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마시는 도중 내가 은연중에 승모근을 주물렀더니, 그걸 보고 있던 친구가 “등을 조져야 돼”라고 뜬금없는 말을 했다. 뭐라고? 갑자기? 원래도 대화의 진행을 종잡을 수 없는 친구라, 내 행동에서 연상되는 무언가가 연결되어 의식의 흐름이 또 저기까지 갔구나 싶었다. 그 친구의 이야기는 이랬다. “너 승모근이 자주 뭉치는구나. 근데 승모근을 주무르는 건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야. 폼롤러 있지, 그런 거로 등을 문질러야 돼. 그래야 승모근이 풀려.” 이제야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녀의 말에는 ‘조지다’라는 아주 험악한 단어가 등장했지만, 그 말은 사실 내 건강을 걱정해 준 아주 친절하고 따뜻한 한마디였던 셈이다.
우리말 ‘조지다’는 ‘호되게 때리다’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이 말을 비속어라고 생각해서 쓰는 것을 꺼린다. 물론 비속어인 ‘조지다’도 있다. 그때의 ‘조지다’는 ‘일신상의 형편이나 일정한 일을 망치다.’의 뜻이다. ‘망했다’ 대신 쓰는 ‘조졌다’는 속된 말이 맞지만, ‘때렸다’ 대신 쓰는 ‘조졌다’는 속된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씨 따뜻한 내 친구는 헤어지는 길에, 카카오톡 선물하기로 폼롤러를 보내왔다. 언행일치를 보여 주는 내 친구는 절대 조질 수 없는 내 사랑이다. 아무튼 그녀가 보내 준 폼롤러가 도착해 포장을 뜯고 바로 실행에 옮겨 보았다. 바닥에 폼롤러를 두고 그 위에 등을 대고 누웠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윽. 생각보다 폼롤러가 딱딱했기 때문에 내 등은 말 그대로 조져졌다, 사정없이. 자신의 체중을 그대로 실어 동그란 통나무에 누우니,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나는 더욱 아플 수밖에 없었다. 폼롤러에 누워 몸을 위아래로 흔드니 만두피 펴는 것마냥 내 등이 평평해지는 듯했다.
그런데 문제는 폼롤러에 티셔츠가 말려 올라가는 거였다. 등을 조질수록 내 배는 ‘까꿍’ 하고 밖으로 나오니 무척 난감했다. 머리카락도 폼롤러에 한 번 말리면 누가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것 같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다음부터는 티셔츠를 바지에 다 넣어 배바지로 만든 후, 머리도 질끈 묶고 등 조지기의 시간을 가졌다. 훨씬 수월했다. 다음은 종아리와 허벅지 차례이다. 역시 체중을 실어 문질러 주었다. 하루의 피로가 싹 날아가는 듯했다. 처음에는 아팠는데, 이 아픔도 점차 적응되어서, 눈은 TV에 고정한 채 폼롤러를 생활화하는 저녁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등과 종아리, 허벅지를 조졌더니 다음날 피로감이 좀 덜한 것 같았다. (고맙다 친구야) 무언가를 조지는 폭력적인 행동이 이렇게나 긍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어린 시절 아빠의 등을 올라타 밟았던 경험이 떠올랐다. 그때도 아빠는 시원하다며, 칭찬을 해 주셨다. 아빠를 밟았는데 칭찬을 받은 경험이라니. 또 언젠가는 다음날 일어날 시간을 외치며 베개를 조지면, 다음날 기가 막히게 그 시간에 눈을 뜰 수 있다는 소리를 듣고 따라 한 적이 있었다. 밤에 이부자리에 앉아 베개를 앞에 두고 ‘7시! 7시!’ 하면서 주먹으로 베개를 조졌다. 물론 이 행동의 결과를 신뢰할 수 없었기에 핸드폰 알람을 여러 개 맞춰 두긴 했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6시 55분 언저리에서 눈을 떴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뜬 것이었다. 우아, 조지길 잘했다. 안 조졌으면 지각해서 조질 뻔했다.
스트레스 쌓일 때 오락실에 가면 항상 지나치지 않고 조졌던 펀치, 불안하거나 손이 심심할 때 터뜨렸던 뽁뽁이 등도 다 같은 맥락이 아닐까. 승모근을 풀기 위해 승모근이 아닌 등을 조졌던 것처럼 해결책은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해결책이 다소 폭력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꽤 재미있을 수도 있다. 폭력적인 세상에 살면서 어찌 조금도 폭력적이지 않은 채 살 수 있을까. 지금 눈앞에 놓인 스트레스와 문제들로 인해 힘들고, 과도한 부담을 느끼는 상황이라면 잠시 그곳을 빠져나와 컴퓨터 자판을 조지며 글을 써 보거나, 옆에 있는 인형을 조지거나, 단단한 벽에 부딪히며 등을 조지면 죽을 것 같았던 마음도 조금은 괜찮아질 수 있다. 우리의 정신 건강을 위해, 무언가를 ‘조지면’ 어떨까, 적어도 스트레스에는 ‘지면’ 안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