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연 7화
세상에는 전날 남은 불쾌한 기분을 잠 한숨이면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잠을 12시간씩 자고 술을 잔뜩 퍼먹어도 잊어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의 부류인데, 이런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나쁜 일을 잊어버리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머릿속을 맴도는 끈적끈적하고 기분 나쁜 일들을 어떻게 하면 떨쳐낼 수 있을지, 아주 오랫동안 고민해 왔고 완벽히 이별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방법들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몇 년 전에는 무조건 술을 곯아 떨어지게 마시고 하루를 통째로 날리는 것 정도가 해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기면 그 걸리는 게 후루룩 내려가도록 술을 퍼마시기도 했으나, 한번 그러고 나서 다음날 아침 일어나 담배까지 사서 몇 대쯤 피웠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술은 기분이 나쁠 때 마시는 게 아니라는 답을 얻었다. 참고로 글이 안 써질 때 술을 마시는 버릇도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쓴 글들은 밤에 쓴 글들과 마찬가지로 버려야 하는 글들임을 알게 된 이후로 그런 버릇도 끊었다.
그러고 나서는 꽤 격렬한 섹스를 하고 상대의 품에 안겨서 자는 것도 그럴듯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방법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첫번째로 그렇게 격렬한 섹스가 가능한 상대가 별로 없으며, 세상에는 섹스가 끝나면 안아주기는커녕 얼른 집에 가라고 잡아 미는 사람도 많다는 것이며, 세번째로는 그런 섹스가 가능한 상대를 구하려다가 더 큰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잦다는 것이다. 나쁜 일을 잊으려고 만난 사람이 오히려 나쁜 일을 더해주는 일이 몇 번 반복된 후 나는 뭔가 다른 방안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주 오래된, 내가 잊고 싶은 일을 잊는 방법은 글을 쓰는 것이다. 당연히 글로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쓸 수는 없기에, 글에 맞추어 사건을 조금씩 각색하고 다듬다 보면 내 머릿속에서도 사건이 정리가 된다. 그렇게 정리가 된 사건들은 2,000자 정도의 글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조금이나마 가벼운 일이 된다.
이 방법의 단점은 글로도 소화가 안 되는 일이 있다는 부분이다. 머리 끝까지 분이 찬 상황의 그 영화적인 미감을 글로는 담아낼 수 없을 때가 있다. 물론 내가 글솜씨가 부족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 화가 나는 일이 있어서 잊고 싶은 기억이 생긴 건데 그걸 또 글로 일일이 풀어내야 한다는 게 너무 무거운 짐일 때도 있다. 아무리 성질이 나도 글로는 단어를 골라 가며 이해하기 쉽게 쓰고 싶은 게 글쓰는 자의 욕심 아니겠는가.
내가 최근에 다다른 망각의 비법은 요가이다. 그 중에서도 '인 요가'라는 시간을 참 좋아한다. 가장 몸이 편한 자세를 찾아서, 그럼에도 긴장되어 있는 부분들을 찾아 그 부분들에 숨을 불어넣어 주는 게 인 요가의 핵심인데, 그러기를 1시간 정도 계속 하고 있으면 처음에는 온갖 평소에 갖고 있던 나쁜 생각들이 아주 사소한 것까지 다 떠오르다가 나중에는 서서히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세상에 남는 건 나와 이 감각 밖에 없고 기분 나쁜 느낌들은 저 멀리로 밀어내진다.
그러고 나면 내 마음에 공간이 생긴다. 마음에 공간이 생기면 나를 고요하게 만들었던 어떤 순간들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된다. 찬 바람이 불던 도시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떠나면서 들었던 노래들, 한겨울 눈 나리는 도시를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던 길, 새벽 2시에 첫눈이 내린 걸 보고 잔뜩 들떠서 나가 뛰어 놀았던 기억. 돌아다니던 동네에서 능소화 한 무더기를 발견한 추억 같은. 그런 순간들을 되짚고 있으면 판박이처럼 찰싹 붙어 있던 나쁜 기억들이 조금씩, 조금씩 녹아내린다.
망각의 비법이란 결국 마음 속을 비집고 공간을 만들어내는 일일지 모른다. 나쁜 기억 자리를 줄이고, 좋은 기억 자리를 늘리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