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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문하시군요! 뭐 좀 드세요!

by 오선희

우리 집 앞에는 경춘선이 있다. 노랫말에서나 만나 보았음직한 ‘춘천 가는 기차’가 우리 집 앞을 지난다고 생각하면 꽤나 낭만적이다. 하지만 이 말은 사실, 우리 집이 서울과는 멀리 떨어진 수도권 외곽에 있다는 뜻이 된다. 서울에서 일을 하는 날이면, 지하철과 버스를 여러 번 환승해야 한다. 일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에는, 이 경춘선이 환승의 마지막 열차가 된다. 해가 짧아진 요즘은 6시만 되어도 하늘이 새까매서, 한밤중에나 퇴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더욱 지친다. 그래도 경춘선에 몸을 싣고 나면 이제 더 이상 탈것에 몸을 싣지 않아도 된다는, 다시 말해 집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이 경춘선 열차는 자주 오지 않아서, 한 번 탈 때 시간을 잘 맞춰야 한다. 7호선 상봉역에서 내리자마자 핸드폰 화면을 보며 종종걸음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면 매우 높은 확률로 그들은 경춘선을 타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나마 나는 상봉에서 경춘선을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리지만, 경춘선을 타고 정말 춘천까지 가는 사람들은 더욱 전력질주한다. 지금 차를 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귀가 후 여유로운 삶의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도 전력질주하여 겨우 경춘선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경춘선 열차 안에는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상황이라 당황했지만, 사람들이 다 탈 때까지 정차했다가 정해진 시간에 출발하는 시스템이기에, 전기 절약의 일환으로 불을 잠시 꺼두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열차의 문이 닫히고 열차가 출발한 상황에도 여전히 깜깜, 다음 정거장에 도착할 때까지도 불은 켜지지 않았다. 근데 더 신기한 건, 깜깜한 열차 안에서 지금 이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상상력이 풍부한 나는 이 열차가 이렇게 내내 깜깜한 채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타임슬립하여 다른 시대에 도착하는 것은 아닌지 온갖 상상을 하게 되었고, 그 상상력에 진 내가 열차 안에 있는 무전기로 기관사님께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바로 열차 전체에 불이 켜졌다.


단순한 실수였던 것이다. 낯선 경험을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쩌면 깜깜한 지하철 안이 편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누구도 깜깜해진 지하철에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하루 동안 이리저리 치여서 얼굴은 푸석푸석하고,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이 떠올라 미간에는 깊게 주름이 잡혀 있고, 상처 받은 말 때문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사람들은 불 꺼진 열차 안에서 자신의 표정을 숨길 수 있어 좋았을 것이다. 잠시라도 눈을 붙이고 싶었던 사람들에게는 불 꺼진 열차 안이 편안한 수면실 같기도 했을 거다.


두 눈에, 척추에, 목에 힘을 팍 주고 있지만 사실은 맛문한 사람들이 열차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리말 ‘맛문하다’는 ‘몹시 지친 상태에 있다’라는 뜻이다. 그날 나도 사실은 매우 맛문했다. 네 시간 동안 한 번도 안 쉬고 떠들다가 왔기 때문에 목도 아프고, 종아리도 아프고, 눈도 시렸다. 내가 혹시 잘못된 개념을 가르친 건 아닐까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 상상력에 지지만 않았다면, 나도 굳이 무전기를 들진 않았을 것이다.


만약 계속 불이 꺼진 채로 춘천까지 이 열차가 달렸다면 어땠을까. 맛문한 사람들은 잠시나마 편히 쉴 수 있었을 것이고, 조금은 부드러워진 마음을, 눈과 관절을 얻을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더불어 자신의 휴대전화 화면이 너무 밝다고 새삼 느꼈을 것이다. 한밤중에 잠깐 깨서 휴대전화 화면을 보면 불빛이 너무 밝아 찌푸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잠깐이나마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바깥을 보지 않았을까. 어두워진 열차 안에서는 바깥의 야경이 더 잘 보였겠지. 저런 풍경이 나의 귀갓길에 조용히 동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마음이 조금은 괜찮아졌을 것이다.


그리고 조용히 퇴근 후 먹을 저녁식사나 야식과 같은 소소한 욕구에 맘을 쏟을 것이다. 맛문한 나에게 맛의 문을 열어 줄 맛있는 것.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시간에는 누구나 낙천적인 사람이 된다. 이러저러한 많은 일들로 맛문한 사람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고민은 내려놓고, 당장의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길 바란다. 하루가 다르게 쌀쌀해지고 있는 이 저녁에는 따뜻한 국물 요리가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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