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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Jan 07. 2022

내 글이 아닌 글

일간 연 12화

예전에 어떤 책에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대하듯이 남을 대했다간 사형당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우리가 실수하는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한지를 생각해보면 그 말도 꽤 일리 있는 이야기다. 특히나 나는 작은 실수에도 하루종일 자책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마 어릴 적 자라온 환경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 아버지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어린 나이에, 아무리 미숙한 상황에서 한 행동이라도 누구라도 흠 잡을 데 없을 만큼 완벽하기를 바랐다. 연필 잡는 자세부터 젓가락질 하는 방법,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와 말을 이어나가는 기술까지, 아버지가 보기에 흔들리는 부분이 있으면 사정 없이 몰아세웠고 내 어수룩함을 탓했다. 그런 아버지의 바람은 내 인생 전반에 걸쳐 있었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공부를 잘할 뿐만 아니라 예쁘고 애교도 많은 딸이어야 했다. 성인이 되어 아버지와 떨어져 살기 시작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나는 내 마음 속에 나를 감시하는 아버지가 있음을 느낀다. 이런 상황에 이렇게 대처하는 날 보고 아버지라면 뭐라고 했을까부터 생각한다. 때로는 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물론 실수는 자주 반복해선 좋지 않고 실수를 반성하는 태도도 분명 필요할 게다. 그러나 한번 실수할 때마다 스스로를 쓰레기통에 쳐넣고 싶어진다면 그게 결코 건강한 마음은 아닐 것 같다. 실제로 실수할 때마다 쥐구멍에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의연하게 대처하는 게 어른스러운 거라면 실수하는 나 자신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수할 때마다 나는 아버지에게 혼나던 어린 시절 나로 되돌아가 버린다. 당황하고 자책하고 어딘가 사라져 버릴 곳을 찾는다. 그리고 이렇게 '실수에도 서툰' 나 자신을 보며 또 한 번 책망한다. 책망하고 또 책망한다. 그러다 보면 내 마음은 다 깎여서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실수'라고 하면 내 마음을 스쳐 가는 한 장면이 있다. 어릴 적 나에게는 글을 가르쳐 주던 친척이 있었고 나는 그 친척이 쓴 글을 똑같이 베껴 쓰는 게 숙제였다. 아버지는 내가 스스로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던 게 아니라, '그 친척이 쓴 글과 같이' 완벽한 글을 써내기를 바랐나 보다. 매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글을 따라 쓰는 게 내 숙제였다. 집중력이 흐트러져서 조금 다른 부분이 있거나 어그러진 면이 있으면 나는 숙제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내가 혼자 힘으로 써낸 글들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내 친척의 글은 논리정연하고 반듯한 면이 있었지만 내 글은 어딘가 불안하고 힘이 없고 감정적인 면이 있었기에, 아버지가 보기에 내 글은 한없이 떨어져 보였다. 내가 이따금 아버지에게 보여주는 글들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쓴 편지마저도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꾹꾹 눌러 쓴 손편지더러 아버지는 좀 더 친척을 본받아 보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글의 구성이 엉망이라는 것이었다. 아버지에게 진심을 전하기 위해 글의 구성이 좀 난잡했던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때 열살 무렵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아버지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필사적으로 친척이 가르쳐 줬던 글들을 떠올렸다. 어떻게든 그 글들과 유사한 글을 써내려가야 했다. 


혼자 있을 땐 마음껏 내 글, 어딘가 흔들리고 모자라고 볼품없는 글들을 써냈지만 누구한테 보여줄 글을 쓸 때는 자꾸만 주저하고 누군가의 글을 흉내내려고 했다. 지금도 버릇으로 남아 있다. 내가 친구들에게 쓴 편지의 첫머리에는 대부분 '못 쓴 글이라 미안하다'는 말이 있다. 내 글을 잘 썼다고 느껴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남에게서 칭찬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칭찬하는 법을 배우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오랫동안 내 글이 아닌 글을 써오던 나는 나만 보는 공책에 내 글을 가득 담았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영영 내 글을 잃어버리게 될 것만 같았다. 혼자 쓰는 공책 속에서 나는 잔인했고, 무자비했고, 감정에 치우쳐서 온 글에 눈물이 넘쳐 흐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바로 나였다. 검사받거나 평가받지 않는 때 나는 내 글을 썼다. 조금씩 되살려온 내 글이라는 불씨가 지금도 남아있음에 다행을 느낀다.

 

실수가 많은, 흠집 투성이인 내 글을 내가 좋아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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