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봐, 이거 봐. 또 물 조금 남겼네.” 같이 사는 사람한테 내가 항상 지적 받는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음료수든 물이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싹 다 먹지 않고, 밑바닥에 조금씩 남기는 것이었다. 이른바 밑장깔기, 대한민국 부장님, 과장님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회식 자리 밑장깔기라던데, 난 이러나 저러나 회사 생활은 참으로 못했겠다.
왜 이렇게 남길까 생각하다가 하나 알게 된 것이 있다. 음료수를 끝까지 먹기 위해서는 고개를 뒤로 홱 젖혀야 하는데, 난 그게 참 힘들다. 목과 어깨 부위에 만성 통증을 안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스트레칭을 해 봐도, 특히 목은 늘 뻣뻣하고 잘 풀리지 않는다. 이제 그 통증이 팔뚝과 팔목에까지 전달된 듯하다. 이게 다 무슨 일일까?
내가 어깨 통증을 달고 사는 것은, 컴퓨터 앞에서의 일이 많기도 하고, 천성이 쫄보라 긴장을 많이 해서인데, 한편으로는 하늘을 잘 안 보고 살아서인 것 같기도 하다. 이게 무슨 뜬금없는 추론인가 싶겠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주기적으로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는 일을 했다면, 억지로 시간내서 목이나 어깨 스트레칭을 하지 않아도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을까. 결국 이 모든 게 하늘을 안 봐서 생긴 일이었다. 하늘을 안 봐서 목과 어깨 운동이 안 된 나는 500미리 페트병에 담긴 물을 끝까지 먹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토록 하늘을 보는 건 중요하다. 중학교 교과서에 단골 등장하는 소설 중에 <하늘은 맑건만>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문기는 실수를 덮으려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덮으려 또 거짓말을 하다가 거짓말이 눈덩이같이 불어났다. 나중엔 양심의 가책이 너무 심해져 하늘을 떳떳이 바라볼 수 없게 된다.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다 고백한 후, 그제야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작품 속에서 하늘은 양심의 척도로 기능한다. 스트레칭을 위해서건, 양심을 위해서건 하늘을 보는 건 이래 저래 중요하다.
우리말 ‘하늘구멍’은 ‘덮였던 구름이 갈라지면서 나타나는 하늘의 작은 부분’이라는 뜻이다. ‘하늘’도 아는 단어, ‘구멍’도 아는 단어인데, 두 단어를 모아 놓으니 좀 생소하기도 하다. 구름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잘 보이는 날엔, 산책 중 여러 번의 명암을 경험한다. 햇빛이 쨍하고 내 발 앞을 비추다가도, 어느 순간 어두워진 콘크리트 바닥을 보게 된다. 그렇게 구름이 살짝 틈을 내 주어 가려졌던 햇살이 쏟아져 나오는 구멍이 ‘하늘구멍’이다. 자연스럽게 눈길이 그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그 구멍을 통해서, 하늘의 메시지가 나에게 와 닿을 것 같기도 하고, 신비한 자연의 모습에 감탄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하늘은 원래도 막힌 것이 없는지라, 어디서든 햇살을 내리쬐고 있는데, 왜 우리는 유독 하늘구멍으로 내리쬐는 햇살에 감격하는 것일까. 그건 구름의 틈 사이로 내리고 있는 햇살을 보는 순간, 그 햇살 주위에 있던 구름을 인지하게 되어서일 거라 생각한다. 나에게 주어진, 작지만 소중한 시간들은 주위 사람들의 애씀과 내 노력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늘구멍’은 아가들의 초점책처럼 내가 어디에 초점을 맞춰 살아야 하는지 알려 준다. 소소하지만 뜻깊은 삶의 순간들을 만날 때마다 지치지 않고, 질리지 않고 감격하라고 알려 준다. 또, 내가 받은 주위의 많은 도움들을 잊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가끔 삶의 고민은 얼굴에 난 여드름 같은 거라 생각할 때가 있다. 여드름은 그냥 같이 가는 거다. 어느 날 거울을 보았을 때, 그날 딱 여드름이 가라앉으면 살짝 행복한 거고,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아픈 여드름이 생겨도 살살 달래가며 살면 또 살아지는 거라 생각한다. ‘하늘구멍’으로 빼꼼히 비추는 햇살처럼 작지만 강력한 행복을 발견하며, 순간순간 다가오는 고민을 잘 달래가며 살아가려고 한다. 올해도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