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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Jan 03. 2022

아픈 몸

일간 연 8화

아프지 마, 건강하게 지내, 이런 말을 안부 인사 건네듯이 하곤 한다. 건강이란 어느덧 사람의 디폴트 상태로 여겨지게 되었고 아프다는 건 비정상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건강함이 아니라 아픈 게 기본값인 사람들도 있는데, 이를테면 나의 경우가 그렇다.


난 항상 어딘가가 아프다. 스무살 이후에 안 다녀본 병원이 없는 것 같다. 그중에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진 것도 몇 없다. 응급실에 가야 했을 만큼 심하게 아팠을 때도 있었고 왜 아픈지 모르게 아프다가 왜 낫는지 모르게 나은 경우도 있었다. 그냥 두면 나으려니 하고 뒀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으로 악화되어 병원을 들락날락하게 만든 병들도 있다. 


나의 아픈 상태에 대해 말하자면 우울증에 대해 빼놓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우울증으로 약을 먹은지는 어느덧 3년이 되어 간다. 그사이 약이 줄기는커녕 점점 늘어나서 항우울제, 항불안제, 수면제를 먹고 있다. 우울증에 대해서는 이후에 좀 더 자세하게 쓸 일이 있겠지만, 우울증은 '낫는다'는 개념이 무의미한 병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많다. 오히려 살면서 우울증과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배워가고 있다. 항상 어느 정도는 차가운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나를 어떻게 돌보아야 할지, 그리고 우울하면 충동적으로 변하는 나를 통제할 방법은 무엇인지 등등 아직도 배워갈 건 많다.


나는 눈도 매우 좋지 않은데, 눈이 매우 좋지 않은 데다가 글 쓰는 일 같이 눈을 혹사시키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만성적인 안구건조증과 두통이 있다. 두통이 너무 심해서, 모니터 화면을 오래 본 날은 새벽에 눈이 번쩍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깨어나기도 한다. 이게 무슨 큰 병은 아닌가 싶어 허겁지겁 병원에 가 봤지만 들은 대답은 "시력이 많이 나쁘신데 눈이 피로하면 그럴 수 있습니다."였다. 


또 나는 만인이 인정하는 염증 부자다. 조금이라도 피곤해지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에서 가장 먼저 신호를 보내는 곳들이 있는데, 위와 편도선이다. 위염이 한번 들이닥치면 뭘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계속 구토만 한다. 이렇게 구토를 하다보니 역류성식도염도 덩달아 생겼다. 편도선염은 최근에 생겼는데 목소리가 너무 안 나오고 목이 너무 쉬어서 집이 너무 건조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또 염증이라는 소리에 당황했다. 내가 가진 염증의 개수는 어떻게 늘어만 가는 것인가.


현대 여성답게 질염도 있다. 질염 역시도 피곤해지면 재발하는데, 가끔 이 재발의 정도가 심하거나, 간지럽다는 이유로 무심결에 긁어서 상처를 내거나 하기라도 하면 그때부터는 지옥의 시작이다. 앉아서 업무를 보는 것조차 불편해진다. 이 글을 쓰기 2시간 전까지도 나는 이렇게 가장 짜증나는 방식으로 재발한 질염 때문에 앉아서 글을 쓰지조차 못했다. 


이어폰을 많이 쓰는 편이 아님에도 중이염도 있다. 그래서 이어폰을 쓸 일이 있을 때도 의식적으로 이어폰을 뺐다가 꽂았다가 해 주는데, 별 의미는 없는 것 같다. 이것도 그냥 피곤하면 재발한다. 내가 손을 쓸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모니터를 볼 일이 오래 있으면 각막염도 생긴다. 각막염 때문에 울면서 글을 쓸 때도 있다(각막염이 있으면 쉬는 게 좋다, 물론, 나는 그걸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손목에 건초염도 있다. 역시나 이것도 일종의 직업병인데, 손목을 자주 쓸 상황이 생기면 어김없이 재발하기 때문에 손목 마사지를 자주 해주고 손목을 무리하지 않게 하면서 버티는 수밖에 없다. 


내가 거의 항상 걸려 있거나 혹은 걸릴 위험에 처해 있는 모든 병들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건강이란 게 얼마나 신화적인 것인지에 대해 고찰하게 된다. 건강은 어디 있는 개념일까? 정말 건강한 사람이 있기는 할까? 예전에 내가 봤던 어떤 드라마에서는 "현대인은 누구나 건강검진을 하면 종양 몇 개쯤은 나오는 것"이라는 대사가 나오기도 했다. 


이렇게 건강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살면 살수록, 건강하지 않은 사람도 하나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가 얼마나 절실한지를 느낀다. 건강하지 않은 자신의 몸을 저주할 게 아니라, 이런 몸도 몸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사회. 그러나 길을 가다가 마주치는 수많은 광고들이 '건강한 몸'을 보여주며 이상향을 제시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지금 사회는 별로 그런 것 같진 않다.


아픈 몸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어디에도 없다. 아픈 몸은 '구실을 하지 못하는 몸', '낭비하는 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 몸이 받아들여질 곳은 어디인지 고민하다가 막연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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