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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라운 아이

by 오선희

자주 체하는 나는, 잠들기 전 남편의 특급 서비스를 은근 기대한다. 그것은 바로 ‘배쓰다듬’ 서비스인데, 그는 배쓰다듬의 고수다. 배를 살살 문질러 주다가 아주 적절한 때에, 명치 쪽을 좀 더 마사지 해준다. 그러면 난 “극락!”이라고 말하며 고마움을 표시한다. 그러다 어느 날은, 새벽쯤에 깼는데, 속이 너무 아팠다. 꽃잠(깊이 든 잠)에 빠진 남편을 깨울 순 없어, 내 손으로 내 배를 살살 지그시 꾹꾹 문질러 주었다. 그렇게 스르르 잠들었다. 밤에 일어나 약을 먹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통증이 잦아들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배를 쓰다듬는 것이 나 혼자 자체 서비스가 가능한 영역이었다는 사실에, 독립심이 느껴지기도, 살짝 아쉽기도 했던 것이었다.

그러다 나는 이렇게 살살 문질러서 더 좋아지는 게 또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사진 찍기 전 카메라 렌즈를 문질러 깨끗하게 하는 것, 정전기가 나서 삐죽삐죽해진 머리를 손에 입김 불어 살살 만져주면 차분해지는 것, 지점토 놀이할 때 손으로 살살 문질러 주면 예쁜 동그라미 공을 만들 수 있었던 것, 수전을 마른 수건으로 문질러 주면 얼굴도 비칠 듯한 새 수전이 되는 것…. 누군가는 자꾸 만지면 지문만 남고, 지저분해진다며 만지면 만질수록 엉망이 되는 예를 들지 모르겠지만, 그건 적당히 요령 없게 만진 거고, 사랑을 담아 싹싹 만지면 반짝반짝 윤이 난다고 나는 믿는다.


‘반지랍다’는 ‘기름기나 물기 따위가 묻어나 윤이 나고 매끄럽다'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자주 만진 부분은 꽤 매끄럽게 되는데, 이게 바로 반지라운 것이다. 엄마가 머리도 만져주고, 배도 만져주고, 등도 쓰다듬어 주는 아이는 반지라운 아이가 된다. 반지처럼 반짝이는 아이가 된다. 난 양육자가 되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의 마음으로 머리도, 배도, 등도 만져주진 못하지만 (누군가를 만지는 것이 상대방을 불쾌하게 하는 일일 수 있으므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반지라운 아이를 계속 반지라울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지난 주말에는 김소영 작가님의 <어떤 어른> 북토크에 다녀왔다. ‘어른이 어린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어른의 모습들은 ‘쓰다듬어 주는 어른, 등을 토닥이며 격려하는 어른’ 등인데, 모두 어른이 어린이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일이다. 그런데 북토크에서 나온 이야기의 방향성은 조금 달랐다. ‘어른에서 아이로’가 아니라, ‘아이에서 어른으로’ 향하는 것들이었다. 책 표지에는 출근하는 어른 뒤로 여러 아이들이 보인다. 아이들은 항상 어른을 보고 있다는 것을 표지에 담아낸 것이었다. 아이들의 눈이 어른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올바르게 살아가려 노력한다면, 어린이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좋은 어른이 있어 안심하는 마음이 생겨 계속 반지라울 수 있는 아이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반지라움은 어른의 성실함에서 나올지도 모르겠다.


또 어제는 <쿵푸팬더3>를 보았다. 이 영화 역시 보고 또 보는 영화이긴 한데, 상대를 반지랍게 해 주는 장면이 있어 다시 또 내 글감이 되었다. 위기에 처한 주인공 포를 위해 친구들, 가족들은 모두 기(氣)를 모아 응원한다. 오른손을 위로, 왼손을 아래로 하여 포개준 후, 한 손을 앞으로 내밀어 기를 뿜는다. 그러면 그 기가 포에게 향하게 된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 기는 반짝이는 빛이 되어 포에게까지 향하고, 포는 온몸에 그 반짝이는 손바닥이 찍히면서 힘을 충전한다. 난 이 장면을 백 번 봐도 백 번 다 울 자신이 있다. 어렸을 때 이마가 깨져 피가 철철 났을 때, 내 이마를 지혈해 주던 엄마 생각이 나서, 엄마의 손길이 생각나서, 술 잔뜩 먹고 집에 와서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맨날 내 손 잡고 사과하던 아빠 생각이 나서, 아빠 손길이 생각나서, 수능 보러 가는 아침에 굳이 지하철로 날 데려주고는 잘 보고 오라고 손 흔들어 주던 언니 생각이 나서, 언니 손이 생각나서….


나는 이미 반지라운 아이였다. 여러 사람의 손길로 만져지고 다듬어진 반짝이는 아이. 이제 내 주변에 있는 어린이들에게 반지라움을 선물할 차례이다. 블루투스 기능 켜고, 멀리서도 다독이고 만져줄 수 있는 어린이들의 다정한 어른이 되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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