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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Dec 30. 2021

개지 않은 빨래, 뜯지 않은 택배

일간 연 4화

한겨울이면  바람이 불고 눈이 정말 많이 내리던 도시에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어떤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바지런히 일하고 있었는데, 팀원들이 전부 서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밤늦게까지 일을 하다가 막차를 겨우 타고 집에 돌아가고는 했다. 막차를 타면 자리에는 술기운이 얼큰하게 오른 사람들과 피로에 찌든 사람들, 그리고   모두가 공존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겨우  자리를 찾아 앉아서 노래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미안하지만 제가 ''라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요,  ?"1)


당시 내가 살던 집에는 개인용 세탁기가 없었고 그 건물의 다른 층에 있는 세탁실을 써야만 했는데, 12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가니 가뜩이나 피곤한 상황에 거기까지 가서 빨래를 넣고, 돌리고, 다시 꺼내와서 건조기에 돌리고, 깔끔하게 개켜 놓을 기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옷을 갈아입긴 해야 했으므로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세탁실에 가곤 했다. 세탁실로 가는 길은 온통 어둡고 아무도 없었다(물론 누가 중간에 있었다면 더 무서웠을 것이다). 세탁기를 한참 돌리고 나면 새벽 1시가 넘어갔고 나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으로 다시 건조기를 돌렸다. 그러고 나면 새벽 2시가 넘었고, 나는 내일 12시까지는 다시 서울에 가야 한다는 것을 떠올리며 건조된 빨래를 들고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오면 도저히 빨래를 개킬 힘이 없었다. 그렇다고 빨래를 그대로 빨래 바구니에 넣어놓으면 다 구겨져버리니 나는 온 방에 빨래를 펼쳐놓고 죽은 듯이 잠이 들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나를 맞아주는 것은 청소도 되어 있지 않은 방에 빨래가 잔뜩 늘어져 있는 풍경이었다. 그 풍경을 마주하면 침대에서 한 발짝도 나가기가 싫어졌다. 나는 나갈 시간이 될 때까지 잔뜩 버티다가 시간이 다 되어가면 후다닥 세수를 하고 화장품을 찍어 바르고 방을 나섰다.


그러다가 날이 확 추워졌다. 서울의 겨울은 남쪽에서 살다 온 사람에게는 잔인한 구석이 있었다. 고향에서 그랬듯 코트에 니트 하나씩 챙겨 입고 다니다가 찬 바람에 손이 얼어 터지고 볼이 텄다. 손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돌아다니다가 겨우 친구에게 핸드크림을 빌려 손에 바르고 다시 막차에 올라 타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이미 동네는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눈을 뽀득뽀득 밟으며 집으로 향했다. 그 눈을 뚫고 가야 하는 집이 온통 빨래로 뒤덮여 있는 집이라는 게 놀라울 정도로 공허했다. 목도리도 장갑도 없는 겨울보다 개지 않은 빨래로 가득 찬 집이 더 서러웠다. 추위에 떨며 집에 도착해서 나는 가족에게 겨울옷을 부쳐줄 것을 전화로 부탁했다. 여전히 빨래는 개지 않은 채였지만 추위에 언 몸으로 빨래를 갤 기력이 없었다.


그렇게 프로젝트에 시달리던 어느날 택배가 도착했다. 택배 상자 안에는 내가 기다리던 장갑과 목도리가 있었다. 더 두꺼운 코트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중 어느 것도 곧바로 입을 수가 없었는데 택배를 뜯을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몇 겹의 테이프를 찢고 상자를 열 힘조차 없을 때가 있다. 오전부터 시작해 새벽까지 계속되는 일정은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막차를 타고 가는 길도, 막차를 타고 가는 길에 음악을 듣는 게 유일한 휴식일 뿐인 하루도, 눈 속을 혼자 걸으며 새벽녘에 집에 돌아오는 것도, 빨래를 갤 겨를조차 없는 밤도,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나는 그저 몇 가지 노래를 틀어 놓고 침대에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프로젝트를 그만둬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뭔가를 포기하는 법을 배우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개지 않은 빨래와 뜯지 못한 택배가 가득 찬 집에서 눈 내리는 계절을 보냈다.




--


1) 김목인, <불편한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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