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면 집안은 조용하다. 내 하나뿐인 식구는 이미 일을 하러 나간 뒤이기에 집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침대 위 구겨진 그의 이불을 보니, 아침에 꽤나 고통스럽게 부비적대다 나간 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옆에 있는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온몸에 힘을 주고 사알짝 일어났을 그의 아침을 상상해 보면 안쓰럽기도 하다. 그가 오전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같이 점심을 먹은 뒤, 나는 책상에 앉아 내 일을 하고, 그는 다시 오후 일을 하러 간다. 집에 앉아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흘러 거실 벽에 붉은 빛이 감돈다. 그렇게 노을이 질 때쯤, 그가 돌아올 시간이 된다.
허벅지가 매우 두꺼운데, 평발인 그는 여러 악조건을 모두 가진 셈이다. 두꺼운 허벅지가 내리누르는 힘을 고스란히 발바닥이 감내해야 하는데, 발바닥이 하필 평평해서 더욱 힘겨울 거다. 오후의 일은 무거운 박스도 나르고, 내내 서서 일해야 하니 발바닥에서 더욱 열이 나고 찌릿찌릿 전기가 통하는 듯싶을 거다. 그렇게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그가 고단함은 싸잡아 바깥에 두고 들어오기를 바라기에, 도어락 비번 누르는 소리가 나면 복도가 울릴 듯 큰소리로 그를 맞이한다. 일식집 직원들이 외치는 이랏샤이마세에 버금가는 소리로 ‘어서 와’라고 외친다. 때로는 그가 자신의 힘듦을 떠올리기 전에 나의 힘듦을 먼저 선수쳐 보기도 한다. 아까 문 열다가 발가락을 찧었다든지, 오늘 일이 손에 하나도 안 잡혔다며, 허공에 손을 휘젓는다. 그러면 그는 간단하게 내 힘듦을 들여다 봐 준 후, 한 마디 내뱉는다. “아이고, 되다!” 하고.
그러면 나는 “그렇게 매일 돼서 어떡해.”라고 묻는다. “힘들면 다 그만 둬”와 같은 허풍과 함께. 그러면 늘 그냥 웃고 말았는데, 오늘은 그가 반질반질한 얼굴로 말했다. “매일 돼서 어떡하긴. 잘된 거지.” 몸을 쓰며 매일매일을 보내더니, 철학자가 다 된 것 같다. 책에 나올 법한 진리를 내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우리말 ‘되다’는 ‘일이 힘에 벅차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다른 상태나 성질로 바뀌거나 변하다.’의 의미도 있다. 매우 고된 일을 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러기에 더욱 멋진 무언가가 ‘되어’ 가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이제는 그런 자신을 ‘잘되었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어른스러워지기도 했다.
나는 아이가 없지만, 남편을 보며 느낀다. 아이의 성장을 보는 마음이 이런 걸까. 다듬어지지 않은 울퉁불퉁하고 모난 돌 같았던 그를 만나 당황하던 순간들도 없지 않았는데, 그가 이제는 잘 매만져진 예쁜 돌멩이가 된 것 같다. 그가 보기에 나도 그럴까. 누군가 별 의미 없이 건넨 말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기어코 다시 곱씹고 힘들어 하는 소심한 내가 조금은 나아진 듯 보였으면 좋겠다. 챙겨야 할 식구가 아니라, 의지할 수 있는 반려자가 될 수 있었으면. 오늘 저녁엔 염색도 해 주고, 다리도 주물러 주고, 볶음밥도 만들어줬으니 좀 믿음직스러워졌으려나.
나는 우리가 오래된 사람들이라서 좋다. 긴 시간이 쌓여 이젠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야구를 보다가 내가 “어!” 한 마디했을 뿐인데, “아, 홈런인 줄 알았구나. 아니야, 파울이야.”라고 말할 만큼 내가 ‘어’ 하면 그가 ‘아’ 한다. 우리 사이가 오래된 만큼 서로의 고된 시절도 다 보았었다. 보험 영업하느라 양복 입고 하루 종일 돌아다녔지만, 실적을 올리지 못했던 그와 주5일 팀장 선생님의 수업까지 떠맡아 하면서 왕따까지 당했던 나. 찌질했던 그 시간들이 부끄럽지 않은 건 그런 시간들을 지나 우리 둘 다 뭔가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둘다 앞으로도 잘됐으면 좋겠다. 잘 지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