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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Apr 15. 2021

[생각 8] 엄마와 나 사이의 적당한 거리는 몇 m일까



사람 사이에는 각자의 적당한 거리가 있다. 어떤 사람은 더 먼 것을, 어떤 사람은 좀 더 가까운 걸 선호한다. 학교에서는 정답이 있는 문제들을 풀라 하지만, 정작 사회에 나오면 이렇게 정답이 없는 문제를 만날 때가 훨씬 많다.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지라 딱 맞는 답을 알려줄 수 없기에, 학교에서는 어느 정도 답이 정해진 문제를 골라 알려주는지도 모르겠다. 



'사람 사이'라는 단어는 사회에서만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가끔 '가족'도 하나의 사회라는 걸 간과할 때가 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가족 간의 싸움이 벌어지면 집안에는 걷잡을 수 없이 큰 감정의 골이 생기고, 이후엔 어디서도 본 적 없던 냉랭한 바람이 분다. 어느 편도 들 수 없이 제3 자가 된 다른 가족 구성원은 더욱 난처해지는 건 당연한 순서로 뒤따라온다. 우리 집에도 최근 그 바람이 지나갔었다.



어느 날 평범하게 마무리될 줄 알았던 밤 10시. 엄마와 내가 큰 소리를 내며 싸웠다. 한 명은 이상을 바랐고, 한 명은 철저하게 현실을 바라봐서 생긴 갈등이었다. 그 누구도 정답이라고 할 순 없었다. 단지 각자가 바라보거나 원했던 도착점이 달랐던 것뿐이었다. 둘 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눈물 바람이 났고, 눈물 바람이 심해지자 딸인 나는 먼저 백기를 드는 척 방으로 들어갔다. 



서로의 눈이 팅팅 부은 다음 날. 여전히 집 거실에는 남극 저 어딘가에서 퍼 올린 찬기가 도사렸다.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각자 출근 준비를 마쳤다. 다녀오라는 인사는 서로의 암묵적인 동의로 생략되었다. 부모님이 먼저 출근하시자마자 나는 방바닥에 퍼질러졌다. 평소와 다른 어색한 공기에 나는 이 분위기가 못 견디게 싫었다. 말로는 먼저 백기를 들었어도, 마음속으로는 이미 백기를 분지른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회사에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는 난 그날 유독 만사가 귀찮았다. 회사 근처 어딘가에서 사 먹자는 마음을 먹고 집을 나서려는데, 방문 옆에 내 도시락통이 고이 싸인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냉기가 뿜어져 나왔던 엄마의 도시락이었다. 그런다고 꺾이지 않을 거야. 딸은 따뜻한 도시락을 들고 객기를 부리며 출근했다.



오전 업무가 끝난 점심시간. 학생 때와 다를 바 없이 점심시간이 제일 즐거운 회사원은 자리에 앉아 도시락을 하나둘 늘어놓았다. 도시락 뚜껑을 열려다 멈칫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엄마가 싸준 도시락에 마지막 투정을 부리는 딸이었다. 그리고 고민하던 도시락을 열어젖힌 딸은 한동안 목이 메 식사를 할 수 없었다.



딸이 좋아하는 배추의 하얀 부분만 보기 좋게 쏙쏙 잘라놓은 익은 김치.

딸이 좋아하는 메추리알과 돼지고기의 1:1 맞춤 달달한 장조림.

딸이 좋아하는 빨간 진미채 볶음과 그 옆에 가지런히 놓인 푸른 브로콜리.



그날 한참을 눈이 빨개져서 도시락만 보다가 꾸역꾸역 밥을 넘겼다. 평소와 다르게 굉장히 슬펐던 점심시간이었다. 그리고 퇴근 후에 부러진 백기를 다시 엮어 크게 펄럭였다. 또 한 번의 칼로 물 베기가 끝이 난 날이었다. 



솔직히 나는 아직도 엄마와의 적당한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야 다시 안 볼 수 있는데 엄마는 다시 안 볼 수 없으니 거리를 매우 잘 조정해야 한다. 지난 그 날을 회상하며 도대체 엄마와 딸 사이에 적당한 거리감이 몇 m일까 생각해본다. 그저 한 명이 덥거나 귀찮으면 좀 떨어지고, 한 명이 춥거나 아프면 좀 더 붙는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적다 보니 그때 미안한 감정이 조금 남았나 보다. 미안함을 담아 밥 제대로 잘 챙겨 먹었냐는 엄마의 카톡에 ㅇㅇ 대신 요것조것 잘 챙겨 먹었고, 사준 과일까지 맛나게 해치웠다는 답변을 보냈다. 오늘은 엄마랑 한 뼘 더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거리감을 맞추었다.



p.s 딸의 정성 어린 답변에 엄마는 똑같이 ㅇ 한 글자를 보냈다. 이 카톡방에 나는 ㅇㅇ가 제일 많고, 엄마는 ㅇ가 제일 많다. 이런 게 엄마랑 딸 사이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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