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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Dec 31. 2021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도

일간 연 5화

2021년도 어느덧 마지막 날이 되었다. 새해가 된다고 해서 딱히 상전벽해할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날짜라는 것은 사람들이 계산하기 쉽게 만들어 놓은 체계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하지만 어쨌든 새해가 다가오면 치열하게 보낸  해를 돌아보게 된다.


올해 연말은 유달리 우울했다. 항상 뭔가 성취하고 어딘가로 나아가 있던 내 대부분의 연말과는 달리 이번 연말은 별로 해 놓은 게 없어서 더욱 그랬다. 그렇게 성취지향적인 인간이 아님에도 새해를 맞는 순간에 "작년에는 이걸 해냈다!"고 외칠 수 없으면 그만 의기소침해지고 만다. 그래서 한동안 꽤 풀이 죽어 있었다. 자랑할 것도 내보일 것도 없이 2022년이 시작되는 데에 마음이 위축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때문인지 몰라도 약한 몸이 탈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어느 때는 글을 쓰는 것조차 할 수 없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한번 진정으로 한 해를 돌아보면 내가 몇 년전까지만 해도 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들을 할 수 있게 됐음을 깨닫는다. 스무살 무렵의 나는 애인이 나에게 창피를 준다고 해도 헤어지지 못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자꾸만 눈치를 보게 만들고 예의를 지키지 않는 애인을 두고 돌아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돌아서서,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고 말할 수도 있게 되었다. 스물한 살 무렵의 나는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이었다. 너무 머리가 아파서 하루에 타이레놀을 권장량 이상 먹으면서도 쉬거나 '쉬게 해달라'고 말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나는 자진해서 쉴 줄 알게 되었고, 덜 힘든 길과 더 힘든 길이 있다면 덜 힘든 길을 택하는 것이 결코 비겁하지 않다는 데 생각이 이르렀다. 나는 덜 고생하고 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내가 조금 어색하게 굴어도,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해도, 주저하다가 인사할 타이밍을 놓쳐도, 주변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행동해도 괜찮다. 왜냐면 그게 나고, 나는 나로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 미숙한 스스로를 잘 달래가며 살아야 한다.


한때 성장이란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믿을 때가 있었다. '한때'라고 말하기엔 너무 가까운 시기다. 사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의 2021년은 성장 없는 한 해, 메마른 1년이라고 생각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알게 되었다. 자우림의 김윤아는 '열일곱 또는 열 셋의 나를 안고 조곤조곤 말할 수 있는' 자신을 성장한 자아로 상정했듯이, 스물 또는 스물다섯의 나를 안고 힘들었냐고 물어볼 수 있는 나 자신은 성장한 나라는 것을.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스물 또는 스물다섯의 나를 만나고 싶다. 그래서 말해주고 싶다. 네가 바라던 모든 게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그렇게 멋진 내가 되지도 못했지만, 무사히 잘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네가 겪었던 온갖 심각한 문제들을 글로 다듬어 쓸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올 거라고. 지금은 지금 나름대로의 문제들이 있지만 그것도 차근차근 살펴보고 있다고. 그러니까 겁 먹지 말고 자라나라고.


사람은 죽지 않는 한 계속 자라난다고 생각한다. 자라남의 끝에는 조금 바뀐 내가 있다. 심리학을 공부하는 친구는 사람의 성격은 스무살 이후로 바뀌지 않는다고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익숙해지고 무언가를 정면에서가 아니라 비스듬한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된 내가 있다.


내 책상에 붙여놓은 말처럼 '스스로를 너무 미워하지 말기'. 미운 짓을 한다고 해도 그렇게 배워가는 과정인 거니까. 몇 번을 밀쳐져서 포기하든 포기하지 않든 나는 나인채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렇게 3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왔음에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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