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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를 망고하며

by 오선희

친구가 생일 선물로 망고를 보내주었던 적이 있다. “후숙 과정을 거쳐야 할 거야. 냉장고에 좀 두었다가 먹어”라고 했다. 냉장고 과일 칸에 망고를 넣어 두고 하루이틀 뒤에 꺼내 먹을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각자 돈을 쓰는 패턴이 다른데, 나는 과일에 큰돈을 쓰지 못하는 편이다. 그렇게 비타민이 부족한 나날을 보내던 중 받게 된 망고이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정확히 이틀 뒤 망고를 꺼내 반으로 갈라 보았다. 그런데 아직도 쌉싸름한 맛이 남아 있었다. 조금 더 두었다가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느긋이 시간을 보냈다. 그사이 망고가 냉장고 속에서 물컹물컹해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뒤늦게 망고를 꺼내보았는데, 껍질이 거뭇거뭇해져 있었고, 속살도 물컹해져서 맛이 없어졌다. 후숙을 멈췄어야 했는데, 그만두어야 하는 시점을 놓쳐버린 것이다. 눈물을 머금고 남은 망고 거의 대부분을 버렸어야 했다. (친구야 미안해) 이제야 생각하는 거지만, 시작하는 시점을 잡는 것만큼이나 끝내야 하는 시점을 잡는 게 참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 이미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내 생각의 울타리 너머로 내보내주는 일도 어렵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성취를 향해 천천히 나아가고, 절정에 이르러 일이 잘 풀리는 것을 경험하면, 그 일에 쉽게 손을 놓을 수가 없다. 절정에 이른 후 내 일은 밑으로 밑으로 내려오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걸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면 일이 잘될 때, 그만 두면 될까? 아니, 아마 힘들 거다. 일이 제일 잘될 때 끝내버리면 허전한 마음에 더욱 무기력해질 거다. 뭐 어쩌라는 건지. 제대로 끝내는 법을 아직도 모르겠다.


우리말 ‘망고하다’는 ‘연을 날릴 때, 연줄을 남김없이 다 풀어주다‘, ’어떤 것이 마지막이 되어 끝판에 이르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과일이름이 들어간 고유어라며 신기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이 단어를 볼 때마다 마지막이 좋지 않았던 내 망고가 떠오른다.


2025년의 끝판에 이르렀다. 올해가 며칠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연줄을 남김없이 다 풀어 멀리 보내버려야 하는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우선 함께 공부하던 중학교 3학년 남학생 2명을 떠나 보내야 한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더 큰 학원에서 더 체계적으로 공부했으면 하는 바람에 올해까지만 수업하고 헤어지기로 했다. 이들과의 수업은 올해로 망고하게 된다. 그런데 수업의 마지막을 향해가는 마음은 망고처럼 달콤하지만은 않다. 이제 더 이상 보지 않을 선생님에게 정을 쏟는 아이들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더 함께하고 싶지만, 좋은 기억이 더 많을 때, 헤어지는 게 나은 선택일 수도 있겠다.


또, 올해 해내지 못한 버킷리스트들도 망고해야 한다. 해내지 못했다고 자책하거나, 남은 기간에 그것들을 다 해내려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버킷리스트는 다 해내지 못해 ‘망’했다 생각이 들어도, 그냥 ‘고(go)’, 그냥 가는 거다. 망고하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니, 모든 일이 잘될 때 그만두는 게 아니라, 절정에서 내려오는 과정을 찬찬히 다 겪어내는 것도 의미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엄밀히 말하면 내년은 1초 만에 도래한다. 시간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는 거다. 올해의 버킷리스트를 그대로 1초 뒤의 내년으로 가져가는 일이야말로,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무거운 마음과 작별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이제 내 인생에 졸업이나 입학, 결혼도 없을 테니, 새로운 시작을 대대적으로 축하하고 기념하는 일 또한 없을 것을 안다. 그러니 한해 한해 끝나고 시작하는 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기로 한다. 이렇게 ‘10kg 감량’을 내년으로 미루며 이 글을 쓴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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