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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분사분해지는 시간

by 오선희

아방가르드 작곡가 존 케이지는 무대 위에 올라 피아노 뚜껑을 열고 가만히 4분 33초를 보낸다. 4분 33초 동안 연주는 이루어지지 않지만, 그 침묵 속에서 공연장은, 기침 소리, 작게 대화 나누는 소리 등으로 채워진다. 존 케이지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음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만약 관객이었다면 처음 30초는 당황했을 거고, 다음 30초는 황당했을 거고, 또 다음 30초는 화도 좀 났다가, 다음 30초에 가서 연주자의 의도를 생각해 보려 했을 것 같다. 그러다가 남은 2분 33초 동안 적극적인 침묵의 호응을 보여 주었을 것이다. 나름 약간의 기침 소리를 보태어 음악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4분여의 시간은 이렇게 한 사람을, 더 나아가 하나의 예술 장르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4분, 4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는 뭘 할 수 있지? 노래 한 곡 정도 들을 수 있을 거고, 지하철 역 2개 정도 갈 수 있을 거고, 방금 놓친 마을 버스를 기다렸다가 다음 마을 버스를 탈 수 있을 테지. 또, 뜨거운 물의 온도가 조금 부족하다 싶으면 컵라면에 물 부어 놓고 넉넉히 4분 정도 있으니까, 컵라면 하나 완성할 수 있는 시간도 되겠네. 또 뭐가 있을까 싶어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더니, 심폐소생술의 골든 타임이 4분이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4분 동안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우리말 ‘사분사분하다’는 묘하게도 완전 대비된 뜻을 가지고 있다. ‘자꾸 살짝살짝 우스운 소리를 해 가면서 성가시게 굴다.’라는 뜻도 있고, ‘성질이나 마음씨 따위가 부드럽고 너그럽다.’라는 뜻도 있다. 그중 나는 두 번째 뜻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 그동안 고유어를 가지고 말장난을 좀 쳐서 글방 동료들이 성가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첫 번째 뜻이 자기소개 같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뜻에 가는 마음을 잠시 거두고, 두 번째 뜻에 마음을 담뿍 담아 보았다.


함께 공부하는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에게 기분이 안 좋을 때 무엇을 하느냐 물었던 적이 있다. 그 아이는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고 했다. 그러면 마음이 좀 부드러워진다고. 이 아이에게 노래 한 곡 정도 듣는 4분은, 마음을 사분사분하게 만들기 충분했으리라 생각한다. 약속 시간에 쫓겨 집을 나섰는데, 눈 앞에서 마을 버스가 떠나버렸다면, 화딱지가 나서 약속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면, 딱 4분만 기다려봐야지, 4분 안에 다음 버스는 올 테니까, 그러면 내 마음은 사분사분해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분 단위로 쪼개 살아야겠다 다짐하며 바쁘게 살아보겠다 새해 계획을 세워보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화장실에서 릴스를 넘겨보며 보내는 시간에는 1시간도 더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면, 나 스스로에게 화가 날 때가 많다. 그럴 때 4분, 딱 4분 정도만 생각을 정리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컵라면에 물을 부어 놓고 라면이 다 익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워 사부작사부작 컴퓨터 작업을 하다가 라면에 물 부어놓은 거 까먹고, 나중에서야 퉁퉁 불어 버린 라면에 신경질이나 내지 말고, 4분 동안 그저 기다리는 일에 몰두해 보는 걸로. 해야 할 일이 많은 날엔 손이고 다리고 마구 빠르게 움직여 만화에서처럼 빗금으로 처리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 같지만, 실상은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 컴퓨터 화면만 멍하니 보는 날들이 많은데, 이럴 때도 가만히 해야 할 일을 정리하는 데 4분을 써 보는 걸로. 그렇게 하기로 했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으로 나조차 나를 감당할 수 없을 때, 사분사분해질 수 있는 길은, 시간을 가져 보는 것이다. 그 시간을 나는 4분으로 정했다. 내가 나를 감당할 수 있게 될 때, 다른 이에게도 너그러워질 수 있을 테니, 우선 나부터 사분사분해질 수 있는, 온전한 4분의 시간을 지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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