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연 3화
아직도 기억에 남는 한 칼럼이 있다. 심리학 박사 학위가 있는 저자가 쓴 글이었는데, 알코올 중독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 칼럼이었다. 그 칼럼에서 화자는 프랑스에서 석사 유학을 하던 시기에 질적 연구 방법으로 논문을 쓰려다가, 인터뷰 대상으로 정한 수 명의 한국인이 모두 알코올 중독으로 판단된다는 이유로 반려당했다고 언급한다. 그들은 일주일에 소주 2병 정도를 마시는 아주 평범한 한국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는 빈도와 양에 따라 심리학계에서는 당연히 알코올 중독으로 분류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는 두번째 사건. 대학교 캠퍼스를 돌아다니다가 절주 캠페인을 하고 있는 부스를 발견하고 참여하면 간식을 준다길래 알코올 의존증 테스트지를 받아들고 체크를 시작했다. 체크하고 테스트지를 건네주니 곧바로 돌아온 대답, "알코올 의존이 심각하시네요." 그때 나도 모르게 뭐라 반박을 하려고 했는데 옆에 있던 친구는 "알코올에 의존하지 않고 계세요." 라는 답변을 받는 걸 보고 입을 다물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이렇게 주절주절 알코올 중독에 대한 이야기를 떠든 것은 알코올 중독이 한국 사회에서 정말 흔한 병이라고 이야기함과 동시에, 내가 알코올 중독 위험군이라는 운을 떼고자 함이다.
나는 술을 정말 좋아한다. 내가 술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사실 별로 건강하지 못한데, 다수가 어울리는 자리에서 항상 어색해하는 나를 분위기에 적응하게 해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별 특징 없는 내가 눈에 띄게 해주는 요소가 술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닮아 주량이 센 편이었기 때문이다. 스무살 때 나는 정말 술을 자주 마셨고 많이 마셨다. 학과 술자리에 가서 남자애들과 술 대결을 해 이긴 기억 등은 나에게 참으로 유쾌했다. 친구들 역시도 '우리 학교에서 제일 술 잘 마시는 연이'로 나를 기억해 주었다. 너무 소심하고 조용해서 이렇다 할 캐릭터가 없었던 나에게 그런 이미지는 꽤 소중했다.
그러나 술이 무서운 것은 어쨌든 중독성 물질이라는 점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술을 어떠한 목적을 두고 마시기 시작할지라도, 나중에는 술 자체에 집착하게 된다. 분명히 사람들 사이에서 덜 어색하기 위해 술을 마시던 나도, 어느 순간부터 인생을 좀 마취시키고 싶은 기분이 들 때 술을 찾기 시작했고, 거기서 더 나아가서 술 반입이 금지된 기숙사에 몰래 소주를 들여 놓고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조정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싫은 소리 못하던 당시의 내 성격상 스트레스가 심했고 잠도 잘 이루지 못했다. 그럴 때면 나는 룸메이트 없는 기숙사 한 구석에서 잔에 소주를 따라 마시곤 했다.
그러다가 술을 정말 좋아하는 친구와 친해지게 되어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들이붓기 시작하는 때가 왔고, 술 없이는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도 모르게 되었다. 그때 나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칠 수 있는 사고란 사고는 다 쳤다. 술값도 한달에 몇십 만원씩 썼을 것이다. 주변에서 내가 술 마시는 것을 걱정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술을 안 마시고는 삶을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게 소설이라면 나는 그러나 화자는 술이 몸에 해롭다는 강력한 깨달음을 얻고 술을 탁, 끊었다는 해피엔딩을 내고 싶다. 그러나 내 알코올 의존은 주기적으로 심해진다. 특히 의지하던 친구가 해외로 떠난 이후로 잠깐 또 심해졌었다. 또 집에다 술을 쌓아 놓고 마시기 시작했고, 한번은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3병씩 들이키다가 집에서 블랙아웃을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은 술을 하도 먹었더니 몸이 안 좋아졌다는 게 느껴져서 반 강제적으로 절주를 하고 있다. 이번 절주는 그래도 오래 할 생각이다. 언제까지 알코올 중독으로 살 수는 없으니까. 최근 보고 있는 <구경이>라는 드라마에서 술을 마셔야만 제대로 된 생각과 말을 하는 주인공을 보다가, 몇 년 뒤에 내가 저러고 있지 말라는 법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은 적당히, 어쩌다가 한 번씩 기분좋을 정도로만 마셔야 한다고, 나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다짐이지만 생각해 본다. 알코올 중독 여자가 소설 주인공으로는 꽤 매력적이지만 현실에서는 병들어서 단명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