, 귀가 어두워진다. 풍선을 넣은 것처럼 귓구멍이 꽉 막히는 것 같다. 그러고는 머릿속에 몽글몽글 뿌연 기체가 가득 차는 것 같기도, 몸이 이불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약을 먹었으니, 이제 깨어나면 온전한 컨디션으로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안도감도 든다. 주기적으로 들리는 집 근처 공사장 소리, 놀이터에서 노는 유치원 아이들의 돌고래 소리를 BGM 삼아 두 시간 정도 푹 잤다. 감기약 기운 때문이었는지, 밤에 못 잔 영향 때문이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푹 자고 일어나니 몸이 한결 가벼웠다.
사람이 아프면 기운이 없고, 한없이 약해진다. 평상시에는 금세 일어나 뚝딱뚝딱 해낼 일도 아플 땐 몇 배의 시간을 들여야 겨우 그 일 하나를 해낼 수 있게 된다. 생산성이 떨어진 인간이 된다. 이렇게 나약해진 나는 약을 먹고 힘을 내려 하는데, 희한하게도 약을 먹으면 그 순간은 오히려 더 약해진다. 감기약을 먹으면 몸이 느즈러지면서 이불 속으로, 꿈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지니 말이다. 약은 사람을 안 아프게 하는 것이지만, 약을 먹는 순간은 그 사람을 한없이 더 약하게 만들어서 무리하지 않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러니 약을 먹었다고 금세 팔팔해질 것을 기대하면 안 된다. 잠시 무리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꽤 오랜 시간을 몸담았던 곳과 계약을 종료하고 백수가 되었다며 해맑게 웃는 동료를 만났다. 책갈피에 꽂을 낙엽을 골라보자며 함께 산책을 했다. 얼굴이 편해 보여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편한 얼굴 뒤에, 올곧이 혼자 맞이하게 되는 밤 이불 속에서는 불안과 걱정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걸. 감기약을 먹으면 금세 팔팔해지지 않듯 그녀도 잠시 약기운이 도는 약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라 여기길 바란다. 푹 자고 일어나면 어느새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전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 ‘느즈러지다’는 ‘긴장이 풀려 느긋하게 되다.’라는 뜻이다. 이 말의 어원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늦다’ 혹은 ‘늘어지다’를 어원에 두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뭐가 되었든 지금의 늘어짐이 남들보다는 늦게 되는 행보일지라도 몸을 쭉쭉 늘여 뭉친 근육을 이완시키고 있는 시간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