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는 수업은, 함께 글을 읽고, 생각을 나누며, 그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수업의 특성상 아이들이 말을 많이 하는 게 참 좋다. “우리 ○○이가 말이 많아서요, 너무 시끄럽진 않으셨어요?” 수업에 방해가 될까 어머니들은 걱정하시지만, 말이 많은 아이들이 수업에 방해를 일으키는 경우는 극히 적다. 말이 없는 아이들은 대답을 이끌어내기까지 조금 기다려줘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다른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 아이의 대답을 마냥 기다려 줄 수도 없고, 내가 기다려 주려고 해고, 다른 아이들은 이미 다른 주제로 말을 하고 있거나 질문을 하는 경우들이 많다. (아이들의 주제 전환은 정말 빠르다)
이렇게 말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면 무턱대고 토론을 하자고 말할 때가 많다. 한 주제에 대해서 근거를 대가며 다소(?) 공격적으로 대화하는 모습이 좀 멋져 보인다고 생각하나 보다. 그 토론이 심도 있게 이어진 경우는 별로 없지만, 그래도 그 경험 자체는 굉장히 소중하다. 그런 와중에 토론의 논제가 아예 될 수 없는 것들로 토론을 해 보자고 제안하는 경우들이 있다. “초등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와 같은 주제들 말이다. 공부를 안 해도 된다는 답정너의 대답을 듣고 싶은가 보다. 그럴 때 나는, 그 문제는 찬성과 반대가 균형 잡히게 제시될 수 없어서 토론의 논제가 될 수 없다고 말해 준다. 요즘은 아이들의 장래희망이 무척 다양해져서 굳이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될 수 있는 직업들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모든 일은 공부가 필요하다. 공부 없이 이룰 수 있는 꿈은 없다. 유튜버도, 아이돌 가수도, 프로게이머도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은 학생으로서 당연한 것이기에, 이를 반대할 만한 논리적 근거를 댈 수 없다고 덧붙여 주었다. 아예 토론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해 준 것이었다.
누가 봐도 정말 잘못한 일을 저지른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맞다. 이건 토론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잘못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너무도 분명했기에, 일을 그르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라에 큰 위기가 닥쳤을 때에도, 내가 다소 안정적일 수 있었던 것은, 잘못한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했고, 내 머릿속에서 그 사람에게 내려질 벌이 분명했고, 이 생각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거라는 믿음 또한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라를 옳은 길로 만들어야 하는 이들의 비겁한 행태를 나는 보았다. 자신들이 속해 있는 무리의 안위를 위해 더 큰 나라의 안위를 포기했다. 그들은 초등학교를 나왔겠지. 나와 함께 공부하는 초등학생들도 다 알 만한 사실을 그들이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들의 머릿속에는 다른 꿍꿍이와 욕심이 자리잡았기 때문에 저런 어리석은 결정을 한 것이겠지 생각한다. 올바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결정하는 일에 다른 욕심이 개입되기 시작하면… 이제 어쩌나. 내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정의, 도덕, 윤리 같은 것들이 더 허울뿐인 말이 되고, “어른들은 그렇게 살지 못했는데 너희들이라도 그런 삶을 살아 주었으면 좋겠어. 정말 미안해”와 같이 말하며, 매 수업을 사과로 마무리하게 될 수도 있겠다. 수업료를 받고 사과하는 게 내 직업이 되는 날이 머지않았구나.
우리 아이들이 수업 중에 잘 하는 말이 ‘멸망’이다. 환경 보호가 주제일 때도, 협동 정신이 주제일 때도, 늘 결론은 ‘멸망’이었다. ‘환경을 보호하지 않으면, 협동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에 아이들은 모두 “멸망할 것 같아요”라고 말했었다. 나는 웃으면서, “또또, 멀리 갔네.”라고 말하며 구체적으로 다시 이야기해 보라고 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하는 이 ‘멸망 드립’이 사실은 허무맹랑한 게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암담하고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부아’는 ‘노엽거나 분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실 ‘부아’를 의학용어로 쓸 때는 ‘가슴안의 양쪽에 있는, 원뿔을 반 자른 것과 비슷한 모양의 호흡을 하는 기관.’ 즉 ‘허파’를 의미한다. 그래서 내가 요 며칠 숨이 잘 안 쉬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 와중에도 국어사전을 찾고 있는 내가 약간 우습기도 하고, 입만 나불대는 것 같아 보여 부끄럽기도 하다. 그래도 집회에 나간 사람들의 영상을 보며 조금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주말에 수업이 있어, 집회에 나가지 못했는데, 영상 속 사람들은 각기 재미있는 단체명을 깃발에 새기고,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응원봉을 들고 있었다. 우리 민족은 저렇게, 위기를 풍자와 해학으로 이겨내고 있었다. 나도 내가 늘 하는 방식으로, 이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고 싶다. 부아가 치밀어 올라 부아아악 소리를 치고 싶은 순간에도 옳은 것이 옳게 대접받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