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아이들과 이번 달에 읽는 책은 ‘자기소개’에 대한 내용이다. 아이들이, 자기를 소개하는 내용에 ‘이름’, ‘나이’, ‘가족 관계’ 정도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자기소개에는 스토리가 중요하다며 이것저것 예를 들어 주었다. 그러다가 나의 옛날 이야기, 흑역사까지 모조리 다 끄집어냈다. 자기소개를 할 때 장점만 찾으려고 하면, 뭐 대단한 것을 찾아야 하는 줄 알고 다들 주저한다. 자신에 대한 대단한 ‘무엇’은 잘 안 보여도, 누구나 삶의 스토리 하나쯤은 다 가지고 있는 거니까, 자신감을 갖게 하려고 그렇게나 안물안궁의 스토리까지 펼쳐냈던 모양이다.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자기소개 글 한 편을 완성하는 속도가 더디기만 했다. 한 아이가 자기에겐 특징이 없는 것 같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장점 같은 게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하길래, “너는 친절하잖아. 선생님이 수업하러 오면 간식도 막 내어 주고…”라고 대답했더니, 갑자기 반짝이는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왜 선생님한테 간식을 주는 줄 아세요?”라고. 나는 속으로 ‘사랑해서?’와 같은 로맨틱한 대답도 예상해 보았고, 또 한편으로는 ‘잘 부탁한다고?’와 같은 처세에 능한 대답도 예상해 보았다.
그런데 대답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선생님한테 간식을 줘야 우리 집에 있는 간식이 빨리빨리 줄어들잖아요. 그러면….” 아, 집에 있는 간식을 빨리 없애기 위해서였구나. 흡사 잔반 처리반 같은 느낌이 들어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말을 이었다. “그러면… 또 다른 간식을 사러 갈 테니까, 선생님한테 새로운 간식을 드릴 수 있잖아요.”라고. 반전이었다. 새롭고 다양한 간식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니. 역시 아이들의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감동한 나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뒤로 세 걸음 정도 물러나 가슴에 손을 모았다. “감동이야. 증말” 하면서.
어른들의 대화에서는, 시작하는 뉘앙스만 보아도 대화의 흐름이 어떻게 될지 예상이 되는 경우들이 많다. 심지어 첫 대화에서 질려 버리고는 다시는 그 사람과 대화하고 싶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아이들은 말 안에 엄청 많은 비밀과 의미를 담고 있다. 아이들은 ‘있잖아요’로 말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도 자신의 말에 뭐가 많이 들어 있다는 걸 미리 말하고 시작해서인 것은 아닐까.
아이들과 대화를 많이 하는 직업을 가진 나에게는, 이렇게나 슬거운 아이의 마음에서 ‘있는 것’을 찾아내는 임무가 주어진 듯하다. 우리말 ‘슬겁다’는 ‘마음씨가 너그럽고 미덥다’라는 뜻이다. ‘즐겁다’만큼이나 행복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어른보다 더 슬거운, 아이들이 숨기고 있는 것, ‘있잖아요’ 하고 내뱉는 솔직한 마음은 참으로 다양하다.
“있잖아요, 선생님, 우리 둘이 좋아하는 남자애 이름 맞혀 보세요.”라는 뜬금없는 질문을 받았다. 난 그 학교에 다니는 아이라고는 나와 수업하는 여자아이 둘밖에 모르는데, 그래서 그 남자아이의 존재 자체도 몰랐기에, 이름을 절대 맞힐 수 없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당황했고, 다음으로는 두 아이가 한 남자아이를 좋아하는 이 상황이 아무렇지 않은 그들의 세계에 또 당황했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은 척 초성 힌트를 달라고 했고, 하나하나 이름을 맞혀 나갈 때마다 두 아이의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해졌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질투나 경쟁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친구와 좋아하는 것이 같다는 데에서 오는 공감이, 나에게 질문한 그 말속에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부디 그 남자아이로 인해 내 제자 둘이 싸우거나 감정이 상하는 일이 없길 바라며, 언제고 그 남자아이를 만나 좋은 아이인지 알아보고 싶은 친정엄마의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있잖아요, 선생님, 엄청 이상한 애가 세상을 다 망쳐버리면 어떡해요?” 어린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고, 어린이가 주체적으로 세상을 바꿔 나갈 수 있다는 내용의 책을 읽고 나서 받은 질문이었다. “두려울 수 있지.” 하고 우선 아이를 안심시킨 다음, 그 엄청 ‘이상한’ 게 도대체 뭔지 물었다. “못된 사람들 편들고, 착한 사람들 못 살게 만드는 거요”라고 그 아이는 대답했다. 나는, 세상엔 그런 사람들보다 착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올바르게 세상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지금 너희들 안에도 뭐가 옳은지 뭐가 옳지 않은지 이미 알고 있는 마음이 있다고, 그런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몇몇 이상한 사람들이 세상을 망치게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이상한 애가 세상을 망쳐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 섞인 질문 안에는 올바른 게 뭔지 아는, 슬기로운 마음이 담겨 있었다. 슬기로운 마음이 슬겁게 들어 있었다.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아이들의 슬거운 마음을 기억해 보기로 했다. 엄청 슬거운 데도 생색내지 않아 더 눈길이 갔던 그 마음들을 내 마음에 옮겨 담아 보려 한다. 뭐 하나 이루어낸 것 없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했던 연말, 아이들이 나눠 준 슬거운 마음속에 즐거운 마음을 발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