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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Jan 01. 2022

다정도 병이다

일간 연 6화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말은 '잘해준다고 쉽게 따라가지 말라' 말일 테다.  역시 그런 말을 듣고 자랐으나  말이 나에게 별로 먹힌  같진 않다. 나는 누가 잘해주면 쉽게 좋아한다.  년에 걸쳐 ' 호구야' ' 정이 지나치게 많아' ' 다정한 사람일 뿐이야' 사이를 오가고 있다. 결과적으로 나는 호구인 경우가 제일 많다. 해도해도 너무 금방 사랑에 빠지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한 사람들을 나열한다면 드라마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못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하게 된 계기가 너무 황당해서 드라마로는 못 만들 테다. 예를 들어 나는 유난히 나에게 말을 자주 걸어준다는 이유로 사람을 좋아해본 적도 있다. 뭐 이렇게 음침한 이유가 다 있나 하겠지만 나는 이렇다. 이렇게 금방 사랑에 빠지다 보니 '뭐지 날 좋아하나' 하면서 슬그머니 좋아하다가 알고 보니 상대가 애인이 있어서 당황하는 경우도 정말 자주 생긴다. 몇번 이런 일을 겪었으면 반성하고 사람을 좀 덜 좋아할 만도 한데 나는 과거의 경험에서 배우는 것이 없다. 옛 시에 나오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라는 말이 나에게 딱 맞는 말이다. 다정도 병이다.


애인이 있으면서도 유달리 나에게 친절하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정말 별 짓을 다 했다. 그 사람이 부탁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줬었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귀동냥해서 따라 입기도 했고 하여튼 그 사람을 좋아하기에 할 수 있는 행동들은 다 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혹시나 그 사람에게 뭔가 연락이 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또 기대했다. 사랑은 근거 없는 기대와 밑도 끝도 없는 과대 해석으로 점철된 것이 아닐까. 나는 그 사람을 참 좋아했고 그 사람의 SNS를 보면서 나도 저런 데 데려가 주면 좋겠다는 망상까지 했다. 이쯤되면 슬슬 무서워질 때쯤, 그는 이 이상은 애인에게 실례일 것 같다며 나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나 역시도 애인이 있는 사람에게 왜 이렇게까지 마음을 의탁했나 하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어느날, 또 다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고 이 사람도 나를 좋아하나 슬슬 의심이 들 때쯤, 내 곁에 다가온 그 사람의 손에서 커플링을 발견해 버리고 만 것이다. 딱히 속일 생각은 없었다며 그냥 너랑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았다고 그 사람은 말했지만, 왜 나는 이렇게 나를 좋아할 의도 없는 사람들만 좋아하고 혼자 알아서 차이기를 반복하는 것일까? 반짝이던 커플링이 머릿속을 자꾸 맴돌았다. 이건 병이다, 병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


"연이는 다정해서 좋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생각한다. 그 다정이 나를 얼마나 시궁창으로 몰아넣는지. 이게 다정인지 헤픈 건지도 슬슬 모르겠는 상황에서, 정말 견딜 수 없었던 순간은 나를 만나러 오면서 반짝이는 커플링을 손에서 빼지도 않은 사람의, 애인이 있어도 그건 네가 상관할 바 아니라는 말을 듣는 때였다고, 되새겨 본다.


상처를 받고 또 주는 것이 인간사라 하더라도 다정하다는 이유로 상처를 좀 더 많이 받는 건 약간 불공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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