맵자한 어른

by 오선희

일을 하다가 잠깐 바람 쐬러 건물 밖으로 나갔다. 주머니에서 네모난 모양의 작은 종이 상자를 꺼낸다. 가로로 둘러진 비닐 끈을 벗기고, 상자 속의 것을 하나 꺼내 입에 문다. 그것은 목캔디! 난 흡연을 하지 않지만, 목캔디를 먹는 내 모습이 담배 한 대 물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람 같아 보였다. 비닐 껍데기를 벗기고 목캔디를 입에 넣은 후, 들숨 날숨 쉬다 보면 목캔디의 화한 맛이 더 살아난다. 이제 보니, ‘후’하고 날숨을 뱉는 것도 담배 한 대 피우는 모습과 닮아 있다. 목캔디는 이렇듯 큰 숨을 잘 쉴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코로나 시기에 마스크를 쓰고 다녔을 때에는 목캔디의 화한 맛이 마스크 틈을 타고 눈으로 올라와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만, 눈이 번쩍 뜨이는 효과도 있어, 오히려 좋았다.


목캔디는 가방에 거의 항상 들어 있다. 가방에 없다면, 주머니에 있다. 그 정도로 항상 챙겨다니는 목캔디를 먹기 시작한 건, 2006년 교생실습을 하던 때였다. 나는 평소 목청이 좋고, 성대가 쫀쫀하며 강하기로 유명했기에, 시범 수업 몇 번에 목소리를 잃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긴장했던 모양이다. 목소리의 강약 조절을 전혀 하지 못한 탓으로 나는 교생실습 한 달의 절반 가까이를 필요한 말만 하는 시간을 살았다. 말하기 좋아하는 내게는 고난의 시간이었다. 수업은 해야 했기에, 쉬는 시간에 목캔디를 물고, 오물오물 대다가 수업 들어갈 때 먹다 만 목캔디를 은박 껍데기 위에 살짝 뱉어두었었다.


목을 많이 쓸 수밖에 없는 일을 해 오면서 목캔디는 나의 동반자가 된 셈이다. 가끔 수업시간에 어린이들이 “선생님 목캔디 먹었죠?” 하길래 “너도 줄까?” 했더니 매워서 못 먹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난 또 ‘그래, 이렇게 매운 게 바로 어른들의 세계지’ 생각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어른인 척 으쓱해졌다. ‘맵다’라는 의미로 자주 오해하는 우리말 ‘맵자하다’는 ‘모양이 제격에 어울려서 맞다.’라는 뜻의 말이다. 매운 듯 시원한 목캔디는 어른의 세계를 맵자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맵자하다’의 ‘맵’이 ‘맵다’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면, 아마도 ‘맵시’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맵시 있는 모습과 자세가 매력을 더하는 것이다. 가끔 어린이들이 자신의 세계 안에 사로잡혀 어른을 신기하게 생각하며 질문하는 게 귀엽다. “선생님도 운전할 줄 알아요?”와 같이 능력치를 묻는 경우, “선생님도 공중전화 써 봤어요?”와 같이 자신들이 겪지 못한 과거를 묻는 경우, “선생님 집에는 오븐이 왜 없어요?”와 같이 살짝 선을 넘는 질문을 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어린이이기에 가능한 질문들이 수업을 가득 채운다. 한 번은 “선생님은 왜 아이가 없어요?”라고 묻길래, “응, 선생님은 아이 없이 사는 삶을 선택했어.”라고 간단히 말해 주었다. 그랬더니 다시 또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라고 되묻길래,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하나 하고 난감했던 적이 있다. 다행히도 어린이들의 주제 전환은 빠르다. 곧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나중에 좀 더 크면 그때 자신들이 했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시간은 답을 알려주는 경우들이 많다.


선생님이 엄마 아빠처럼 운전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공중전화도 써 봤을 정도로 오랜 경험이 풍부하다면, 아이들은 선생님을 맵자하게 바라봐 줄 거라고 생각한다. 학자금 대출을 다 갚고, 내 명의의 경차를 하나 사게 되었을 때, 또 그 차의 할부를 연체 없이 다 갚았을 때, 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요금을 결제하고 다시 좁아지는 차선을 찾아 들어갈 때, 옆차와 앞차와 뒷차의 속도를 맞춰가며 부드럽게 차선을 찾아들어갔을 때 난 좀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감정이 요동치지 않을 때, 누가 내 얘길 하고 다닌다고 했을 때에도 별로 화가 나지 않을 때, 어린이들을 이기려 들지 않을 때, 난 내가 맵자한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다. 이렇듯 어른이 되는 느낌은 일상속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뭐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린이는 못 먹는 매운 사탕을 쫍쫍 빨아 먹으면서 이 글을 쓰는 지금은 2024년 12월의 어느 날, 얼마 있으면, 다시 또 한 살 더 많은 어른이 될 것이다. 마흔 둘이나 마흔 셋이나 하는 행동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마감날짜까지 늘 할 일을 미루고, 가끔은 양치질을 건너뛰고 싶기도 한 어린아이 같기도 하지만, 마감날짜까지 결국은 끝내고, 치과 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맵자한 어른이 되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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